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백사실계곡(2011.08.20)

털보나그네 2011. 8. 20. 20:01

 

 

 

 




 


 

백사실계곡.

 

 

 

 

 

2011년8월20일.

홀로 떠나는 여행길.

시청역-경복궁-사직공원-인왕산-창의문-백사실계곡-세검정-홍지문-옥천암의 마애좌상-홍제역.

 

 

비교적 늦은 출발이다.

오늘은 백사실계곡을 다녀올 계획이다.

코스는 대략 머리속에 인왕산으로 갔다가 컨디션상태를 보고 북악산을 거치느냐 생략하느냐를 결정하기로 하고 백사실계곡를 보고 백불석까지 가는 것으로 정해 놓았다.

시청역에서 내려 광화문거리를 걸어서 경복궁까지 거리구경,사람구경하며 갔다.

경복궁안에선 마침 10시 정각에 수문장 교대식을 한다고 하여 사람들이 몰려있다.나도 처음보는 광경이다.

갑자기 비가 내렸다,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교대식이 진행됐고 나는 중간에 사직공원을 향해갔다,가는 중에 비는 그첬다.

 

 

 

 

 

 

 

 

 

 

 

 

 

 

 

 

사직공원근처에 있는 단군성전을 지나 인왕산길를 가다보면 나무사이로 황학정이란 활터가 보인다.중학생시절 자주 놀러갔던곳이라 그때의 추억들이 스처지나간다.

언덕길를 오르는데 어제한 운동의 후유증으로 무릅이 뻑뻑한 느낌이다.오늘도 길 게는 못갈것 같다.

인왕산정상까지 오르는데도 다리에 힘이 딸리는것 같다.아직도 독립문방향의 성곽은 공사중이라 통제중이다

정상에 도착하니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지만,시계는 좋지않아 눈앞의 안산도 희미하게 보인다.

다시 성곽길를 따라 창의문까지,내려가는 길은 기차바위방향과 성곽길방향으로 갈라지는데 성곽길로 내려갔다.

중간에 통제구간이 있어 돌아가는 구간이 있어 조금 불편했지만 창의문도착,그리고 백사실계곡을 이정표를 따라 간다.

가는 중 길가에는 멋진 집들이 많다.대부분이 카페나,음식점등 영업집인듯하고 주변환경에 맞게 잘 꾸며놓았다.

 

 

 

 

 

 

 

 

 

 

 

 

 

무릇

 

 

처음보는 식물이다.꽃을 피우려고 하는듯 한데 신기하게 생겼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창의문(彰義門)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여기 고개가 자하문고개로 불려졌다. 양주 등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지만 태종 때 풍수가들이 왕조에 좋지 않다 하여 100년 가까이 통행이 금지됐었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때는 반란군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다.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판이 걸려 있다고 한다. 1958년 보수했으며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지금은 북악산 성곽순례 안내소가 옆에 있다.

 ※오른쪽길를 따라간다.길바닥이나 중간중간 벽에는 ccc클럽으로 가는 길를 안내하는 문구가 붙어있다.

백사실 계곡도 같은 방향이라 보며가느라 지루함이 줄었다.

 

 

 

 ※왼쪽길를 따라간다.

 

 

백사실계곡에 들어서니 숲이 우거지고 계곡에선 맑은 물이 흘렀다.백사실 계곡을 소개하는 글이있어 올려본다.

 

최은남 기자 = 북한산과 인왕산, 북악산 자락에 포근히 자리한 서울 부암동은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로 조선시대부터 양반과 왕족들이 즐겨찾는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다. 도심을 비웃듯 녹지의 비율이 높으며 백사골(백사실)의 청정한 계곡물이 홍제천의 일부가 되어 부암동의 한복판을 지난다. 게다가 고층건물도 없어 산속에 둘러싸인 조그만 읍내를 연상시킨다. 2000년 이후 도심 속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부암동에는 북악산 백석동천을 비롯하여 석파정과 홍지문, 무계정사터, 세검정 등의 문화유적이 있으며, 환기미술관과 자하미술관의 미술공간을 비롯하여 산모퉁이카페와 자하손만두 등의 카페와 찻집, 맛집이 들어서 당일치기 도심 나들이 장소로 손색이 없다.

북한산과 북악산, 인왕산 사이에 가늘게 형성된 분지에 터를 닦은 부암동은 서울 도심인 종로구에 자리해 있다. 서울하면 회색빛 고층빌딩과 번잡함이 가득 연상되겠지만 부암동 만큼은 그 연상이 통하지 않는다. 불과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도심을 비웃듯 녹지의 비율이 높고 백사골(백사실) 등의 깨끗한 계곡이 흐르며 고층 빌딩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무성한 숲과 멋드러진 바위를 걸친 북악산과 인왕산을 볼 수 있다. 비록 1960년대 이후 개발의 물결이 밀려오긴 했으나 청와대를 품은 북악산때문에 그 물결마저 잠잠하여 아직까지 전원의 분위기를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부암동은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탓에 조선시대부터 도성 밖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다. 왕족과 사대부들이 별장과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긴 장소로는 백석동천과 석파정, 무계정사터, 탕춘대터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옛 한양도성이 북악산과 인왕산의 허리를 걸치고 있고 서울 유일의 당간지주인 장의사지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보도각백불(옥천암 마애불) 등의 고려시대 문화유적까지 품고 있다. 이렇게 많은 명소를 품고 있지만 부암동이 세상에 뜬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북한산과 북촌, 궁궐에 가려 빛을 못본 탓이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백석동천이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되고 인터넷 언론과 네티즌을 통해 백석동천을 비롯한 여러 명소들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또 커피프린스1호점을 위시한 여러 드라마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부암동의 인기는 나날이 상승하고 있다. 그 여세를 이용해 미술관 등의 전시공간과 카페, 찻집 등이 들어섰으며 자연과 문화, 역사까지 듬뿍 곁들인 도보 나들이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부암동에 자리한 옛 명소 중에서 북악산 서북쪽에 안긴 백석동천이 백미라 할만하다. 백석동천은 백사실(백사골) 계곡을 일컫는 말로 계곡 중간에 19세기에 조성된 별서유적이 남아있다.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의 ‘참봉집’에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동천과 모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18세기부터 조그만 별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백석동천에는 둥그런 연못터와 육각형 정자터, 사랑채터와 안채터 등이 남아있으며, 백석동천(白石洞天)과 월암(月巖)이란 바위글씨(바위에 새긴 글씨)가 있어 당시의 풍류를 아련히 전해준다. 2010년 여름부터 사랑채터와 안채터를 발굴조사하여 많은 유물이 나오고 있으며, 현재 발굴 뒷정리를 하고 있다. 이곳은 부암동 주민들만이 알고 있던 그들만의 피서지였으나 이제는 휴일과 여름이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백사실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도롱뇽, 개구리가 사는 청정한 곳이며, 계곡 하류 현통사 앞에는 하얀 반석을 타고 내려오는 조그만 폭포인 백사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이 폭포는 서울 도심의 유일한 자연 폭포이다. 백석동천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뒷골마을(능금마을)이란 마을이 나온다. 여기가 도심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완연한 산골마을로 도심 속의 두메산골로 통한다. 예로부터 능금나무 자생지로 이름이 높았다고 하며 현재 10여 가구가 산다.

백사골이 북한산 계곡과 만나 홍제천을 이루며 부암동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그 중간에 세검정이 있다. 연산군 시절 탕춘대의 부속 정자로 세워졌다고 하며, 광해군 때는 김류, 이귀 등이 물에 칼을 갈며 반란(인조반정)을 모의하던 곳이다. 칼을 씻었다는 뜻의 세검정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보수하면서 군사와 일꾼들의 휴식처로 사용되었으며, 1960년대까지 서울 시민들의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허나 개발의 물결에 밀려 홍제천이 오염되고 신작로가 들어서면서 그 운치는 사라진지 오래다.

세검정에서 홍은동으로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이 나온다. 숙종 때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만들면서 낸 관문으로 한북문이라 불리기도 한다. 문 곁에는 홍제천을 흘러보내는 오간대수문이 있으며, 지금의 문은 1977년에 복원했다. 여기서 서쪽으로 더 가면 옥천암이란 암자와 함께 고려 때 조성된 하얀 불상, 보도각백불이 나온다. 

 

 

 

 

월암이란 글씨는 어디에 있는지 보지못했다.

 

물봉선의 색이 지금까지 본것중 가장 진하고 선명하다.

 

 

 

 

 

 

 

 

 

 

 

 

 

 

사람사는 것이 먼저겠지만 자연 그대로 놔두었다면 멋진 계곡을 이루었을 것 같은데 사람의 집이 점령해버린 이곳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광경이다.태초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이길를 내려왔다.

이근처 어디쯤인지 예전에 능금나무과수원이 많이 있던곳이다.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시절 비포장도로 차가 지나가면 마른먼지를 뒤집어 써야했던 그시절에 어머니는 먼곳까지와 능금열매를 사다가 머리에 이고와 포방터시장어귀에서 노점상을 했었단다.참 어려웠던 시절 기억마져 흐릿한 이야기다.

 

이 부근은 국가에서 필요한 종이를 만드는, 즉 조지서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기도 하단다. 맑은 시냇물과 평평한 돌이 많고 인근 산에 한지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가 풍부하여 종이를 제조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고 한다.

 

'세검정' 정자는 인조반정을 기리기 위해 영조 때에 세운 정자라고 한다. 세검정 정자는 41년 이곳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타서 없어진 것을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와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 70년대에 복원을 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홍제천의 너럭바위와 곳곳의 표지석에는 이곳이 종이를 만들고 말리고 했던 곳이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소림사(少林寺)

소림사(少林寺)는 종로구 홍지동 80-1번지에 있는 비구니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다. 절터가 남북으로 인왕산과 삼각산으로 이어지는 축선상에 있어 예로부터 경승지로 알려져 있다. 또 이곳 종각에서 내려다보면 부근에 있는 세검정(洗劍亭)이 한눈에 들어온다.

절은 1396년(태조 5) 혜철(惠哲)선사가 태조의 도움으로 세웠으며 중국 숭산에 있는 소림사의 이름을 따서 절이름을 소림굴(少林窟)이라고 하였다.
그 뒤 1817년(순조 17)에 관해(觀海)스님이 중건하면서 절이름을 지금의 소림사로 바꾸었으며, 1913년에는 두삼(斗三)스님이 큰방을 지었다. 또 1933년에 칠성각이 1935년에는 대웅전이 그리고 1942년에는 큰방과 산신각이 각각 용호(聳湖)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근래에는 1979 ~ 1985년 사이 다시 대웅전 요사 삼성각 등의 중창불사가 있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맛배지붕을 하고 있고 그 옆의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불이 모셔져 있고 그 뒤로 후불탱화가 있다. 또 불상 왼편으로는 금니목각(金泥木刻) 신중탱이 있는데, 아래층은 절의 입구가 되고 그 위에 누각형식의 종각이 마련되었다. 요사에는 마하선원(摩하禪院) 이라는 현판이 있다.

 

잠시 물가로 내려가 자세히보니 송사리때가 무리를 지어 돌아다닌다.

어릴적 따로 놀이터가 없던 시절,삼각산,세검정 홍제천이 다 나의 놀이터였던 시절.

여름에는 물놀이하고 겨울에는 썰매를 탔던 곳이다.그때 그모습은 아니지만 아직도 많이 그 흔적들이 살아있다.

지금도 이곳은 진화중이다.조금 더 내려가다보니 중장비가 열심히 하천정비작업중이다.

주변에 바위들의 모습이 예전의 모습과 조금은 달라보여 자세히 보니 인조석들이다.어떻게 만들었는지 정말 감쪽같이 실물과 흡사하다.신기해서 손으로 만져보아도 영낙없는 바윗돌이다.

옥천암 보도각백불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갔더니 몇몇사람들이 조용히 기도중이라서 미안한 마음에 조용히 빠져나왔다.

 

홍제천은 정묘, 병자호란(인조)때 공녀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여자들이 돌아왔으나 어디에서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환향녀'라고 그들를 손가락질을 했다. 나라에서는 궁여지책으로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된다는 명을 내렸단다.

무엇이 더럽고 무엇이 깨끗하게 된다는 말인지... 보여주기 위한 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공녀들이 나라의 명을 받아 홍제천에서 몸을 씻지만, 결국은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이곳 주변에 눌러 앉아 살게 된 경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신대 문제도 그렇지만 역사는 약자인 여자들 편이 아니었다.

 

 

 

 

 

 

 

 

 

 

 

 

 

 

 

 

그림출처:
Burton Holmes, <<Burton Holmes Travelogues vol. 10>> (New York : The McClure company, 1908).

 

옥천암 마애좌상 [玉泉庵 磨崖坐像] 
1973년에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관음보살좌상()으로 석불의 높이는 5m 정도이다. 하얀 불상이 새겨져 있는 바위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보호각()인 보도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불상은 바위의 평평한 면에 새겨졌으며 호분()과 금분() 등을 칠하였고 머리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삼면관을 썼다. 얼굴은 둥글고 눈이 가늘며 입이 작아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나타낸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도 이 마애불에 기원을 했다고 한다. 또 조선 말기 고종의 어머니인 흥선대원군 부인 부대부인() 민씨()도 이 석불 앞에서 아들의 복을 빌었다고 전해온다. 부처에 흰칠을 했으므로 고종 때부터 백불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