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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에서 천마산(한남정맥길)
201년12월18일(12시~16시약 4시간).
아침에 뒤척이며 이불속에서 빠져나오지못하고 있다가 아침을 먹고도 또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드는 게으름을 피웠다.
이러다가 이렇게 하루를 다 보내겠다는 생각에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11시가 지나서야 집을 나섰다.
오늘은 계양산엘 가려고 부천으로 나와 전철를 타고 인천지하철 계산역5번출구로 나온다.
등로입구에는 연무정이 있다.
예전에 회사직원들과 왔을때는 어수선했던 등로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고 지금도 계속 공사중에 있다.
생각보다 날씨가 포근하다.중턱에서 겉옷을 벗어 가방에 넣고 계속이어지는 계단길를 올랐다.
길 옆으로는 공동묘지가 즐비하게 있고 영혼의 집 이장이 한참 진행중에 있다.
정상까지 나무테크와 등로난간공사가 진행중에있다.
정상에 도착하니 북쪽으로 김포평야와 한강줄기가 보이고 검단신도시가 한참 공사중에 있다.
남쪽으로는 인천시가지가 펼처져있고 송도 자유무역지구와 인천앞바다가 햇살를 머금고 뿌연모습으로 있다.
계양산은 높이 394m로 강화도를 제외한 인천광역시에서 가장 높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산 또는 안남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한다.
나는 정상에서 빵 한조각을 먹고 천마산방향으로 방향을 잡았다.
계양산에서 바라보는 부평시내는 뿌연 연무로 맑지못한 대기를 보여주고있다.
-이 산은 부싯돌로도 유명하다. 오늘날과 같은 성냥이나 '라이터'가 없던 시대에는 쇠붙이로 부싯돌을 쳐서 불을 얻었는데 이 산에서 나는 부싯돌은 불이 잘 일어나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농한기에 안남산 돌을 떠다가 부싯돌을 만들어 팔러 다녔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군의 조총 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당한 우리 나라에서는 그후 화약과 화석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화약 연구에 힘서 온 진위사 '정우원'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부평 부싯돌을 사들여 부하 정효석과 포군 박무길로 하여금 조총의 발화를 부싯돌을 이용하여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자 부평 부싯돌은 더욱 유명해졌다고 전한다.
한남정맥개요:한남정맥은 백두산을 시조산으로 한 우리나라 1대1정산13정맥중의 하나다.한남정맥은 한강을 축으로 이어 강줄기의 남북을 따라가는 산줄기라 하여 한남정맥이라 불린다.한반도에 걸처있는 13정맥중에서 가장 낮은 산줄기를 형성하며 인천의 주요 녹지축인 s지형 녹지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속리산에서 백두대간으로 분기된 한남금북정맥이 안성 칠장산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나뉘어 김포 보구곶까지 178km에 걸처 한강유역과 경기 서해안지역을 나누고 있는 산줄기이다.
중구봉
효성산.
산 줄기만 따라 짐작으로 가다보니 몇번의 알바를 해야했고 이정표를 유심히 살펴봐야 했다.
마제석(馬蹄石)이라 불리는 말 발자국 모양을 가진 바위다.
이곳은 아기 장사의 탄생과 용마(龍馬), 천마(天馬)의 승천 전설이 있어 천마산이라는 지명이 나왔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몇몇 자료들에서 철마산이라 기입하고 있는데, 이는 천마산을 잘못 발음하면서 생겨난 지명을 그대로 적은 것이다.
관련해 천마산에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양어깨에 날개가 달린 천마(天馬)가 살았고, 산 아래 남쪽에 아기장수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천마가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가까이서 보인 적은 없지만, 이따금 말 울음소리가 들리고 동이 틀 새벽 하늘에 날개를 힘차게 저으며 날아가는 말을 멀리서 본 사람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옛부터 사람들은 구태여 천마를 찾아보려 하지 않았는데 산 구석구석을 헤매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근처에 영웅이 태어나고 그 말을 타고 출정할 것이라는 신령스런 전설 때문이었다.
그러다 조선중기, 산 남쪽 아랫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버섯이나 나물을 캐어 먹고사는 합천이씨가 몇 가구 살았는데, 이 집안에 사람들 칭찬이 자자한 젊은 부부가 살았는데 결혼 십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부지런하고 얌전한 아내가 말이 힘차게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태몽)을 꾸고 아기를 갖게 되었다. 열 달이 지난 뒤 부부는 등에 북두칠성이 있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총명하고 어깨가 넓은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열흘 만에 혼자 일어나 걷기를 했고 한 달 만에 뛰어다녔다.
백일이 되자 아이는 맷돌을 번쩍 들어올렸고, 몸도 민첩해 방바닥에서 벽을 타고 달려올라가 천장을 타고 뛰다가 반대편 벽을 타고 뛰어내리고, 초가지붕 위로 휙휙 날라 다녔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우리 마을에 아기장수가 태어났구나"하고 경탄했고, 이 소식은 관아까지 전해졌다.
'콩을 한 줌 뿌리면 그것이 병사가 되고 팥을 한 줌 뿌리면 그것이 모두 군마가 되어 막강한 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아기장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고을 사또는 마을을 찾았는데, '아기장수가 나오면 역적이 되어 나라를 망친다'는 속설까지 믿고 있던 어리석은 사또는 아기를 광에 가두게 한다.
사또가 돌아간 뒤 아기장수의 부모는 아기를 광에 가두고 눈물로 시간을 보내는데, 아기장수를 죽이기 위해 서울에서 관군이 내려와 아기와 일가를 모두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러자 아기장수의 아비는 "아기야, 나를 용서해라. 네가 관군에게 잡혀 죽고 일가가 몰살 당하느니 너의 목숨을 내가 끊는게 낫다"고 말하니, 아기는 "저를 묻을 때 콩 다섯 섬과 팥 다섯 섬을 가이 묻어 주세요"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결국 아비는 아기장수를 다듬잇돌로 눌러죽이고 땅에 묻으며 콩과 팥을 묻었다. 다음날 관군이 몰려와 아기장수의 무덤에 이르렀는데, 아기장수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고 아기와 함께 묻은 콩은 군사가 되고 팥은 군마가 되어 아기장수를 호위하려 일어나려 했다.
이에 놀라 관군 장수는 "어서 진압하라! 어서 저 역적들을 죽여라!"라고 소리쳤고, 아기장수는 눈물을 흘리며 "왜 나를 역적이라 하십니까? 머잖아 나라에 쳐들어 올 적군을 맞아 싸우다 죽게 해주십시오!"라며 하소연 했지만, 관군은 아기장수를 칼로 내리쳐 죽이고 만다.
그러자 천마산 골짜기에서 천마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흔들며 들려왔고, 천마가 힘차게 날개를 휘저으며 달려와 아기장수의 주검 위를 한나절 동안 선회하며 슬피 울다 땅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아기장수 무덤 옆에 천마를 묻어주었는데, 인천 서구 심곡동이 도시계획으로 지각 전체가 뒤바뀌기 전 마을에는 말 무덤이 있었다. 무덤처럼 불룩 솟은 둔덕을 마을 사람들은 천마의 무덤이라 여겨 왔었다.
아기장수와 천마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터졌고, 왜군에 의해 조선의 강토가 유린당하고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이 그들의 발굽에 짓밟혔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어리석은 관군 때문에 아기장수와 천마만 죽지 않았다면, 아마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남았을 것이라 탄식했다 한다.
원적산을 목적지로 정하였으나 천마산에서 하나아파트방향으로 가다 아닌것같아 다시 되돌아 올라 봉수파출소방향으로 가려다 보니 이곳도 아닌것 같아 다시 하나아파트로 내려와 좁은 길를 따라 계속 진행해 봤지만 길이 막혀버린다.
할 수없이 이곳에서 마을로 내려와 큰길로 나오니 부평가는 버스가 지나간다.그래서 이곳에서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사전정보도 없이 무작정 나선 길이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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