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고인돌.

털보나그네 2009. 2. 18. 17:21
 


고인돌 [支石墓(지석묘), dolmen]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발견된 곳이다. 3만여개에 이르는 갯수 뿐 아니라 그 밀집도가 단연 세계 최고다.

그 중에서도 전북 고창군은 남·북방식 고인돌 1천 여기가 몰려 있어 ‘선사 박물관’으로 불릴 정도다.
고창의 고인돌들은 세계 거석 문화의 발생, 분포 및 전파 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 일 뿐 아니라 형태가 다양하고 규모와 밀집도에서도 세계 최고라 한다.

고인돌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널려있는데, 대개는 무리를 지어 있어 그 분포밀도가 상당히 높을 뿐만 아니라, 형태나 부장품도 다양하다. 알려지기로는 지금 세계에 약 5만 5천기의 각종 거석유물이 있는데, 그 중 고인돌은 그리 많지 않다. 거석유물이 많다고 하는 아일랜드에도 고인돌은 고작 1500 기밖에 안된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약 4만 기(북한에 1만 4~5천 기)가 집중되어 있다.

그 중 전남 지방에서만 발견된 것이 2만여 기나 되니, 정말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고인돌 밀집지역이다. 그래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화순·고창·강화 지역의 고인돌군을 세계문화유산 997호로 등록하였다. 고인돌이 대표적 거석기념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커다란 문화적 긍지를 갖게 된다.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국에 있다면 고대에 엄청난 국가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계사 속에서 한국 고대사는 찾아볼 수 없다.한반도의 북부는 한사군을 통해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를 통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한글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문자 서열로 1위라고 한다.문자는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나타내는 척도라고 하는데 그건 뛰어난 정신 문명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인데 우리민족이 식민지배나 받던 민족일까?

우리의 시원 역사는  이토록 왜곡된 채 방치되어 있다.그것은 역사 교과서 편찬자, 역사학자로부터 한국 정부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이 일제의 식민사관에 물든 채 너무도 안일 무도하여 제 나라 역사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역사를 알지도 못하는 민족이 중국과 일본의 역사 도적질을 나무랄 수 있을까!?어떤 의미에서는 역사를 훔친 민족보다 지키지 못한 민족이 더 비난받아 마땅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국토는 그 민족의 육체고 역사는 그 민족의 영혼이다.우리 민족이 혼 빠진 민족이 되지 않으려면 이제 우리 스스로가 각성해야 한다.우리들 스스로가 역사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이 얕보고 역사를 뺏아 가는것이다! 이젠 우리가 역사 왜곡의 진실을 밝혀야 하리라.

 

 ※우리의 시원역사는 무엇일까?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4)선사시대와 한민족의 뿌리...일부를 옴깁니다.>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유적으로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마을유적과 강원도 양양 오산리 유적이 있습니다. 한강변에 위치한 암사동 유적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계기로 6000년 전 사람들의 집자리터(움집터)가 발견된 곳입니다. 오산리 유적과 부산 동삼동 유적, 암사동 유적 등지에선 덧무늬 토기와 함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합니다. 빗살무늬토기를 만든 고아시아족들은 기원전 1000년 청동기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한반도의 주인공으로 살게 됩니다.

기원전 1000년쯤 되면 민무늬토기라고 부르는 무문토기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무문토기는 지역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편차를 보입니다. 빗살무늬토기 시대에는 빗살무늬토기 한 가지만 대종을 이루었던 것에 비해, 민무늬토기 시대에는 민무늬토기 외에 붉은 간토기(홍도)와 구멍무늬토기(공열문토기), 검은 간토기(흑도), 가지무늬토기(채문토기) 등 다양화돼 있는게 특징입니다.
민무늬토기를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죽음의 장식으로 고인돌을 만들었고 청동기를 사용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퉁구스 계통의 예족과 맥족입니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평화롭게 장고한 세월동안 거의 매너리즘에 빠진 듯이 살아왔던 고아시아족 빗살무늬토기인들을 섬멸시켜버리고 이 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한민족은 한 번도 남을 침범한 일이 없는 것을 자랑처럼 얘기하지만 “우리는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고아시아족을 섬멸시키고 이 땅에 민무늬토기와 고인돌, 청동기를 갖고 들어온 위대한 퉁구스 예맥족이다”라고 쓰는 게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고고학적인 해석이 됩니다. 이들이 만든 나라가 바로 고조선과 부여입니다.

북방식과 남방식, 또는 탁상식과 바둑판형으로 구분되는 고인돌이 황해도 은율과 평양 등 북한에 1만4000기 정도 있고 강화도와 전남 화순, 전북 고창 등지를 중심으로 남한에 2만4000기 정도 있다고 하지만 실제 숫자는 훨씬 많을 겁니다. 수몰지구를 발굴하면서 바깥으로 옮겨놓은 고인돌 등 모두 계산하면 남·북한 합쳐서 5만기 이상 될 것이에요. 청동기시대 때 족장과 그 가족 묘역이라고 생각되는 고인돌에선 고조선의 상징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 등 많은 유물이 나왔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유적으로 경기 여주 흔암리· 충남 부여 송국리 마을유적, 전남 보성 봉릉리 고인돌 유적, 대전 괴정동 무덤 유적 등이 있습니다. 요녕식인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에 들어와 자주적 양식인 세형동검으로 변합니다.

 ...이하생략.

 

 

 

 

 

 ※아리아 인과 수메르 인의 이동

 

고인돌(dolmen)이 발견되는 지역은 가히 세계적이다. 영국, 서유럽, 북아프리카, 팔레스타인, 중앙 아시아의 남부, 파키스탄, 인도 남부, 동남 아시아, 중국의 산동 반도와 남만주, 한국, 일본의 규슈 등 세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한국의 황해도 은율에 있는 탁자 모양의 고인돌과 형태가 비슷한 고인돌이 영국의 웨일즈에도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한반도와 서쪽 끝 섬에서 살던 선사 시대의 고대인들이 동일한 장례 풍습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나 풍습의 전파로 보기는 어렵다. 고대인들의 장례 풍습은 당시의 법이었던 종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사회적인 합의이었기 때문에, 보수성이 강해 쉽게 전파될 수가 없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인돌들의 분포 규모와 조성 시기 등으로 볼 때, 역사 시대를 전후한 시기에 아랄 해 일대에서 고인돌을 만드는 장례 풍습을 갖고 있었던 거대한 종족 집단이 동·서·남쪽으로 대이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종족이 고인돌을 만들었을까?


지구 기온의 변화로 아리아인과 수메르 인은 아랄 해 일대에서 이동을 시작했다. 상승했던 기온이 떨어지면서 강우량이 줄어들어 아랄 해 일대의 초원이 사막화되기 시작하면서, 초식 동물들의 수가 감소되어 식량 자원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기 때문다. 여기에다 기온이 높았던 시절에 아시아의 북방에서 살던 알타이 어계 종족들이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아랄 해 일대로 이동을 시작하게 되어, 종족들간의 충돌이 잦아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랄 해의 두 강 일대가 알타이 어계 종족들의 중심지이지만, 이들은 수메르 인과 아리아 인을 밀어내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이동은 어느 일정 기간에 어느 일정 지역으로 한두 차례 이루어지고만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으로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종족들간의 싸움이 잦아지면, 그때마다 종족 이동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대이동의 역사는 3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제1차는 기원전 3500년경부터 시작된 수메르 인의 대이동이다. 제2차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시작된 아리아 인의 대이동이다. 제3차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시작된, 아리아 인의 한 분파인 슬라브 족의 대이동이다.


수메르 인들은 세계 4대 고대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집트 문명·인더스 문명·황하 문명을 창건한 주역이 되었다. 산동 반도·만주·한반도 일대의 고인돌들은 수메르 인이 남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리아 인들은 유럽·인도·이란 쪽으로만 이동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동쪽으로도 이동하여 황하를 지배하게 되었고, 일부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기원전 2000년경 조선(朝鮮)을 건국했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남방계에게 밀린 황하 유역의 아리아 인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동해 고구려·백제·신라의 주체가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수메르 어와 아리아 어는 한국어의 뿌리가 되었다.

 

세계 4대 고대 문명이 남긴 국명·지명·인명 속에 있는 전통 어휘들을 우리말과 상호 연계시켜 해석해 보면 뜻이 상통하는 것들이 많다. 이것은 이 문명들을 창건한 종족들과 한반도에서 고인돌을 만든 종족은 기원이 같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고대 문명들이 남긴 언어의 자취들을 해석해 보면, 이러한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다.

 

동방에서 온 수메르 문명

 

  온난한 기후와 적당한 자연 환경을 바탕으로 중앙 아시아에 문명이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고, 인류 최초의 국가가 생겨났다. 북방에서 다시 북방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처음 생긴 나라가 환국(桓國, B.C7,199~3,898)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천산(天山) 산맥과 파미르 고원의 동쪽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의 중국의 북서부 지역이다. 이것이 북방문명의 출발인 것이다.

 

환국은 광명사상 속에서 탄생한 동서양 인류의 원 고향이다. 중앙아시아 동쪽에서 태동한 환국 문명은 사방으로 뻗어 동서 4대 문명권을 형성하였다. BCE 3300년 경,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수메르 문명이 태동되었으며, 수메르 문명은 현 서양문명의 뿌리인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계승되었다.0년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문자, 법률, 학교, 의회제도 등 수메르 문명을 창조한 고대 수메르 민족은 메소포타

또한 수메르인들은 60진법(중국과 우리나라의 60갑자 역시 60진법이다)과 태음력을 사용했으며, 결혼 전에 함을 지는 풍습까지도 우리와 비슷하다.

"수메르인들이 동방에서 왔다"는 크래머의 주장과 중앙아시아에서 왔다고 한 번즈의 주장은 수메르의 원 고향이 환국의 천산이었음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 준다.수메르인들은 동방의 종주국을 "하늘나라"로 말하고, 자기들이 "하늘산"을 넘어 왔다고 한다.

"안산An-san"의 "안An"은 "하늘"을 뜻한다.수메르의 "안"은 "한"이 건너간 말이다.

 

 

<세계 최고(高)의 피라미드 발견>

 

2000년 07월 03일 중국 톈진일보에 의하면, 러시아 고고학 발굴단이 티베트 서쪽의 강런보치봉 주변지역에서 세계 최고(最高)의 피라미드와 100개가 넘는 세계 최대의 피라미드군(群)을 발견했다고 한다. 환국(桓國)이 초창기에 도읍을 정한 위치와 일치한다.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도 수 천년 앞서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나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들 피라미드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들 피라미드는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고구려의 건축 양식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상고(上古)시대의 유적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것이다.

 

 성혈(性穴)

 

보통 고인돌 밑에는 직사각형의 석관 또는 구덩이가 있고, 그 위에 덮개돌로 덮어 놓는데, 이 덮개돌에 지름 5 ~ 10 cm정도의 반구형의 홈이 파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고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하늘의 별자리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북두칠성 형태가 대표적이다. (지금도 '칠성판'이라는 말이 관을 의미한다.)

같이 출토되어 나온 유적으로 추정한 고인돌의 연대는 보통 B.C. 수천 년 ~ B.C. 수백 년이기 때문에,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한반도와 만주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별자리에 대한 높은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석판에 새겨진 것도 그러한 맥락이라고 생각되며, 고구려, 고려, 조선 시대의 무덤 안에 그려진 사신도와 많은 별자리 그림도 그러한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시대의 능에도 별자리가 그려졌다. 이는 별과 함께 태어나 별과 함께 살다가 별과 함께 묻히는 조상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있다. '칠성판' 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 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거석문화의 유물들이 한반도에 집중해 있다는 사실과 아리아족과 수메르족의 장례문화와 언어들의 흔적들이 우리 문화와 한글속에 남아있다는 사실 그리고 풍습속에도 유사한 것들이 많다는 사실들은 중앙아시아지역  천산산맥과 바이칼호연안에서 시작한 인류의 시원문화들이 여러 이동경로를 통해 전 세계로 흩어져 발전해 왔다는 것을 고인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진실된 역사를 다시 써야 하지않나 생각해 본다...

 

 

 

 

 

 

 

 

리나라의 한단고기(이 한단고기는 이 땅이 식민지 시대로 접어든 후인 1911년에 계연수(桂延壽)라는 분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그 내용은 삼성기와 단군세기, 북부여기 그리고 태백일사의 4종 사서(史書)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를 보면

BC7200년전 건국된 한국이 있었다.

한국은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캄카차) 일군국 우루국(필나국, 수메르의 수도)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이국(시위국, 퉁구스) 수밀이국(수메르) 등 총 12개 연방으로 구성되며

그 강역(영토)는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로 한반도는 물론, 중원대륙과 시베리아, 일본 서부지역 등이 포함된다.

한국은 1세 안파견 한인천제가 서기전 7200년 전 건국해 2세 혁서, 3세 고시리, 4세 주우양, 5세 석제임, 6세 구을리, 7세 지위리 한인천제까지 총 3301년간 지속하였다.

여기에서 한국이 끝나고 배달국이 들어서면서 각 문명이 나뉜것으로 본다.

한국에서 BC3897년에 백두산 신단수 나무아래 신시개천한 거발한 환웅천왕 그리고 거발한의 12아들중 막내가 태호복희씨고 CHINA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수메르 문명도 이때부터 나뉘어진것으로 본다.

수메르의 왕명표에 적혀져 있는 메스 안니 파다의 이름을 새긴 각명(刻銘)이 발견되었으므로 왕조의 존재는 확실해졌는데

안니파다는 제1대 한인천제인 안파견과 흡사하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중앙아시아 대륙에 넓게 분포하던 12연방한국이 있었고 (이때에는 같은 언어를 썼다.)

그 12연방 한국이 끝나면서 각 연방은 분리되거나 새로이 국가를 세워 우리나라에서는 배달국, 중동에서는 수메르문명, 중국에서는 중국문명이 BC3500여년을 전후로 하여 발생한것으로 보여진다.

   한국어           수메르어      

   아버지………………………………아빠   

   칼……………………………………카르

   한……………………………………안

   엄마…………………………………엄마

   밝음…………………………………바르

   우리(겨레)…………………………우르

   달……………………………………달

   사람…………………………………사람

   나락(볍씨)…………………………나락(곡신의 신)

   단군(몽골어=텡크리)……………딩기르

   아우…………………………………아우

   북……………………………………북

   어디서………………………………~쉐

   어디로………………………………~어라어디

   부터…………………………………~타

 

정연종,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230쪽

<한글, 그 비밀의 문>, 히스토리 채널 2003년10월9일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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