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위구르족의 분노.

털보나그네 2009. 5. 30. 21:37

 

위구르족의 분노.

 

 

2009.5.30.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중심도시 카슈가르는 위구르족의 심장부라고 할수 있다.

이슬람문화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중국 신장 위구르자치주의 카슈가르시는 그래서 지금도 이를 보기위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슬람공법에 따라 진흙벽돌로 지어진 주택과 건물들이 즐비한 이곳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고 그들의 오랜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위구르족들에게는 이곳이 자손에게 물려줄 유일한 유산이고 지금껏 살아온 그들삶의 전부가 되고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4조위안(5840달러)규모의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카슈가르의 위구르족 마을을 재건축키로 하고 모든 건물들을 철거하려해 그곳에서 살고있는위구르족들의 분노가 일고있다.

지진발생시 매우 큰 위험성을 내재해 있어서 철거하지 않을수 없다는 주장에 맞서 위구르족은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가 큰 문제다.

 

이지역은 1930년대초 동투르키스탄이라는 독립국가가 세워졌으며 지난해에는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독립을 요구하며 폭탄테러가 발생하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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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저 위구르족은 어떤 종족인가.

 

중앙 아시아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1700년경부터 생존을 위한 이동과 전쟁이 반복되는 유목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흔히 안드로노보(Andronovo) 문화권 종족으로 알려진 이 유목민들은  주로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을 배경으로 활동해 오면서 흉노제국과 동권제국시대까지 고유한 문화를 발전 시켜왔다.

이런 점에서 안드로노보 문화를 이끈 중심 종족의 일부가 투르크족의 직접 조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투르크 족의 기원을 성서적으로 해석한 이슬람 구전에 따르면, 그 조상을 구약 성서상의 노아의 다르인야벳과 연결시키고 있다. 위에 언급되는 위구르족은 현재 신장에 거주하고 있는 위구르족을 말한다

 

투르크족의 본류는 기원전 700년경까지 알타이 지역에 생활의 뿌리를 내렸던 반면, 다른 투르크 부류는 기원전 1100년경부터 대거 중국의 서북부에 있는 칸수나오르도스초원지대로 이동해갔다.

그 결과 이일대에는 남중국의 영향을 받은 통산농경문화가 싹텄다. 칸수와 오르도스에 거주하던 투르크족들이, 바로 후일 중국문헌에 등장하는 흉노족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었다.

 

한편, 서쪽으로 이동해 간 일부 투르크족은 기원전1300-110년경 투르키스탄지역을 거쳐 불가강과 흑해 북부평원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인도-유럽어계의 다양한 민족들과 혼합되어갔다. 이로써 기원전5-3세 3기경에는 동서투르크족들 사이에 뚜렷한 언어적, 문화적 차이가 나타났다.

 

결국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 동투르크족은 흉노로 통칭되는 아시아 훈제국에 포함되어 내륙아시아의 북서쪽에 자리잡았고, 서투르크족은 카스피해와 볼가강 유역을 거쳐 스키타이와 섞였다가 서시베리아로 이동해, 후일 유명한 ‘게르만민족대이동’ 이라는 역사적사건을 유발 시키게 되었다.

 

기원 후 투르크족의 민족이동은 좀더 분명한 형태를 띠고 진행되었다. 결국 이 위구르족은 중국내의 일부시민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이들은 소수민족을 배척하는 한족에 대항하여 이슬람을 그들의 종교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핏줄을 가진 현재 이슬람민족들과 연결되어 이슬람을 민족종교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때문에 중국내의 시민으로보다는 돌궐의 후예로 보아야 한다.

 

북위시대(384~534) 고차(高車),  수나라(581~618) 때는 위홀, 당나라때는 회홀, 회골, 송․원시대에는 외오아라 불렀다. 당나라때에 회홀에서 회골로 명칭이 바뀐 것은 위구르 칸이 788년 당덕종에게 간청한 결과인데, 회골은 빠르기가 매우 같다는뜻을 가진다 하였다. 또 위구르의 언어학적 의미는 ‘연맹, 군집’ 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몽고족과 청조(만주족)의 지배를 받으며 지내오다 1911년 청조의 붕괴 이후에는 봉건 장군인 군벌의 손에 넘어갔고 국민당을 거쳐 1949년 공산당의 지배를 받게 되기까지 중국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독립국가를 이루려고 여러 차례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55년 중국 공산당은 이지역에 신강 위구르자치구를 설치함으로서 위구르족은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다른 종족과는 달리 언어도 위구르어를 사용한다.

 

-중국의 속내.

 

중국 정부가 위구르족의 분리독립운동에 강경 대응하고 있는 이유는 신장위구르자치구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석유와 천연가스 등 지하자원도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장위구르자치구는 파미르고원과 톈산(天山)산맥을 중심으로 볼 때 과거부터 동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서투르키스탄은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및 카자흐스탄 남부지역을 말한다.

 

동서의 길이 2000㎞, 남북의 폭 1600㎞로 면적 160만㎢인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중국 전체 영토의 6분의 1, 한반도의 7.3배나 되는 광활한 지역이다.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등 8개국과 5600㎞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 지역의 카슈가르는 지난 2000년 동안 실크로드의 무역상이 거쳐갔던 동서교역의 중심지이다.

 

중국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지하자원의 보고인 중앙아시아 각 국과 정치군사적 협력을 강화하고 자유무역지대추진하고 있다.

중국이 상하이협력기구(SCO)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으로선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과 연대하여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는 위그르족 분리독립세력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중국은 현재 이 지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철도 연결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오는8월 SCO 정상회의에서 자국과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3개국을 잇는 다국적 철도 부설 프로젝트를 제의할 계획이다.

노선은 카슈가르에서 출발해 키르기스스탄 수도인 비슈케크를 거쳐 우즈베키스탄 수도인 탸슈켄트를 종착역으로 하고 있다. 5년 정도 걸리는 이 철도 공사완공되면 과거 실크로드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철도가 부설될 경우 기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경쟁을 벌일 수 있다.

 

중국은 이와 함께 이 지역의 석유 및 천연가스 개발과 탐사를 확대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중국의 전체 지상 석유 매장량의 30%, 천연가스 매장량의 34%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문에 올해에만 300억위안(약 3조7500억원)의 자금이 투입될 계획이다.

 

지난 5월 우리나라 이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등 중앙아시아를 방문해 에너지자원외교를 했고,그곳에 사는 고려인을 만나고 왔단다.

 


 

 

 

 
 

http://uygurpeople.com/bbs/?doc=bbs/gnuboard.php&bo_table=tribe&page=1&wr_id=18

Nicos - Kalinifta
(그리스: 니코스 / 칼리니프타)

Nicos란 악기는 중앙 아시아의 이슬람 교도들이 즐겨 연주하는 악기입니다

 

 

 

2009년7월8일 신장 위구르족시위소식 추가로 올림.
» 중국 신장 위구르족 시위 확산

 

 

 

 

 


사건의 발단은 어제(7월 6일) 우루무치에서 수천 명의 위구르인들이, 6월 26일 광동성 한 공장에서 위구르 노동자 2명이 집단 구타당해 숨진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요구하며 평화롭게 행진을 벌인 것이었다.

그러자 곤봉으로 무장한 중국 경찰들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고 많은 목격자들은 증언한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위구르인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한족 이주민들과 충돌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이 과정에서 1백50여 명이 죽었고, 사망자의 대다수가 한족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작년 티베트 항쟁에서 희생당한 티베트인들의 숫자를 왜곡 발표한 중국 정부의 작태와 지금의 철저한 언론·정보 통제를 볼 때 이 말을 믿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명백한 것은 이 비극의 책임은 명백히 군사 점령과 대규모 한족 이주 정책 등 전형적인 식민화 정책을 편 중국 정부에 있다는 것이다.

신장 지역은 1949년 당시 거주민의 다수를 구성했던 위구르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중국 정부에 강제로 점령당했다. 중국 정부는 한족을 대량 이주시켰고, 반발하는 위구르인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을 탄압했다. 그 결과, 본래 6퍼센트에 불과하던 한족 비율이 1976년에는 42퍼센트로 늘었다. 이슬람 상징물들과 모스크는 ‘봉건 악습’으로 여겨져 철저히 파괴됐다. 위구르족에 대한 억압은 1980년 개방 정책 이후 잠시 완화되는 듯 싶었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다시 강화되기 시작했다.

대규모 한족 이주가 재개됐고, 우루무치 시 인구의 70퍼센트가 한족이 됐다. 위구르족은 교육, 고용, 공공서비스 등 모든 분야에서 차별받았다. 신장의 대규모 유전은 한족만 고용하며, 위구르족 평균수명은 한족이주민보다 10살이나 낮다. 이맘[이슬람 지도자]들은 중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해야만 설교 허가를 얻었고, 설교 내용은 철저히 검열 받았다. 

또, 1996년 이후에는 이른바 ‘분리주의’ 세력을 색출하는 군사 작전을 주기적으로 벌여 한꺼번에 ‘용의자’ 수만 명을 잡아들이고, 그들 중 1백70명을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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