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bi Caritas - Melinda Dumitrescu
인왕산-북악산
2017년12월25일 월요일.
23일부터 연휴기간이지만 아무 계획을 잡지않았다.
21일목요일 저녁 구미에 있는 아들이 방학을 하여 집에 온단다.
올해는 방학기간에도 기숙사에서 공부하면서 지낸다는데 며칠동안 집에 온다는데 같이 있어줘야지...
같이 식사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가볍게 나누고...
그동안 못했던 집안일도 좀 하면서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제는 사춘끼리 모여 점심식사를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결국 건강하게 살자는 이야기다.
오늘은 굳은 날씨가 개이고 하늘이 맑아졌다.
늦게까지 침대를 질머지고 있다가 일어나 어디든 가야겠기에 씻고 옷을 입었다.
늦은 시간에 갈만한 곳은 교통이 가까운 인왕산이나 관악산,수리산...
오늘은 발길이 인왕산으로 이끌린다.
전철를 타고 가는데 잠에취해 정신을 못차리겠다.
독립문역 1번출구로 나오니 바로 안내표시가 보인다.
잘 아는 길이기에 길를 따라 편한 맘으로 오른다.
국사당에서 오늘은 징소리가 나고 경을 음는 소리가 난다.
마당에는 돼지한마리가 발가벗고 누워있다.
옷을 갖처입고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선바위앞을 지나 성곽으로 진입한다.
멀리 보이는 북한산 산마루에는 상고대가 하얗게 앉아있다.
지금 북한산 산마루에 가면 상고대가 볼만했겠다...
인왕산 정상 범바위를 지나 창의문으로 내려가 명찰를 받아차고 북악산으로 오른다.
그리고 숙정문을 지나 말바위안내소를 지나 삼청공원으로 하산.
시내로 나오니 젊은 남녀들이 많다.
건물도 사람들도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예쁘고 귀엽다.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을 돌아보고 안국역으로 가서 지하철를 타고 귀가.
창의문 (彰義門)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門名)을 얻었다. 북한(北漢) ·양주(楊州)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閉門)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門樓)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장희빈의 음지와 숙정문 음기의 대결
음양오행으로 따져 동쪽은 봄을 상징하고 목(木)에 해당하여 인(仁)으로 생각하였다. 때문에 동대문을 흥인문(興仁門)이라 하였으며 지(之)자를 끼워 넣은 이유는 동대문이 위치한 지역이 지세가 얕아서 보완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한다.
이 부분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당대의 석학이자 엘리트 정도전이 새로운 왕성을 설계하면서 왜 음양오행에 따라 북대문에 지(智)자를 삽입하지 않고 숙청문이라 지었느냐 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름으로 지자를 따와 소지문(炤智門)으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지만 최종 낙점은 숙청문(肅淸門)으로 정해졌다.
북(北)은 음양오행에 따라 겨울과 물을 의미하고 있으며 음기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로 설명하면 숙청의 청(淸)자에 삼수변이 들어가니까 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지(智)자를 쓰지 않고 청(淸)자를 쓴 것은 법궁(경복궁)에 외척이 발호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비책이었을까? 여란(女亂)을 방지하기 위한 비방이었을까? 조선 왕국의 패망시기를 예견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종묘 정문 창엽문(蒼葉門)과 함께 정도전이 아니면 풀 수 없는 영원한 미스터리이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한양성곽을 연결하여 도성 2차 방어선인 탄금대성을 쌓은 숙종이 그의 재위 41년(1715년)에 한북문을 세우고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내린 것으로 봐서 한양도성 정북에 북(北)을 의미하는 지(智)자가 빠진 것을 아쉬워했나보다. 하지만 도성 북쪽에 지(智)자가 새겨진 편액이 걸린 이후 장희빈을 비롯한 궁중여인들이 발호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나 왕위에 올랐지만 오늘날 독살설이 대두되고 있는 경종의 의문사.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하지만 그의 아들 효장세자의 의문의 죽음과 아버지에 의하여 어이없게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의 죽음. 이 모든 것이 궁중 여인들의 질투와 시기가 뒤엉킨 피비린내 나는 암투였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숙종시절 이러한 얘기도 전해져 온다. 구중궁궐 깊은 곳. 창덕궁 후원 아주 깊은 곳에 천하에 음기가 센 곳이 있다. 오뉴월 삼복더위에도 냉기가 흐르며 해가 밝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곳이다. 이곳을 독차지한 여인이 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궁중 여인들은 음기 센 이곳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살벌한 싸움에서 승리한 장희빈은 이곳을 독차지할 수 있었고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이 싸움에서 밀려난 숙빈과 후궁들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주변의 이목을 피해 몸종 하나만 데리고 숙정문 나들이에 나섰다. 숙정문의 음기를 받기 위함이다. 인왕산과 북악산에 호랑이가 있던 시절에 여인네가 밤길에 나선다는 것은 생명을 무릅쓴 모험이었다.
숙정문의 음기를 받아서 일까? 장희빈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하던 최숙빈이 숙종으로부터 성은을 입어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훗날 조선 21대 임금 영조대왕으로 등극한 연잉군이다.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니 숙정문의 음기는 입소문을 타고 서울 장안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등극시켰지만 그의 아들 순조의 혼처에서 안동김씨를 배제하지 못한 우를 범해 조선 왕국의 몰락을 재촉했던 여풍(女風). 이 모든 것이 지(智)자와 무슨 함수관계가 있을까? 역시 북대문에서 지(智)자를 배제한 정도전만이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시인 김경린(金璟麟, 1918~2003)의 '차창'이 담긴 시비(詩碑)
차창(車窓)
나는 수족관에 온 한마리의 어족
미끄러지는 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
안경은 차웁다
우리나라 현대 시인의 하나인 김경린이 2003년 세상을 뜨자 그의 후학들이
그가 살았던 삼청동에 그의 대표작, 차창을 담은 시비를 세웠다.
독립운동가, 정치가.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냈으며,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전을 수행하다가 광복 후 귀국, 대동청년단을 창설했다. 제헌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 건축명 트윈트리 타워
- 주소 서울 종로구 중학동 14번지
- 면적 연면적 5만5785㎡, 지상 17층 지하 8층
- 건축가명 조병수
서울 중심지에 등장한 21세기 새 간판 건물
2010년 11월, 한국일보 사옥 자리에 완공된 새 건물은 이전 건물과는 완전히 달랐다. 묵직하고 직선적인 콘크리트 건물이었던 한국일보 사옥과 정반대로 유리로 덮인 투명한 건물, 곡선이 물결치는 비정형 건물, 그리고 모양이 약간 다른 두 건물이 이란성 쌍둥이로 짝을 이루는 건물이었다. 둥그런 표면에 굵은 홈이 파인 모습이 거대한 나무 밑동을 닮아 이름도 쌍둥이 나무라는 뜻의 ‘트윈트리 타워’로 지어졌다.
건물은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장소성, 곧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땅에 들어서 서울의 간판 건물 노릇을 하는 위치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가 사라지고, 21세기 서울을 대표할 새로운 간판 건물이 터와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트윈트리 타워를 설계한 이는 조병수 건축가다. 화천 이외수의 집, 파주 헤이리 황인용 아나운서의 음악카페 겸 살림집인 카메라타 등을 설계한 조 건축가는 건축 재료 고유의 특성을 잘 표현하는 건축으로 200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꼽힌다. 트윈트리 타워는 서울 한복판에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큼직하게 들어섰고, 등장하자마자 많은 주목과 논쟁을 동시에 불렀다
건축가가 보기에 건물 앞길은 오랜 세월 속에 쌓인 일종의 ‘기’가 느껴지는 듯한 곳이었다고 한다. 도시를 흐르는 어떤 기운이 굽은 길을 따라 흐르는 듯했고, 그 기운에 의해 만들어진 길 모양처럼 건물은 둥근 형태가 되었다. 이 모습에 고목 밑동 콘셉트가 더해지면서 건물 표면은 군데군데 홈이 파인 거대한 나무 모습으로 진화했다.
건물 디자인에 대한 호오(好惡)는 엇갈리지만 보행자들에게 다양하게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며, 경복궁과는 묘하게 대비되며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트윈트리 타워를 배경으로 바라볼 때 동십자각의 존재감과 매력과 더욱 선명해진다. 높게 솟은 현대 건물과 낮지만 수려한 전통 건축이 충돌하듯 대조되면서 묘하게 서로를 더욱 강조해주는 이 풍경은 그 자체로 서울이란 도시의 모습을 압축해 반영하고 있다. 경복궁과 트윈트리 타워가 마주 보는 이 장면은 어찌됐든 서울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서울을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할 것이다.
-트윈트리 타워 - 경복궁 앞에 솟아오른 쌍둥이 고목 (한국의 현대 건축)-
헛되고 헛된 것 / 조병화
헛되고 헛된 것이 생이라 하지만
실로 헛되고 헛된 것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 생각일 뿐
언젠가 너와 내가
강 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물은 흘러감에
다신 못 온다 해도
강은 항상
그 자리흐르고 있는 것
이 세상 만물 만사가
헛되고 헛된 것이라 하지만
생은 다만 자릴 바꿀 뿐
강물처럼 그저 한자리 있는 것이다
너도 언젠가는 떠나고
나도 떠날 사람이지만
언젠가 너와 내가 같이 한 자리
강마을 강가 이야기하던 자리
실로 헛되고 헛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그 사실이다
해는 떴다 지며
떴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감에
사람은 혼자서 살다가 가면 그뿐
그 자리엔 없다 해도
실로 헛되고 헛된 것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 생각일 뿐
강물은 흐름에 마르지 않고
너와 내가 떠남에 실로 있었던것이다
언젠가 너와 내가
강 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언젠가 너와 내가 강 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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