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기암괴석의 양주 불곡산(2013.06.16.)

털보나그네 2013. 6. 16. 22:13


 
Denean - To The Children



기암괴석의 양주불곡산.

 

 

 

 

 

2013년06월16일.

얼마전 tv에서 불곡산전경을 하늘에서 촬영한 화면을 보고 참 멋지다고 생각을 했는데 양주불곡산이라하여 기억을 하고 있다가 교통편을 알아봤더니 전철이 닿아 어렵지않게 갈 수 있는 곳인 것같아 오늘은 불곡산을 찾아 가기로 했다.

 

아침6시 집에서 나와 전철를 타니 30분,마침 양주행 전철이 왔다.

사람이 많지않아 앉아서 종점까지 갈수 있었다. 한시간20분정도 소요되었다.

양주역에서 아침을 해결하려고 둘러보니 김밥집이 있다.

비빔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김밥 한줄를 사서 베낭에 넣었다.

길를 건너 33-1번 버스를 타고 양주시청에서 내려 시청으로 향해 갔더니 한대의 산악회버스에서 한무리의 등산객을 내려 놓고 있었다.

시청건물 왼쪽편에 등산로가 있었다.

나는 그들를 지나처 먼저 올라갔지만 그들도 이내 올라오고 있었다.

얼마나 더울려고 흐린 하늘인데도 햇살은 뜨겁다.

어제 이웃사촌 삼부부가 안양에 있는 원주옻오리집에서 술을 마신  후유증인지 발이 무겁다.

초입은 아까시아 나무가 많다가 올라 갈 수록 갈나무와 소나무가 많아진다.

화강암의 암석들이 야릇한 모양을 하고 나무사이사이에 앉아 있다.

통일신라때 유적이라는 고구려의 보루가 있다는 안내푯말이 서 있고 여러개의 보루가 불곡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었다.

 

위로 올라갈 수록 바위크기가 커지면서 기암괴석의 멋진 풍경을 들어 내고 있다.

앞선 등산객과 뒤에서 따라오는 등산객이 적지 않다.

불곡산의 정상은 상봉으로 양주시청에서 2.8km지점에 있다.

상봉에는 먼저 온 등산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470m밖에 안되는 높지않은 산이지만 암능과 기암절벽이 이어져 스릴를 느끼며 오를 수 있는 만만치 않은 산이다.

 

양주마라톤 동호회에서도 한무리가 몰려오고 있다.

길를 물으니 친철하게 답변해 준다.그들은 도락산까지 간다고 한다.

암벽을 기어오르고 계단을 지나 상투봉,그리고 임꺽정봉까지 도달하니 이제 하산로를 찾아야 했다.

한사람에게 물으니 친절히 가르처 주면서 간식까지 먹으라고 권한다.

혼자왔다고 하니 함께 하산하자고 한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참 친절하고 맘씨가 좋은것 같다.

하산중에 풀잎을 하나 전하면서 이것이 삼지구엽초라며 먹어보라고 권한다.

원기회복에 좋다고 한다.

먹어보니 약간 단맛도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고소한 맛도 있는 것 같은것이 먹을만 하다.

그러고 보니 똑같은 것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하산을 완료하니 대교아파트가 있고 길를 건너 버스정류소가 있다.

그는 캔커피를 사들고 권한다.

오늘 참 좋은 길동무를 만나 여러모로 신세를 진것 같다.

그는 작별인사를 하고 승용차를 운전하여 사라진다.

 

133번버스를 타고 양주역에서 하차, 전철은 출발대기중 빈좌석이 많아 여유롭다...

와이프와 딸이 부천역 이마트에 나와 있다고 하여 그곳에서 만나 같이 집에 들어왔다.

딸이 내 생일 선물로 지갑을 샀다.

오늘은 이래저래 행운의 날인것 같아 기분이 좋다.

 

 

 

 

 

 

 

 

 

 

 

 

 

 

 

 

 

 

 

 

 

 

 

 

 

 

 

 

거북바위,악어바위,복주머니바위,코끼리바위,공기돌바위...기이한 바위가 많았지만 다 담아오질 못했다.

 

 

 

 

 

 

 

 

 계단이 없었을 때는 이곳에서 로프를 타고 올랐는데 사고도 많이 났었다고 한다.

 

 

 삼지구엽초

 

 

 

 

 보루

이 지역은 백제와 고구려가 대립하던 곳이었다.
백제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은 국력을 키워 고구려와 맞붙었다.
고구려는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 시대였는데 이때는 북경과 그 북쪽 땅을 지배하던 연(燕)나라와의 다툼으로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비롯하여, 왕모와 왕비조차 포로로 잡혀가는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었다. 굴욕을 참고 조공(朝貢)외교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했으나 국력은 피폐하고 국가적 자존심은 땅에 떨어진 시기였다.

이때 강력한 백제와 맞붙었으니 힘에 부친 싸움 끝에 고국원왕은 끝내 평양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의 일을 김부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드라이하게 기록하였다. “왕 41년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을 치니 막다가 유시에 맞아 이 달 23일에 돌아갔다(四十一年 冬十月 百濟王率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이로써 이 지역의 패권은 백제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러나 열흘 붉은 꽃이 어디 있으랴.

19대 광개토대왕 때에 이르러 국력을 키운 고구려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강역을 넓혀 나가 남쪽으로 백제를 밀어 내더니, 그 아들 장수왕 때에 이르러서는 아예 수도(首都)를 만주 벌판 환인에서 평양으로 옮기며 남하정책을 밀어 붙였다. 이때 백제 개로왕은 아차성(또는 아단성)에서 고구려의 포로로 잡혀 죽임을 당하니 그 아들 문주왕은 후일을 기약하며 공주로 옮겨가는 수모를 당했다. 이때의 일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보자.
“왕이 도망쳐 나갔는데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헤아리며 아차성 밑으로 묶어 끌고가서 살해하였다.(王出逃 麗將 桀婁 等 見王下馬拜 已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 이후 고구려는 중원(계립령: 하늘재~죽령)까지 밀어 붙여 넓은 강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시작해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게 됐는데 불곡산 뒤 도락산, 앞 쪽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에 고구려는 보루를 쌓고 백제와 신라에 대응한다. 지금 남아 있는 불곡산의 9개 보루는 모두 고구려가 쌓은 것이다. 다른 지역의 보루나 작은 퇴뫼식 산성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의 토기 등 파편이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그 옛날 세 나라의 뺏고 빼앗기던 긴박한 역사가 우리를 긴장되게 한다.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 28]중에서.

 

 

 

  임 꺽정

조선 중기 양주(楊州)의 백정(白丁) 출신으로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았다.

이후 명종
대의 정치 혼란과 계속된 흉년으로 관리의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 행각을 벌였다. 이들의 행각에 백성들이 호응하면서 관군의 토벌이 있을 경우 미리 정보를 알려주어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559년(명종 14)에는 개성(開城)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자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소굴을 소탕하러 갔다가 오히려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일당이
서울까지 출몰하였다가 장통방(長通坊, 지금의 종로 2가 부근)에서 아내와 부하들이 체포되었고, 12월에 서울 전옥서에 갇힌 아내와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던 중 숭례문 밖에서 참모 서림(徐林)이 체포되었고, 이어 황해도에서 형 가도치(加都致)가 순경사 이사증(李思曾)에게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1561년에는 임꺽정 일당을 잡기 위해 경기도 · 강원도 · 평안도 ·
함경도 · 황해도의 군졸들이 대거 동원되어 소탕작전을 펼쳤다. 이들이 약간이라도 의심가는 사람이면 모두 잡아 가두어 심문을 벌이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정부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도적 체포를 일임하고 다른 군사들은 돌아가도록 조치하였다. 1562년 정월에는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이 구월산으로 도망간 임꺽정을 추격하여 체포하였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하였다.

성호 이익(李瀷)이 자신의 저서인 《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홍길동과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을 꼽을 정도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둑이다. 그를 의적으로 평가하면서 소설책과 영화 등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출처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