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ndalf / Between Earth And Sky
A Seagull's Tale
인왕산
2014년10월09일.
오늘 저녘에 식사약속이 있으니 멀리가지 말라는 와이프의 당부가 있어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바람막이 옷이 없어서 옷도 사야하기에 짧게 다녀오려고 인왕산을 택했다.
오늘은 관광모드로 간편복에 베낭도 작은것으로 메고 나섰다.
독립문역에서 내려 독립공원을 한바퀴 돌아보고 인왕사방향으로 발길를 돌린다.
선바위를 지나 전망좋은 바위에 올라 매연으로 뿌연 서울의 아침풍경을 감상한다.
남산타워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뿌연 연무에 가려 건물이 희미하게 보인다.
곳곳에 기도의 흔적들이 남아 있고,
그 흔적속에는 무언지 모를 절박한 속사정이 있는듯 하다.
그들에게 어떤 절박한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그들처럼 그토록 절박하지 않은 현실들이, 고맙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그곳을 벗어 난다.
선바위에서 성곽으로 통하는 길은 아무리 찾아 보아도 없다.
할수없이 월담을 해야했다.
앞서간 가족으로 보이는 세사람도 담을 넘어 갔다.
정상을 지나 창의문으로 하산하는 길은 막아 놓았다.
할수없이 기차바위를 지나 부암동방향으로 하산했다.
한적한 길,오르는 사람도 내려가는 사람도 없는 길...
마주보이는 북한산의 풍광이 멋지다.
거의 다 하산할 무렵 한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오며 길를 묻는다.
범바위가 목적지인듯, 알고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알려 주었다.
장애인과 봉사자 그리고 천주교 수녀님도 계신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는 사람과 그를 인솔하고 안내하는 젊은 아줌마...
그들을 뒤로하고 가는 발길이 안타갑다...
골목길 양옆으로는 고급주택들이, 다양한 모습의 주택형식으로 서 있다.
골목길를 나오니 부암동길이 나오고 버스정류장이 바로 나온다.
버스를 타고 경복궁역앞에서 하차,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서대문 형무소
송재 서 재필의 생애.
본관은 대구(大邱)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영어명은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다. 아버지는 서광언(徐光彦)이며, 외가는 성주이씨로 17세기 초 이조참판 이성(李珹)이 보성에 내려와 터를 잡았다. 1864년(고종 1) 1월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서 출생했으며 보성은 그의 외갓댁이 있는 곳이었다. 5세 경 본가가 있는 충청남도 논산 은진면(恩津面)에서 성장하다가, 둘째 아들로서 7촌 당숙 서광하(徐光夏)의 집으로 양자 입적되었다. 그러나 서재필의 총명함이 나타나자, 안동김씨 세도가 출신인 양어머니의 주선으로 7세 경에 서울로 올라와 양어머니의 동생인 외숙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성장하며 과거를 준비하였다. 1882년 3월 19세 때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하였고,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명문가에서 성장하여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지도층 자제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였고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8개월간 현대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 5월 졸업하였다. 귀국 뒤 궁궐수비대에 배치되었고 고종을 알현하여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하였다. 그 결과 설립 승낙을 받았고 조련국(操練局) 사관장에 임명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에 가담하였고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며, 갑신정변 신정부조직에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나 정변의 실패로(3일천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망명객에게 일본이 냉담하게 대하자,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국내에서는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하였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되었으며, 아들(2세)은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 죽었다.
처음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 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를 하며 현지에 적응하였다. 그 후 독지가 홀렌백(John Wells Hollenbeck)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고등학교)(Harry Hillman Academy)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1889. 6). 다시 워싱턴시(Washington D.C.)로 이주하여 1889년 컬럼비아대학교(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Columbian Medical College)에 입학하여 낮에는 일하고 야간부에 다녔다. 가족도 모두 잃고 역적으로 몰려 귀국도 어려워진 상태에서 1890년 6월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893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이듬해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G.B. Armstrong)의 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모교에서 강사를 하다가 유색인 차별의 분위기 때문에 사직하고 병원을 개원하였다. 1898년 하반기에는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개혁이 단행되었고 갑신정변 주도자에 대한 역적 누명도 벗겨졌다. 관직에 진출한 박영효(朴泳孝)가 1895년 미국에 들러 권유하여 그해 12월에 귀국하였으며, 이듬해 1월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귀국한 뒤에는 미국 시민으로 행동하며 이름도 미국명인 '필립 제이손'이나 한국명으로 표기한 '피재손'을 사용하였다.
1896년 4월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한편 배재학당에서 목요강좌를 진행하여 계몽활동도 병행하였다. 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였고(1896. 7), 이를 중심으로 만민공동회도 개최되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정신을 혁파하기 위해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관으로 바꾸고,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이러한 활동에는 서재필은 외국인 신분이었으므로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러시아 일본측의 추방운동 영향으로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1898. 5).
필라델피아에서 인쇄·문구사업(Philip Jaisohn & Company)을 하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isure》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에 친화적인 성향의 미국인을 규합하는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승만·정한경과 함께 '제1차 한인연합회'를 개최하였고, 한국통신부를 설립하여 Korea Review를 발간하였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명서를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였다. 한국통신부 활동을 종료하고 국내 신문 및 잡지에 기고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펜신베이니아 의과대학원에서 의학공부를 1년 더 한 후, 여러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였고, 1936년에는 개인 의원을 개업하였다. 1942년부터 1945년 4월까지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여 미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광복을 맞은 후, 1947년 미군정장관 죤 하지(John R. Hodge)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아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1948. 9) 여생을 마쳤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94년 4월 8일 미국에서 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유해와 함께 옮겨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08년 5월 6일 미국 워싱턴시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워싱턴시에서 이날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하였다. 같은 해 7월 8일에는 그가 태어난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서재필기념공원'을 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재필 [徐載弼] (두산백과)
빈병
그 무엇이라도
절실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단 한 번만이라도
모든 것 다 바쳐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비 그친 뒤 쏟아내는
나무 향기에 숨막혀 질식해
죽을 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꽃 보기 위해 왔다 가는
가을 햇볕처럼 파리하고
텅 비어 있는 세월
시드는 것들이 싫어
화병에 아무 것도 꽂지 않는다.
-김 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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