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북악산연계산행.
일시:2009년7월25일10시~3시(5시간)
코스:독립문역-인왕사-인왕산정상-서울성곽길-창의문-북악산-숙정문-북악팔각정-부암동.
노는 토요일을 맞아 산에갈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금요일저녘부터 비가 온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도로가 젖어있고 하늘은 잔뜩 찌뿌려있다.
어영부영 하늘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보니 7시가 넘어간다.
아침을 먹고나니 하늘이 조금씩 열리는듯하여 등산준비를 하고 나온 시간 8시30분정도.
독립문역에 도착하니 10시가 조금 안됐다.
인왕사 이정표가 눈에 띄고 안산과 구름걷힌 하늘이 보인다.
비는 오지않겠다....
중학교를 대신중학교를 나와서 이곳은 중학3년동안 오가던 동네이고 지금은 모두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예전엔 이곳은 영세민이 모여살던 서울달동네.
최신환이란 친한 친구가 살아서 학교수업끝나면 매일같이 왔던곳...
그친구 지금은 무얼하며 살고있을까? 고교입학이후 소식을 모른다...
인왕사일주문앞에서 망서렸다.
인왕사안쪽길은 공사중이니 돌아가란 안내문이 서있다.
선바위도 보고 국사당도 구경할겸 안내표지판을 무시하고 인왕사안쪽길로 진입했다.
예상외로 마치 동네마을같이 집이 있고 대문마다 개별적으로 절이름이 붙어있다.
국사당 앞마당앞을 지나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길이 막혀있고 한 여인이 정좌를 하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다시오던길을 내려오다가 약수터에서 한 남자가 나보고 길을 안내해준다.공사를 하고 있으니 더이상 길이 없고 입구까지 되돌아가서 우회길로 가야한단다.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는 내려가다가 선바위을 보고가려고 선(禪)바위로 가니 전망이 트이고 남산밑의 서울풍경이 한눈에 다보인다.
그리고 잘하면 성곽으로 연결되는 샛길도 있을듯하다.
바위들의 형상이 기괴하게 생겼고 곳곳에는 치성을 드렸던 흔적들이 남아있다.
아마도 이곳은 불교뿐아니라 온갖 무속신앙들이 존재하는 곳인듯하다.
그렇지않아도 이곳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할때부터 많은 사연들을 남겼던 곳이다.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나고 간신히 찾은 가장낮은 성곽부분을 훌적 뛰여넘었다.
인왕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는 많은사람이 오르고 있었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트이고 서울과 북한산이 멋지게 펼처져있다.
비온뒤라서 공기도 맑고 멀리까지 깨끗하게 잘 보인다.
잠시 쉬고 다시 북악산을 향하여 길을 찾았다.
이곳을 지키고있는 병사에게 물었더니 창의문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야한단다.
성곽을 따라 내려갔다.
두갈래길이 나온다,오른쪽길로 가야한단다.
창의문(자하문)은 세검정에서 청운동으로이어지는 길을 건너야한다.
그리고 그곳엔 김신조남파사건시 전사하신 최규식경무관의 동상이 서있다.
유년시절 형따라서 집에서 이곳까지 조깅하던 기억이난다.
나는어려서부터 자하문을 더 많이 듣고 자랐기때문에 창의문보다 자하문이 더 친숙하게 머리에 남는다.
이곳에선 신분증을 보여주고 출입증을 받아 인식표를 목에 걸고 다녀야한다.(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나무데크로 만든 계단이 계속이어져있는 오름길이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서 북악산 정상까지 오른다.
북한산이 한눈에 보이고 탕춘대능선이 어릴적놀던 기억과함께 한눈에 보인다.
어릴적엔 그저 삼각산으로만 알았는데 족두리봉,향로봉,비봉...이런 이름을 알게된것은 다 성장해서이다.
팔각정이 멀리보이는데 바로 가는 길이없고 숙정문까지 갔다가 인식표를 반납하고 다시 옆길로 올라야 한단다.
꽃을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병사한명이 가까이 와서 사진촬영한것을 보여달라며 검사해본다.
군사시설을 촬영하면 안됀단다,순순히 다 보여주었다.
숙정문에서 인식표를 반납하고 나오니 삼청각이 보인다.
얼마전 드라마"식객"촬영지라고하고,예전 유신시절땐 요정정치의 상징이였던것이 요즘은 서울시에서 다시 리모델링하여 전통공연장,한식,찻집등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그 주변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사람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계단을 계속오르다보니 북악스카이웨이길이 나오고 팔각정이 나온다.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요기도 하고 경치도 구경하지만,마땅히 쉴곳은 없고 고급음식점에 드라이브족들의 산책모드라 땀냄새나는 등산객이 낄틈은 없어보인다.그래서 그늘진 벤치에 앉아 쉬였다.
이제 어디로 갈까?
정처없는 나그네길이다.
다시 부암동으로 방향을 잡았다.
북악스카이웨이길를 타고 가는 길이다.
나무그늘이 이여지는 산책로가 잘 조성되여 있다.
내려가다보니 외국인도 올라오고 가족단위로도 무리지여 올라온다.
이동네 사람들은 좋겠다...
어느덧 부암동,바로 창의문이 있는곳이다,시간이 15시를 가리킨다.
오래된 동네지만 잘 꾸며논 고급레스토랑과 미술관,악세사리가게등이 있어 젊은 남녀들이 많이 오간다.
그런데 다들 손에 혹은 목에는 디카를 소지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시시때때로 사진을 찍어댄다...
가게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먹고 버스를 타고 경복궁역까지 왔다.
선바위는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禪'자를 따서 이름하였다.
사람들은 석불님ㆍ관세음보살님, 또 이 두 개의 바위를 양주(兩主)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신을 원하는 부인들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정성을 드리는데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남아있다. 이를 붙임바위라고 한다.
선바위는 높이가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m 내외로 두 개의 큰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형상이다.
바위 아래에는 가로 약 10m, 높이 70∼80cm의 제단이 시멘트로 단장되어 있다.
이 바위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과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이 있다.
또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을 받고 천도할 곳을 찾다가 현재의 서울을 찾아냈으나 국운이 500년밖에 유지 못 할 것을 알게 되자 이 선바위에서 천일기도를 하였다고 하며 그 뒤부터 이 바위가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태조가 도성을 쌓을 때 왕사(王師)인 무학대사와 문신인 정도전(鄭道傳)이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하느냐 성밖으로 하느냐로 크게 의견이 대립되었다.
태조는 결정을 미루고 돌아와 잠을 자는데 꿈에 4월인데도 눈이 쌓이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낮에 회의하던 곳이 보이고 안쪽으로 들여쌓은 쪽의 눈이 녹아 버렸다.
태조는 이것이 하늘의 계시임을 알고 정도전의 주장대로 선바위를 성밖으로 두게하자 무학대사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양도성(서울성곽)을 설성(雪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祭日)은 개인별로 와서 치성을 드리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불교 신자들은 4월 초파일, 7월 칠석날 같은 경우는 많은 사람이 다녀간다고 하며, 영산제(靈山祭) 때에는 여러 스님과 신도들이 이곳에 와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제의(祭儀)는 개인치성을 드리고 사람들이 정화수ㆍ백설기ㆍ메ㆍ과실 등 저마다 간단한 제물을 준비해 와서 제단에 차려 놓고 절을 하며 기원한다.
절은 보통 3번하고 반절하며 방향을 돌려가며 절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이 할수록 좋다고 하며 108염주를 하나씩 돌려가며 절을 하기도 하고 3천번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인등(引燈)은 개인의 기복(祈福)을 위해 선바위 관리사무소에서 원하는 사람에게 액수에 따라 반년이나 일년씩 켜준다.
인등은 옛날 등잔불 모양이며 위의 심지 부분에 작은 전등이 달려 있다.
선바위는 암석숭배(岩石崇拜)의 일종으로 이것이 전설화되고 또 불교와 무속신앙(巫俗信仰)이 밀착되면서 무속신앙의 중요지가 되어 있다.
모녀바위,혹은 형제바위
서쪽의 인왕산(仁王山)은 동쪽의 낙산과 같이 좌우용호(左右龍虎)로 일컫는 산으로 백호(白虎)인 이 산 역시 화강암이 노출된 산이다.
조선 건국 당시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많아서 호환(虎患)이 자주 일어났다.
그 후 어느 임금이 산신에게 호랑이를 모두 압록강 저쪽으로 몰아내 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인왕산 호랑이가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 때 새끼를 가진 암호랑이가 먼길을 갈 수 없어 남겨 두었더니 그 호랑이가 낳은 새끼들이 번식하여 인왕산에는 여전히 호랑이가 들끓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동쪽 산허리에 북악에 연결되는 인왕스카이웨이가 지난다.
인왕산 동사면은 고급주택가로 변했고 1920년대에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이 인왕산 서쪽 중턱으로 옮겨와 현재에도 무당들이 굿을 하고 산신에게 제사하는 곳이 되고 있다.
인왕산 서쪽의 안산(鞍山, 209m)은 무악재를 건너 연결된다.
안산은 무악(毋岳)이라고도 하며 안산을 등지고 그 전면에 연희·신촌동 일대가 조선 건국 초 도읍지로 물망에 올랐던 곳이다.
북서쪽에는 백련사가 있는 백련산(白蓮山)이 있다.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최규식경무관동상.
조선왕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태조 4년(1395)부터 도성을 축조하였다.
도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 문과 그 사이에 4개의 작은문을 만들었는데, 성곽의 길이는 당시 영조척으로 59500척(약17km)이었다 한다.
창의문은 성곽의 서북에 위치하여 고양.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문으로, 일명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태종 16년(1416)에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폐문 되었다가 중종 원년(1506)에 다시 열었다 한다.
인조반정(1623)때는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안으로 들어갔으며 임진왜란(1592)때 불타 버렸던 문루는 영조 16년(1740)에 재건하고 1958년에 보수하였다.
자북정도라....??
셀카놀이...
북악산정상.
서울분지를 둘러싸는 내4산(內四山)은 북악산·남산·낙산·인왕산이다.
그 중 가장 높은 것은 북쪽의 북악산(北岳山)으로 북한산의 남쪽 지맥의 한 봉우리이다.
경복궁 북쪽에 솟아 있고 일명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성벽이 능선을 따라 보존되어 있고 4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일명 자하문(紫霞門)이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鞍部)에 있어 시내 중앙지와 쉽게 연결된다.
창의문에서 정릉의 아리랑고개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는 창의문, 팔각정, 풀장 등을 연결하는 관광도로로 울창한 숲과 서울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조망이 좋은 경승지이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남동쪽 산기슭의 삼청공원은 좋은 휴식공간을 제공한다.
1968년1월12일 김신조일당30여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기위해 넘어와 군경과 총격전이 벌어진가운데 수령200년먹은 소나무의 총탄자욱이 그당시의 급박했던 순간을 말해주고있다.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옮기라고 명령한 기록이 보이는데,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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