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인왕산-북악산(2019.01.12)

털보나그네 2019. 1. 13. 12:37

Love Is A Mystery - Ludovico Einaudi
 

 

 

 

인왕산-북악산

 

 

 

 

 

코스:독립문역-인왕사-인왕산-창의문-북악산-숙정문-말바위탐방센터-삼청공원-경복궁역

2019년01월12일 토요일.

거산산악회 번개를 첫더니 산돌회장님,멕시칸총무님부부 3명이 응답이 왔는데 민들레님은 개인사정이 있어 불참하여 2명이 동참.

나를 포함하여 3명이 번개산행을 했다.

약속장소를 변경하여 독립문역에서 9시에 모이기로 했다.

산돌회장님과 멕시칸총무님이 시간에 맞추워 독립문역1번 출구로 왔다.

우리일행 3명은 인왕사를 일주문을 통과하여 여러 암자가 동네를 이루고 있는 골목길를 통과하면서 세월의 흔적들를 관찰해본다.

두분은 신기한듯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며 하나라도 놓치지않으려고 유심히 본다.

선바위를 통과하여 부처바위위로 올라가서 따뜻한 차한잔씩 나누워 먹고 뿌연 남산과 서울의 모습을 보았다.

날씨가 맑았더라면 참 좋았을텐대...아쉽다.

 

인왕산 정상을 오르고 넘어가서 성곽길를 걷는다.

윤동주문학관가기전 정자에 앉아서 간단히 한잔을 했는데,멕시칸님은 오디주를 가져오셨고 산돌님은 송담주를 가져오셨다.

멕시칸님이 안주로 닭똥집요리를 싸가지고 오셨다.

간단히 한잔씩 주고받고 다시 출발.

창의문을 지나 표찰를 받아서 북악산을 오른다.

펼처진 맞은편 북한산과 산아래 평창동 풍경을 감상한다.

산돌회장님은 비봉능선길를 못가봤다고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한다.

 

정상에 올라 산진을 찍고 반대방향으로 하산

중간에 망루에서 싸가져온 음식들를 모두 꺼내 먹었다.

산돌님이 가져온 밥과 멕시칸님이 가져온 닭똥집요리를 흔돌어 썩어서 김에 싸먹었더니 일품이였다.

숙정문을 통과하고 막바위탐방센터에서 표찰를 반납.

삼청공원으로 하산.

삼청동거리에는 여전히 젊은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닌다.

삼청동수제비집은 줄를 서서 순서를 기다린다.

이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막걸리한잔하려고 했는데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경복궁옆 풍물시장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 도착하여 마땅한 메뉴를 찾다가 한곳에 들어갔는데 멸치회가 금방들어와서 싱싱하다하여 멸치회무침에 소주 각일병씩을 먹었다.

전철를 타고 신천동으로 가서 산돌회장님이 안내하는 칼국수집으로 갔다.

이곳에서 술를 많이먹어 집엘 어떻게 왔는지 모르게 왔다.

이제 술를 적게먹는 방법을 연구해얄것 같다.

 

 

 

 

국사당

인왕사
현재 5개 종단의 11개 사암이 ‘인왕사’라는 한 명칭의 사찰 아래서 공존하고 있다. 각 암자마다 종단이 다르고 주지가 따로 있지만, 4년에 한 번씩 대표역할을 하는 총주지를 선출하여 절을 운영하고 있다. 인왕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본원정사(本願精舍)는 대웅전과 요사, 유물관인 심우장(尋牛莊) 등의 건물과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주요 법회와 각종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1973년 1월 26일 서울특별시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2개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고 전한다. 암석숭배의 일종으로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여겨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이곳으로 옮기게 한 뒤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샤머니즘)신앙과 더욱 밀착되었다. 조선 태조가 성을 쌓을 때 문신 정도전()과 무학이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할 것인지 성 밖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의 성곽위의 담장을 여장이라고 한다.여장에서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3개 있는데 이를 1타라고 한다.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이라고 하여 성곽에 오르려고 근접하는 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도록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향해 있다.

좌우의 구멍은 원총안이라고 하여 멀리서 다가오는 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도록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축조해 놓았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고안한 우리 선조들의 과학기술과 지혜를 였볼 수 있다.

 

 

 

 

 

인왕산(338.2m)
삿갓모양의 삿갓바위가 인왕산 정상이다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문학관은 과거 이용되던 상수도시설을 활용해 만들었는데,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18위에 오를 정도로 잘 지은 건물

 

 

 

창의문(자하문)
북소문인 창의문은 자하문이란 애칭으로 널리 불리었다. 숙정문이 항상 폐쇄된 채 제 구실을 못하였기에 이 문이 그 문의 역할까지 도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창의문을 늘상 북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도성의 북쪽 교외로 빠지거나 가까이는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가자면 이 문이 관문이기에 이용도가 적지 않았다. 이 문 근처에는 자하가 많이 끼였는가 서울 내기들은 세검정 일대를 두고 <자문밖>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창의문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자하문은 4소문 중에서 그 원형을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문이다. 등치로는 건축면적 49.587m²(15평) 안팎의 조그마하지만 매우 단단하고 굳건한 기풍을 풍기는 건축물이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목계를 달아 놓은 것이다. 동소문 문루에 봉황새를 그려놓은 것이 여타 문과 다른 특색이듯이 창의문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 놓은 것 역시 다른 문과 유를 달리하는 모습이다. 그 까닭은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유사한 상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매달아 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15년 (1623) 이귀 등 서인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 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은 반정계획을 진행하던 중 계획이 일부 누설되었으나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 장단의 이서군과 이천의 이중로군은 홍제원에서 김유군과 합류하였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여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이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놓게 하였다.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숙정문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옮기라고 명령한 기록이 보이는데,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장희빈의 음지와 숙정문 음기의 대결
음양오행으로 따져 동쪽은 봄을 상징하고 목(木)에 해당하여 인(仁)으로 생각하였다. 때문에 동대문을 흥인문(興仁門)이라 하였으며 지(之)자를 끼워 넣은 이유는 동대문이 위치한 지역이 지세가 얕아서 보완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한다.
이 부분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당대의 석학이자 엘리트 정도전이 새로운 왕성을 설계하면서 왜 음양오행에 따라 북대문에 지(智)자를 삽입하지 않고 숙청문이라 지었느냐 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름으로 지자를 따와 소지문(炤智門)으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지만 최종 낙점은 숙청문(肅淸門)으로 정해졌다.

북(北)은 음양오행에 따라 겨울과 물을 의미하고 있으며 음기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로 설명하면 숙청의 청(淸)자에 삼수변이 들어가니까 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지(智)자를 쓰지 않고 청(淸)자를 쓴 것은 법궁(경복궁)에 외척이 발호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비책이었을까? 여란(女亂)을 방지하기 위한 비방이었을까? 조선 왕국의 패망시기를 예견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종묘 정문 창엽문(蒼葉門)과 함께 정도전이 아니면 풀 수 없는 영원한 미스터리이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한양성곽을 연결하여 도성 2차 방어선인 탄금대성을 쌓은 숙종이 그의 재위 41년(1715년)에 한북문을 세우고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내린 것으로 봐서 한양도성 정북에 북(北)을 의미하는 지(智)자가 빠진 것을 아쉬워했나보다. 하지만 도성 북쪽에 지(智)자가 새겨진 편액이 걸린 이후 장희빈을 비롯한 궁중여인들이 발호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나 왕위에 올랐지만 오늘날 독살설이 대두되고 있는 경종의 의문사.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지만 그의 아들 효장세자의 의문의 죽음과 아버지에 의하여 어이없게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의 죽음. 이 모든 것이 궁중 여인들의 질투와 시기가 뒤엉킨 피비린내 나는 암투였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숙종시절 이러한 얘기도 전해져 온다. 구중궁궐 깊은 곳. 창덕궁 후원 아주 깊은 곳에 천하에 음기가 센 곳이 있다. 오뉴월 삼복더위에도 냉기가 흐르며 해가 밝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곳이다. 이곳을 독차지한 여인이 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궁중 여인들은 음기 센 이곳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살벌한 싸움에서 승리한 장희빈은 이곳을 독차지할 수 있었고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이 싸움에서 밀려난 숙빈과 후궁들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주변의 이목을 피해 몸종 하나만 데리고 숙정문 나들이에 나섰다. 숙정문의 음기를 받기 위함이다. 인왕산과 북악산에 호랑이가 있던 시절에 여인네가 밤길에 나선다는 것은 생명을 무릅쓴 모험이었다.

숙정문의 음기를 받아서 일까? 장희빈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하던 최숙빈이 숙종으로부터 성은을 입어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훗날 조선 21대 임금 영조대왕으로 등극한 연잉군이다.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니 숙정문의 음기는 입소문을 타고 서울 장안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등극시켰지만 그의 아들 순조의 혼처에서 안동김씨를 배제하지 못한 우를 범해 조선 왕국의 몰락을 재촉했던 여풍(女風). 이 모든 것이 지(智)자와 무슨 함수관계가 있을까? 역시 북대문에서 지(智)자를 배제한 정도전만이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삼청공원
노송을 비롯한 울창한 수림과 청계천의 상류인 삼청천의 계곡이 공원의 주된 경관을 이룬다. 골짜기의 물이 모여드는 삼청동 남동쪽의 영수곡(靈水谷)에는 병풍 같이 늘어선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인조(仁祖) 때의 서예가 김경문(金敬文)의 휘호라고 전해지는 ‘三淸洞門’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또 공원 안 일청교(一淸橋) 옆의 산책로변에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를 새긴 시조비(時調碑)가 있다. 공원에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성북동(城北洞) 쪽으로 쉽게 통할 수 있으나, 현재는 삼청동과 성북동을 잇는 삼청터널이 공원 옆으로 뚫려 있다. 이 공원의 이름은 도교(道敎)의 ‘삼청(三淸:신선이 사는 세 궁전인 太淸 ·上淸 ·玉淸)’에서 유래한다.

 

 

 

 

 

동십자각과 트윈트리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