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강릉 능경봉-제왕산(2019.01.06)

털보나그네 2019. 1. 7. 13:17

Thoughts Of The Past - Shardad Rohani

 

 

 

강릉 능경봉(1123.2m)-제왕산(841m)

 

 

코스:고속도로준공기념비-능경봉입구-능경봉-능경봉입구-제왕산-31번갈림길-옛길주막터-옛길맛나가든-대관령옛길-대관령박물관주차장.(약10km)

 

 

2019년01월06일 일요일.

거산회장님 산돌님으로부터 답사가자는 제의가 있어 혼쾌히 승락을 하고 아침 07시로 약속을 잡았다.

6시30분에 대야역에 와 있다고 전화가 왔다.

서둘러 나갔더니 약속시간이 긴가민가해서 미리나왔단다.

외곽을 타고가다가 성남으로빠져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갔다.

휴게소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대관령휴게소에 도착하니 09시.

산돌회장은 나를 이곳에 내려주고 기념비앞에서 사진한장 찍고 도착지인 대관령박물관으로 갔다.

초행이라 이것저것  놓치지않으려고 두리번거리며 간다.

인풍비가 눈에 들어온다,그리고 능경봉과 제왕산 갈림길이 나오고 나는 능경봉으로 향한다.

정상까지 1.1km.바람도 없는 가운데 아침햇살만이 나무사이로 머리를 내리빚쳐준다.

얼마가지않아 등에서 땀이 난다.

사람도 한사람보이지않은 등로를 혼자 헉헉거리며 올랐다.

정상에서 보이는 작은 봉우리하나가 아마도 제왕산인듯 싶다.

바람도 없는 대기는 가스가 차 있어 선명하지않다.

멀리 동해바다는 희미하게 보일듯 말듯 강릉시내만이 그나마 잘 보인다.

다시 하산하여 넓은 임도길를 따라 진행하는데 한무리의 산객들이 앞서거니하며 지나간다.

이후 또다른 무리들의 산객들를 마주치고 엉켜서 가곤 했다.

능경봉 올라가듯 아무도 없이 혼자걷는 산길이 더 좋은데...

제왕산솟대바위부근에 도착할쯤 회장으로부터 위치를 알아보는 전화가왔다.

예상외로 아직도 많이 올라오지 않았다.

정상에는 산객들이 한무리가 점령하고 있다.

정상석인증만 하고 빠져나왔다.

또 정상석이 있다.처음것은 옛날것이고 나중에 만난 정상석은 새로 만들어 새운 것인 것 같다.

하산을 하는데 또다시 회장에게 전화가 왔고 얼마를 내려가다가 마주첬다.

합류하여 하산을 하는데 갈림길이 만다고 하여 자세히보니 오봉산방향에서 올라온듯하다.

안내이정표를 살펴보고 원래 내가 계획했던 하산로를 찾아내어 그곳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하산길에는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제왕폭포를 만나고...

대관령옛길로 접어들면서는 경치가 절경을 이루웠다.

그래 이토록 아름다운 산길이 이곳에 또 있었구나 감타을 하며 하산을 진행한다.

 

주차장에도착하여 회장이 알아본 식당을 찾기위해 성산리로 내려갔다.

작은 마을이 먹자촌이 작게 형성되어 있었다.

꿩만두국과 넓은 주차장이 맘에 들어 들어갔다.

이곳에서 회장은 꿩만두국,나는소머리국밥을 시켜먹었다.

꿩만두국이 맛이 좋았고,옥수수막걸리가 좋았는데 집에서 직접 담근 막걸리라고 한다.

이정도면 합격이다.

주인장에게 2월중 식사를 가예약을 해놓고 나왔다.

 

멕시칸님으로부터 여러차래 전화통화를 하며 집을 향해 가다가 안양에서 만났다.

막창안주로 술한잔를 나누워 먹고 귀가.

집에선 또 술를 먹고 왔다고 한바탕 난리를 부린다.

어머니에게 안부전화를 하고있는데 전화기를 뺏어들고 술를 하루도 안빠지고 마신다고 고한다...

 

 

 

 

대관령 고갯길은 옛날에는 오솔길이었으나, 이 고갯길을 조선조 중종때 이 지방 사람인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혀 놓았다.
그 후 수십 년이 흐른 후, 병자호란때 청나라 군대가 확장해 놓은 길로 쉽게 한양까지 침범하게 되자 인조 왕은 크게 노하여 고형산의 묘를 파헤치게 하였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제왕산은 성산면 어흘리와 왕산면 왕산리 사이에 있는 높이 841m의 산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왕산은 왕과 관련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고려 말 우왕(禑王)이 이곳에 쫓겨와 성을 쌓고 피난한 곳이라 하며, 지금도 성이나 축대를 쌓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돌과 기왓장이 발견된다.

 

 

 

 

 

제왕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관령 정상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대관령 하행 휴게소(남쪽 휴게소) 뒤편으로 영동고속도로 준공기념비가 보이는데 이 비()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면 길옆에 “인풍비”라는 표석이 있는 약수터를 만나게 된다.
50m
쯤 지나 오른쪽 오솔길로 가면 능경봉으로 가고 조금더 가다 왼쪽으로 가면 제왕산으로 간다.

 

 

 

 

 

풍수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의 산불초소 옆에 "인풍비"라는 한자가 새겨진 검은돌의 비석을 만났다.

제왕산 초입의 인풍비와 샘물은 강릉시민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샘물이라고 한다.

예부터 제왕산과 인접한 능경봉의 계곡물이 영동으로 흘러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어, 거북이 모양의 돌과 함께 비석을 세우고 샘물을 만들어 물길을 동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또하나의 설은 조선후기 이병화라는 관리가 대관령을 지나는 나그네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반젱이 마을에 여관을 열었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운 것이라 하는데 전자가 더 신뢰가는 이야인듯 싶다.

 

 

 

 

 

 

 

 

 

 

능경봉[ 陵京峰 ]: 능경봉은 대관령에서 고루포기산,닭목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길이다.위치는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대관령남쪽 산맥 중 제일 높은 봉우리라 하여 이름 붙여졌으며 제왕산의 모산이다.

『관동읍지』와 『증수임영지』에서는 "소우음산은 위에 영험한 샘이 나는 곳이 있으며 가뭄이 들어 비가 오기를 빌면 신통하게도 비가 온다고 하여 능정산(凌頂山)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관동읍지』, 『증수임영지』에는 산 이름이 소우음산(所토音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대지도나 산꼭대기의 표석에는 능경봉(凌京峰)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루포기산으로 가는 길인데 얼마전 해든산악회에서 갔던 코스다,아직도 안내표시기가 길안내를 하고 있다.

 

 

 

강릉시의 유래.

“강릉은 바다에 사는 용이 산으로 올라오는 모양을 띠고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강릉시는 옛부터 예맥족이 살던 곳으로 기원전 129년에는 위만조선에 영속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128년에 예맥의 군장인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벌하고 한나라에 귀속, 창해군의 일부가 되었다가 고구려 미천왕 14년(313년)에는 고구려 세력에 합치게 되어 하서랑 또는 하슬라라고 불리었다.

그후 신라 진흥왕 11년(550년)에 신라의 영역으로 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년)에 명주라 하였고, 고려 충열왕 34년(1308년)에 강릉부로 개칭 되었다. 공양왕 때에는 강릉대도호부가 있어 북쪽으로 원산에서 남쪽으로는 울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관할하였다. 조선시대로 들어 태조 4년(1395년)에 강원도로 개칭하였고, 고종 33년(1896년)에 강릉군으로 되어 21개면을 관할하였다.

일제 시대인 1931년에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 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55년에 강릉읍, 성덕면, 경포면을 합하여 강릉시로 승격과 동시에 강릉군을 명주군으로 개칭 분리 하였다가, 1995년 1월 1일 강릉시, 명주군을 통합하여 통합강릉시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임도길좌측으로 이정표와함께 샛길이 있는데 중간쯤에 전망대가 있어 경치를 전망할 수 있고,다시 임도길과 합처진다.

 

 

 

 

 

 

 

 

 

 

임도길과 샛길이 만나는 곳이다.

 

 

 

 

 

 

제왕솟대바위

 

 

 

국운이 소진된 고려말기 27대 축숙왕이 죽고 그의 장남인 천하의 폐룬아 충혜왕이28대 고려왕으로 등극 하지만 포악한 정치와 향락과 여색에 젖은 행동 예를들면...부왕의 후비인 수빈 권씨를강간하고. 역시 또다른 부왕의후비인 숙공 휘녕공주를 강간 하는등 인륜을 저버린 폭정을 일삼다.

원나라로 압송과 사면을 되풀이하다 중국의게양으로 귀양가던중 사망한다. 

뒤를이어12세의 충혜왕이 장남 충목이29대 왕에오르지만 재위4년여만에 병사하고 뒤이어 이복동생 충정왕이12살의 나이로 원 나라의승인하에 30대 고려왕에 오르지만 나라가 왜구의 만행과 왕 측근들의 무능한  정치로 위기에처하자 이에 원나라는 고려의 안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축숙왕의 차남인 강릉대군을 제31대 왕으로 세우는데 바로 이분이 공민왕이다

이후 공민왕은 충정왕을 귀양보내고 얼마후에 자객을 보내어 살해한다

공민왕의 왕비는 노국공주인데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사람이 바로 곡부공씨의 조선국 시조 공소 님이시다.

공민왕이 처음에는 원나라 부터 독립하여 자주정치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왕비인 노국공주가 애기를 낳다가 사망하자 이에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그 역시 폐륜적인 행위를 벌이다가 최측근들에 의하여 살해되고만다

그후 비록 정비의 자식은 아니지만 처첩(반야)의 자식 우 가 왕위를 이으니 그가 바로 32대왕 우왕이다

명장 최영장군의 사위이기도 한 우왕은 요동정벌등 과감한 정책을 펼쳤지만 이후 이성계 조민수등 위화도 회군세력에 의해 퇴위되고 아들 창이 그뒤를 이어 집권하나 그마저 곧 퇴위시켜 귀양보내지고 이후에 이성계에 의하여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즉위하나 위화도회군파는 공양왕 마저 몰아내고 이후 이성계가 이씨조선을 개국한다.

 

이후 이성계는 정사에는 없지만 우왕 창왕 그리고 공양왕과 새자등을 차례 차례 암살하여 모든 후환을 없애 버린뒤 조선건국의 틀을마련한다. 그런데 역사에 등장하는32대 왕인 우왕 이성계의 칼날을 피하여잠시 이곳 제왕산에 숨어 들었는데 이후 제왕이 머문곳 이라하여 제왕산이라 불려지고 있습니다

유배길에 오른 우왕은 원주와 고성, 강릉에 머물다 지금의 삼척 살해재에서 살해됐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좌즉 작은 길로 하산해야한다.

 

 

 

 

 

 

 

하산로에는 오래된 금강송숲이 계속 이어진다.

 

 

 

 

 

제왕폭포.

 

 

서어나무

 

 

제왕교.

 

주막터 삼거리.

 

대관령예길,반정에서 이어진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