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 Elsa Huang
북한산-족두리봉에서 대남문까지
2017년12월16일 토요일.
일기예보가 엉터리다.
이번 주말에도 비나 눈이 예보되어서 계획을 잡지못하고 주말을 맞았는데.
토요일아침,청명한 하늘이 막 쏫아져 내릴듯 하다.
날씨좋으면 예산가야산엘 가려고 했었는데...
헬스나 하러가려 했는데, 와이프가 어제저녘에 그렇게 하고 아침에 또하러가냐고 한다.
사실 그래서 산엘갈까,운동을 갈까 망설였는데 정곡을 찌른다.
마음을 바꾸워 북한산에 가야겠다고 했다.
전철를 타고 종로3가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불광동역에서 내렸다.
기온은 제법 쌀쌀하다.
족두리봉을 오르니 바람이 세차게 불어댄다.
말그대로 북풍한설이다.
북쪽으로는 그늘이 져 눈이 꽁꽁 얼었고 차가운 바람도 거세게 불어댄다.
옷매무세를 고처입고 움추리며 조심스레 가다가 결국 아이젠을 착용했다.
차가운 한기는 내내 산기슬을 흘렀고 바람이 잠자는 양지녘엔 따듯했다.
오늘은 어려운코스는 우회하여 통과하였고 천천히 여유롭게 이동했다.
소나무가 많은 바위산이라 멋진 소나무와 바위의 춤사위에 항홀하다.
하산은 문수사를 거처 구기동으로 하산했다.
하산도 빙판길이라 조심스럽다.
구기터널입구에서 7211번 버스를 타고 불광역으로 이동하여 전철를 이용하여 귀가했다.
불광역 주변
등로입구.
▲ 불광산 족두리봉 정상에 천신께 제사를 올리던 알터
알터 바위는 옛부터 큰 인물이 태어났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가 자주 등장한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 알에서 나왔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알에서 나왔다.
우리 선조들은 알은 탄생과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그렇듯 알터 규모가 1m 정도 크기가 되면 마을단위나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단으로 알려지고 있다.
▲ 그르브
▲ 토어
족두리봉.
족두리봉.
족두리봉.
향로봉.
구파발 방면에서 보면 사람 옆모습을 닮았다 하여 인두봉이라고도 하고,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하여 삼지봉이라고도 한다.
세검정.
비봉.
북한산 비봉
1972년 7월 24일 사적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이 영토확장과 국위선양을 위해 세운 기념비인데 비석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972년 원비(原碑)인 국보 제3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는 경복궁으로 옮겨져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하고, 비가 서 있던 자리를 사적으로 지정하여 표석(標石)이 세워져 있다.
비석은 아래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는데 이 자리가 산정(山頂)이기 때문에 풍화가 심할 뿐만 아니라 등산객의 왕래가 빈번하여, 비를 그대로 두면 손괴(損壞)가 점점 더할 것을 우려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강유역과 함경남도 지역까지 점유한 진흥왕은 555년 10월 북한산을 순행(巡行)하여 강역(疆域)을 확정하였고, 11월에는 북한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통과한 여러 고을에 1년 동안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특별사면으로 죄수들을 석방하였는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순수비로 추정된다.
북한산의 승가사(僧伽寺) 뒤쪽 해발고도 556m인 큰 바위 위에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져 있었으며 비석이 있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비봉이라는 산봉우리 이름이 유래하였다.
북한산 순수비는 조선 후기의 서화가·금석학자인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승가사에 들렀다가 이곳에 찾아와 이끼가 덮인 비면을 닦아내고 판독함으로써 진흥왕순수비로 확인되었다.
관봉에서 본 비봉능선.
관봉위에서 셀카.
북한산 사모바위
북한산 비봉 능선 중간쯤에 사모바위라는 우람한 바위 덩어리가 있다.
1968년 1월 북한의 김신조 일행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파돼 하룻밤을 보냈다고 해서 김신조 바위라고도 부른다.
사모(紗帽)는 조선시대 관리가 관복을 입을 때 쓰는 모자인데 실제 이 바위는 생김새가 사모와 비슷하다.
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
청 태종이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 당시 사랑하는 여인이 청으로 끌려가자 그녀를 기다리던 한 남자가 북한산에 올라 청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때 청은 인조의 항복을 받아 낸 뒤 조선 백성 50만~60만명을 피로인(被虜人)으로 끌고 갔다.
이 중 여성은 2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한겨울에 청의 수도 심양(瀋陽)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노리개가 되는 등 말로 하기 힘든 고통을 당한다.
피로인 중 남자는 전쟁에 징집되거나 머슴살이를 했으며 여성은 궁중으로 들어가거나 첩이 됐다.
양국의 약조에 따라 조선은 탈출해 돌아온 조선인을 청으로 돌려보냈다.
청으로 다시 잡혀간 사람들은 발뒤꿈치가 잘렸다.
피로인이라도 몸값을 지불하면 데려올 수 있었는데 그렇게 돌아온 여성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그러나 조선에 남아 있던 남자들은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냉대했다.
견디다 못한 여성들은 목숨을 끊었으며 그게 아니면 기생이 되거나 청으로 돌아가기까지 했다.
이에 임금이 홍제천 같은 개천에서 몸을 씻고 심신을 정화하면 받아들이라는 교지를 내리지만 그렇다고 냉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환향녀가 낳은 자식 또한 호로(胡虜)자식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조선은 국가의 피해자를 그렇게 차별하고 학대했다.
환향녀와 호로자식에 대한 조선의 무책임한 태도와 흔히 대비되는 사례가 몽골 칭기즈칸의 이야기다.
그는 아내가 다른 부족에게 끌려가 임신까지 했지만 문제 삼지 않고 도리어 그 아이를 장남으로 삼았다 한다.
부자의 관계가 훗날 순탄치 않았지만 그건 별개 문제다.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은 김상헌과 최명길을 내세워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보여 주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전쟁의 참상이다.
우리는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머리 조아린 것을 슬퍼할 게 아니라 죄 없는 백성들이 피 흘린 것을 슬퍼해야 한다.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사모바위,비봉,관봉.
소나무
통천문.
청수동암문
청수동암문 성곽.
비봉능선길..연화봉,연화바위.
연화바위.
북한산 문수봉
의상봉에서 시작되는 의상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로 높이는 해발 727m이다.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한다.
명칭은 봉우리 아래에 있는 고려 때 창건된 문수사(文殊寺)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봉우리 북쪽 자락의 청수동암문에서 의상능선과 산성주능선, 비봉능선이 만난다. 봉우리 위에 있는 두꺼비 모양의 바위 등에 걸터앉아 아들을 갖기를 축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보현봉을 배경으로.
칠성봉.
비봉능선.
대남문.
문수암
문수사는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2번지 북한산 남장대 앞 문수봉 아래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이다.
문수사는 예로부터 오백나한을 모시는 기도처로 유명했으며 아직도 그 치성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절이 자리한 곳은 북한산 남장대(南將臺, 해발 716m) 앞 문수봉 아래로, 북한산 안에 있는 사찰 가운데 주위 경관이 좋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가깝게는 동쪽으로 보현봉이, 서쪽으로는 비봉이 절을 감싸고 있으며 좀 더 멀리 시야를 넓혀 보면 남쪽으로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또 멀리 서쪽으로는 한강 하류와 인천 앞바다가 펼쳐진다.
그런 까닭에 많은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좇아 이곳을 찾아 시를 읊곤 했는데, 고려시대의 이장용(李藏用)과 탄연스님, 조선시대의 최립(崔立), 홍세태(洪世泰)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문수사의 창건주인 탄연스님이 이 곳 문수사에 대해 읊은 시 한수가 전하고 있다.
한 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구 저 스님 따라, 고요히 앉아 참 낙을 배우려나.
문수사에는 문수굴로 불리는 천연동굴이 있다.
이 동굴법당은 영험이 있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도 그의 어머니가 멀리 황해도 평산에서 이곳까지와, 동굴 속에 모셔진 오백나한상에게 치성을 드린 끝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인연으로 4 · 19 직전 이승만 박사가 당시 82세의 고령을 무릅쓰고 이곳을 방문하여 ‘문수사’ 현판을 직접 썼다고 하며, 당시 스님들과 함께 찍었던 빛바랜 흑백사진도 절에 남아 있다.
또한,북한산 비봉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유명한 신라진흥왕순수비에는, ‘한성(지금의 경기도 광주 춘궁리 일대)을 지나 고개를 올라 … (중략) 한 도인(道人)이 석굴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이 근처에 있는 어느 석굴에서 도인을 만났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의 석굴을 바로 이 문수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Daum백과]
북한산
1
내가 오르는 것은 산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큰 울음속이다
울음속이 아니라
하늘 밖에 길을 열어 오는
가을의 바람속이다
바람속이 아니라
보우가 여기저기 뿌려 둔
무자화두(無字話頭)들이다
지금 산을 오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늙은 풀꽃을 더듬고 있는
고추잠자리다
고추잠자리가 아니라
한 덩어리 큰 바위들이다.
2
서울이 보이지 않는다
하늘의 빛을 다 모아 오고
바람이란 바람을 다 불러다가
육백살토록 젖을 물렸어도
한강은 아직 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서울은 얼굴이 없구나
백운(白雲)이 나서서 북을 울리고
인수(仁壽) 내려와서 어둠을 쫓아라
그러면 국망(國望)이 또 한번
천둥치듯 나라를 얹혀서
더덩실 삼각산 춤을 출 것을.
-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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