문학의뜰 53

늦가을/도종환

늦가을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깊어갑니다 가을엔 모두들 제 빛깔로 아름답습니다 지금 푸른 나무들은 겨울을 지나 봄 여름 사철 푸르고 가장 짙은 빛깔로 자기 자리 지키고 선 나무들 모두들 당당한 모습으로 산을 이루며 있습니다 목숨을 풀어 빛을 밝히는 억새풀 있어 들판도 비로소 가을입니다 피고 지고 피고 져도 또다시 태어나 살아야 할 이 땅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 차마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어 갈라진 이대로 둔 채 낙엽 한 장의 모습으로 살아져 갈 순 없어 몸이 타는 늦가을 입니다 도종환

문학의뜰 2023.12.06

뒤에서 바람 부니 / 백무산

뒤에서 바람 부니 여자의 젖가슴에 안겨 철든 아이처럼 태연스레 뻐끔뻐끔 주위를 둘러보는 저 개는 지가 개가 아닌 줄 아는 모양이다 말귀 다 알아듣고 침실에 발랑 누워 주인 집 아이에게 질투도 하고 거실에서 콩당콩당 뛰고 뒹구는 저 개는 지가 개가 아닌 줄 아는 모양이다 손님 찾아가면 슬금슬금 꼬리를 감추더니 주인 나오면 극성으로 짖어대고 주인이 말리면 더 큰 용맹 발휘하여 물려고 덤벼드는 저 개는 지가 개가 아닌 줄 아는 모양이다 개에게는 저 짓이 생존의 방식이라지만 개는 자신이 개임을 부정해야 개밥 먹을 수 있다지만 이런 인간들이 도처에서 콩당콩당 뛰고 있다 주인 나왔겠다 충직하게 아무렇게나 용맹스럽게 짖어댄들 어떠리 뒤에서 바람 부니 아무렇게나 어떠리 백무산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문학의뜰 2023.12.02

그런 날 있다 / 백무산

그런 날 있다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 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 볼 저녁에 누워 살아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 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쫓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백무산

문학의뜰 2023.12.02

인간의 시간/백무산

인간의 시간 ​ ​ 마른 풀잎 위로 부드러운 빗방울이 깃털처럼 내린다 구름은 산자락까지 내려와 게릴라처럼 주의 깊다 비에 씻긴 바람도 저희들끼리 아주 주의 깊게 착지를 찾는다 개울은 작은 풀씨 하나라도 깨울까봐 뒤꿈치를 들고 걷는다 시간은 자신의 거처를 몰라 머뭇거린다 ​ 나무들도 옷을 벗는다 지난 가을에 외투만 벗은 나무는 마지막 단추까지 푼다 소리없이 안으로 옷을 벗는다 ​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대지에 무슨 음모가 시작되는가 새들도 숨을 죽인다 언제 명령이 떨어지는가 누가 발진을 지시하는가 시간도 순응하는 시간 ​ 일사불란한 지휘계통도 없이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순응하는 지휘계통 흙 알갱이 하나하나 수소처럼 가볍다 새들도 숨을 죽인다 ​ 대지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거역한다 소모와 죽음의 행로를 걸어..

문학의뜰 2023.12.02

낙화(落花)

낙화(落花)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기형도시인 출생1960년 2월 16일, 인천 사망1989년 3월 7일 (향년 29세) 데뷔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안개' 등단 중앙일보 기자 수상: 윤동주 문학상,연세대 문학상. 197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후,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

문학의뜰 2022.03.19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 2022.01.13.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 알면 참모습이 보인다 혹은 아는 만큼 보인다. 知 알 지,則 곧 즉, 爲 할 위, 眞 침진, 看 볼 간 이 말의 유래는,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 에서 나왔는데,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며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저 모으는 것은 아니라네. 저암(著菴) 유한준(兪漢雋)선생이 석농화원(石農畵苑)이란 화첩에 발원문에 쓴 글인데 이 글에서 유래되었다. 석농화원(石農畵苑)은 조선 후기 의관이자 수집가인 김광국이 일생 동안 모은 그림을 정리하여 만든 대규모 화첩이다. 현재 『석농화원』은 모두 낙질되어 원형을 알 수 없지만 본래 약 9권(원첩 4권, 기타 5권)에 해당하는 방대한 첩으로 만들어졌다. ..

문학의뜰 2022.01.13

마음안에 지혜로운 길

Wing Poetry - Eric Harry 세상이 아파 우는데 그 많던 시인은 모두 어디로 갔나  마음 안에 지혜로운 길  길을 가는 데 가장 불편한 장애물은자기 자신이라는 장애물이다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길을 가면서 자기의 욕망을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평탄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전자는 갈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고후자는 갈수록 마음이 옹졸해진다지혜로운 자는 마음안에 있고어리석은 자의 길은 마음 밖에있다 아무리 길이 많아도 종착지는 하나다 ....   『쓰러질때마다 일어서...』                                                                                                 ..

문학의뜰 2015.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