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남한산성의 가을풍경(2017.11.12)

털보나그네 2017. 11. 12. 22:21

 When The Soft Wind Blows - Chamras Saewataporn


 

 

 

 

 

 

 

 

 

 

남한산성의 가을풍경

 

 

 

2017년11월12일 일요일.

어제 조카의 아들이 결혼을 하여 충주에 다녀왔다.

귀경길에 차가 막혀 저녘 늦게서야 집에 도착하였다.

어찌될지 몰라 산행계획을 잡지 못했다.

갈곳이 넘 많아 어디를 가나 물색을 하다가 남한산성으로 정했다.

이 가을에 꼭 한번 가 보고싶었던 곳이다.

가본지 오래되어 어떻게 가야하나 난감해 하다가 일단 산성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천역은 예전에 간 기억이 있어 어렴푸시 기억이 나지만 산성역은 가보지 못한 코스다.

 

아침에 집에서 7시10분에 집을 나섰다.

일단 015번 마을버스를 타고 부천으로 나갔다.

*교통:부천→신도림→잠실→산성(1시간27분소요) 33개역경유 카드 1850
검색한대로 산성역까지 그대로 이동했다.

지하철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어디로 갈지 몰라서 등산복을 입은 사람에게 물었더니 친절히 안내해 준다.

편안한 등로길이다.

갈색 나뭇잎이 등로를 예쁘게 장식해 놓은 길를 사쁜히 걸어 오른다.

남문(지하문 至和門)에 도착, 1시간40분걸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왼쪽으로 가지만 난 오른쪽으로 돌기로 했다.

 

부분적으로 보수공사를 하는바람에 조금 불편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가 연출되어 기분도 좋고,늦가을의 정취를 만퀵할 수 있어 좋았다.

수어장터까지 갔다가 되돌아 서문으로 하산했다.

서문으로 내려가면 급경사로 빨리 하산하는 길이고,마천역이 나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교통:마천→신길→부천 소요시간 1시간27분 40개역 카드 1850


 

 

 산성역(8호선)

 

 

 

 

 

 

 

 

서양등골나물 (생태교란종)

 

 

 

 

 철쭉꽃이 피였다.

 

 

 

 

 

 

 

 누리장나무

 

 

 

 

 

 

 

 

 

 

 

 

 

남한산성은 병자호란(1636.12.15.~1637.1.30.)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여의치 않아 대타로 몸을 숨긴 곳이지만 탁트인 전망과 물이 풍부한 천혜의 요새다.
때문에 청태종이 12만 대군으로 수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고, 결국 강화도로 피난간 봉림대군(훗날 효종) 등 왕자와 왕실가족 등을 인질로 잡아 협박해 인조가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청나라 대군에 맞서 45일간을 버틴 난공불락의 군사적 요충지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가을의 한복판에 들어선 남한산성 8km의 성곽길을 걸으며 만추의 서정을 만끽하면서 381년전 겨울, 청나라 대군과 맞서 45일간을 버틴 자랑스런 항쟁의 역사를 떠올려 보자.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왕 때 도성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백제 주거지 2곳과 저장 구덩이 8곳 등이 확인되었을 뿐 성곽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3년(문무왕 1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혹은 日長城)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3,460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장성은 곧 남한산성이고, 당시 돌로 쌓은 최대 규모의 산성이었다.

2005년에 북문과 동장대 사이의 제4암문과 수구(水口)터 주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행궁터 발굴 조사에서는 대규모 건물터가 확인되어, 주장성 당시 성 안에 무기고(武器庫)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하였음도 밝혀졌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하였다.

《남한지()》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가 총융사(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성가퀴는 1,700첩()이고, 4문()과 8암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다만 성의 둘레가 6,297보(), 성가퀴는 1,897보라고 하는 등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설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인조 때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간() 반, 하궐() 154간이었다. 재덕당()은 1688년(숙종 l4)에 세웠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전(殿)을 세웠다.

그리고 사직단()을 옮길 우실()도 세웠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팥배나무열매

 

 

 

관아로는 좌승당()·일장각(수어청()·제승헌() 등이, 군사기관으로는 비장청()·교련관청()·기패관청() 등을 비롯한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마랑()·뇌옥(),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묘(), 서낭당·여단() 등이 들어서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으로서의 불도()의 힘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도 승려 각성()이 도총섭()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옥정사() 외에 개원()·한흥()·국청()·장경()·천주()·동림()·동단()의 7사()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장경사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영()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라고도 함) 하나만이 남아 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 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틔어 있다.

성문은 홍예문() 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 문루()를 위엄있게 올려 세웠다.

수어사(使) 이시백()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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