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홀로 다녀온 삼막사(2012.09.30.)

털보나그네 2012. 10. 1. 22:04

Honesty / Beyonce


 

홀로떠난 삼막사.

 

 

2012년09월30일

추석 전날인데 부지런한 형수님덕에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아침 느지막히 작은 베낭을 메고 북한산이든 관악산이든 어디든 가려고 집을 나섰다.

전철를 타고 가다가 문득 삼성산 삼막사로 행선지를 정했다.

석수역에서 내려 새로 생긴 육교로 건너는데 둘레길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서울 둘레길, 석수역에서 호압사구간 3.3km)

 

예전에 갔던 기억을 더듬어 길를 따라 올라 갔더니  새롭게 단장한 등산로는 정성이 흠벅 묻어 있어 보인다.

이동네 사는 사람들은 쉽게 좋은 산을 오를 수 있어 좋겠다 생각하며 울창한 나무숲을 오른다.

옆으로 시냇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능선으로 오르니 한우물로 가는 안내표지가 보인다.

그리고 펼처진 전망은 인천방향으론 바다가 보이고,반대로 돌아서니 관악산 정상이 보인다.

멀리 수리산 슬기봉이 보이고 그 뒤로도 바다가 열려있다.

동서남북으로 관망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제일먼저 제2한우물을 만나 주변을 돌아 보고, 이곳에서 조금 더 가니 제1 한우물이 있다.

이곳은 잘 복구해 놓았고 옆에는 불영암이란  작은 암자가 자리하고 있는데,오늘 보니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못보던 돌탑이 많이 서 있고 삼방향으로 바라보는 석가의 조형물이 새롭게 서 있다.

개3마리가 주변을 돌아 다니는데 조금은 사납게 생겨 옆을 지나는데 은근 슬적 겁도 난다.

이곳에 전망대도 안양시내가 한눈에 다 보이는게 참 좋다.

조금 더 가서 석구상을 돌아보고 길를 가는데 돌이며 지형이 예사롭지가 않다.

주변에 깨진 옛 기와파편들이 보이고 돌이 가지런히 땅에 박혀 있는것이 인력의 손이 닿은게 분명해 보인다.

이 주변은 호암산성이 있던 곳이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군사적으로 많이 사용했던 곳이다.

한우물은 산 정상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항상 물의 양이 변함없고, 늘 맑은 상태로 고여 있어 신비로움을 더해 주고 있다.

그래서 한우물은 '큰 우물' 또는 '하늘 못(天井)'이다.

 

다시 길를 재촉하여 간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바윗길를 내려오는 모습을 영상에 담는 모습이 보여 나도 옆에 서서 디카로 한컷 찍었다.

관악산을 바라보며 걷는 산길 옆에는 노란 꼬들빼기꽃이 피여 웃고 있다.

누군가 심어놓은 코스모스가 힘없이 서 있다.

내 생각엔 차라리 심을려면 구절초나 벌개미취,쑥부쟁이같은 걸 심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든다.

발밑에 들꽃들은 등산을 하면서 육체적,정신적으로 피로를 풀어주는 피로회복제와 같다.

삼막사 초입,고찰의 이 분위기는 언제나 마음을 아늑하게 해 준다.

삼막사를 돌아 보고 삼막고개 쉼터에서 능선길를 택했다.

능선을 타고 제2전망대를 지나 쉬운길,어려운길이라고 이정표가 있어 쉬운길를 택했다.

관악역으로 하산하려는 생각에서, 그리고 원주옻닭집 근처로 하산 할 생각에서다.

석실분이란 표지판이 있어 궁금하여 그곳으로 발길를 돌렸다.

삼국시대의 옛무덤자리다.이곳을 거처 하산하려는데 길이 없어졌다.

산길를 헤메다보니 이곳은 곳곳에 기도했던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그러다 관악산둘레길이란 꼬리표와 함께 등산로를 발견하여 길를 따라가다가 금강사로 빠지는 이정표를 발견하고 아마도 이 방향이 맞을것 같아 이 길를 택하여 갔더니 바로 맞았다.

원주옻닭집이 보이고 개천을 따라 가니 삼성초등학교 뒷편이다.

 

 

 

 

 

 

 

 

 

 

 

 

 

 

 

한우물및주변산성지 

 

사적 제343호

관악산의 지맥인 금주산(일명 虎巖山) 정상에 있는 유적지이다. 산성은 호암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한강유역을 차지하고자 했던 삼국의 쟁패 및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고자 했던 신라군사의 활동과 관련된 유적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군사의 주둔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곳 산성지와 한우물[天井]이라는 용추(龍湫) 등은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의해 1989년 10월과 1990년 3월 두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곳은 근래까지 조선왕조의 도읍설화와 관련된, 이른바 해태상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실제로 산성 유적의 동북쪽 끝에 그 짐승을 형상화한 석상이 있다. 이 석상은 한우물의 각자(刻字)로 보아 석구(石狗)로 추정된다.

산성유적은 조그만 봉우리를 최고봉으로 하고 있으며,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한 면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성의 동북은 관악산과 삼성산의 험준한 봉우리들로 막혀 있으며, 서북·서남·서쪽은 안양천(安養川)을 끼고 발달한 넓은 평지를 이룬다. 또 산성터 정상에서 날씨가 맑은 날 서쪽을 바라보면 멀리 소래·군자 일대의 해안선이 보인다. 또 북쪽으로 한강을 건너 용산과 남산, 그리고 북한산까지 조망된다.

이러한 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안양과 금천 일대의 평야를 관할하는 요새지로서 서쪽의 해안과 북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암산성을 중심으로 한강 남북 일대에는 많은 산성과 토성이 있는데, 이들의 축조 시기는 서로 약간씩 다르더라도 삼국통일기에 들어서면서 각 지역을 방어하는 주요 관방시설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실제로 발굴 조사된 경기도 하남시의 이성산성(二聖山城) 유적과 비슷한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어 확실한 신라성으로 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 고적조에 “호암산고성(虎巖山古城)이 있으며 그 성안에는 한 못이 있는데 가뭄이 심하면 비내리기를 하늘에 빌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산성의 축조 시기와 축성 목적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두 차례의 발굴과 지리적 입지조건을 통하여 호암산성의 역사적 사실을 살필 수 밖에 없다.

호암산성의 평면형태는 남북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인데, 성벽의 총 연장은 약 1.25㎞이고 성벽은 표고 325m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테뫼식 산성(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이다. 현재 산성터 안에서 확인된 유구는 우물터 2개소와 건물터 4개소이다. 발굴된 두 우물터는 호암산성이 처음 축조되었을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물이 출토되어 성의 축조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기존의 한우물인 제1우물터는 최근까지 조선시대에 쌓아올린 석축이 남아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지(石築址)가 확인되었다. 연못터의 내부 퇴적토 조사에서 나타난 층위(層位)에 따르면, 지표 아래 30㎝까지는 백자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그 아래에는 유물이 거의 없는 굵은 모래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모래층은 연못이 사용되지 않던 시기에 토사가 유입되어 형성된 것이다. 또 이 모래층 아래에 교란되지 않은 뻘층이 계속되고 여기에서는 통일신라의 유물만 출토되었다. 그 아래에는 유물층이 없고 자연 암반 위에 점성(粘性:차지고 끈끈한 성질)이 강한 점토(粘土)가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목제 손잡이에 철제날이 끼워진 월형도끼와 토기 등 통일신라시대 유물의 중심연대는 대개 7∼8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제2우물터에서는 ‘仍伐內力只乃末(잉벌내역지내말)’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숟가락이 출토되었다. 원래 금천 일대는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당시의 지명은 전하지 않고 한강 유역이 고구려에 편입되었을 때 잉벌노현(仍伐奴縣),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곡양현(穀壤縣)으로 불렸다.

그런데 명문 중 잉벌내의 ‘내(內)’는 나(那)·노(奴) 등과 같이 지명 끝에 붙어 때에 따라 훈독 또는 음독되는 것으로, 지(地) 또는 천(川)이나 천변의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잉벌노와 잉벌내는 동일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문의 ‘역지’는 인명이고, ‘내말’은 신라 17관등명 가운데 11위인 나마(奈麻)의 별칭으로 금석문에 자주 나오고 있다.

한편 757년(경덕왕 16)에 잉벌내현이 속해 있던 한산주가 한주로 개칭되고 그 영현(領縣)으로 1소경과 27군 46현의 군현 정비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때 토착지명이 한자풍으로 개칭되고 있다.

따라서 명문이 새겨진 유물로 보아 산성의 축조 하한선은 경덕왕 16년이 된다. 호암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미루어 672년(문무왕 12)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 남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관련된다.

주장성은 한강에서 경기도 광주지역으로 침입하는 적에 대한 방어와 공격에는 적절한 요새이지만, 지형상 관악산이 가로막혀 서울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적은 방어할 수 없다. 여기서 서해안과 한강 북쪽이 한눈에 조망되는 관방시설이 요구되는데, 그 지역이 바로 호암산성이 된다. 따라서 당시 이 일대에서 당나라 군사와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신라는 호암산성의 입지를 충분히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산성 안 제1우물터의 석축구조가 674년에 만들어진 안압지의 석축구조와 거의 유사하여, 산성의 축조 시기가 문무왕 때로 나당전쟁에 대비한 관방시설로 추정된다. 그 석축구조는 현재 축조 당시의 원형이 남아 있는 남동쪽 모서리의 경우 모두 13단으로 쌓여 있으며, 석축의 맨 아랫단은 20㎝ 가량 내어 쌓고 위로 가면서 들여쌓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축조방법은 안압지의 축조방법과 동일한 것이다.

또한 호암산성 발굴에서 고려시대의 유물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중국 화폐인 희령원보(熙寧元寶)가 주목된다. 희령은 북송(北宋) 신종(神宗)의 연호로 1068년에서 1077년까지 사용되었으므로 고려 문종 연간에 해당된다. 이 때는 고려와 송이 활발한 대외무역을 하던 시기로, 당시의 화폐가 호암산성에서 발견됨으로써 고려시대 국제무역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서울文化財大觀(서울특별시, 1987)
한우물-虎巖山城 및 蓮池發掘調査報告書(서울대학교박물관, 1990)
鄕土文化誌(서울특별시 금천구, 1996)

 

 

 

 

 

 

 

 

호압사

호압사는 전해지기를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전설에 경복궁을 세울 때 자꾸 무너져서 그 원인을 알아본 즉 이 호암의 위력으로 인해 무너졌기에 이곳에 호압사를 세웠다고도 한다. 실록이나 여지승람에 호압사나 호갑사 라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민간의 전설인 것 같다.
이 절의 본전(本殿)은 대웅전이나 대적광전이 아니라 약사전이다. 서울시 문화재자료(제8호)인 조선시대의 석조약사불이 모셔져 있다. 금니(金泥)로 칠해져 있어서 석조인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다. 삼성각에는 산신, 독성, 칠성뿐 아니라 무학대사 영정도 봉안돼 있다.

앞마당에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가 그 세월만큼이나 가슴을 다 비우고 서 있다. 가슴은 허허로워도 그 그늘은 넓고도 크다. 사람도 나이 먹어 가면서 속은 비우고 그늘은 크게 하라고 무언으로 일러 주신다.

호암산

조선 건국과 한양천도 직후 태조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는 등 새 왕조를 위협했던, 그래서 무학대사가 산 허리에 호압사(虎壓寺)를 세우고 그 기운을 누르게 했던 호랑이 형상의 바위산, 바로 그 호암산이다.
관악산 바로 옆 산이 삼성산이고, 그 삼성산의 한줄기인 장군능선이 경인교대를 빙 돌아 뻗어나가다가, 장군봉을 거쳐 다시 솟구친 산이 해발 325m의 호암산이다.
정상부를 밑에서 보면, 영락없이 호랑이의 등을 닮았다.
‘민주동산’이라고도 불리는 호암산의 능선은 계곡을 따라 길게 이어져, 전철 1호선 석수역과 관악역 근처까지 계속된다.
삼성산의 또 다른 줄기도 이곳에서 끝난다. 마치 두 개의 손가락을 펼친 것처럼, 두 산줄기가 경인교대 골짜기를 감싸고 나란히 달려 내려가, 비슷한 지점까지 이어지는 것.

 

석구상.

우물지 근처에서 개 모양의 동물상(석구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서울에 화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설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우물 근처에서 석구지(石拘池)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이 연못이 석수상과 관련되어 석구지라고 불려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저 멀리 슬기봉과 수암봉이 보인다.

흔히 보이는 작은쉼터, 맘만 먹으면 어디서든 쉽게 쉬고 갈 수 있다.

 

 

 

 


마애부도

무너미 갈림길에서 삼막사로 가는 길은 시멘트 포장길이다. 이 곳 송신소 차량 이동로로 사용하려니 이렇게 포장길이 된 것 같다. 잠시 후 반월암이 나타나기 직전 좌측 바위에 사각형으로 뚫린 구멍이 있다. 구멍 위 꽃무늬 위에는 서영당(西影堂), 추씨(秋氏)라는 각자(刻字)가 보인다.
흔히 말하는 마애부도(磨崖浮屠)인데 부도라기보다는 사리공(舍利孔: 사리를 봉안한 구멍)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승려나 도력을 많이 쌓은 재가불자가 입적(入寂)하면 다비(茶毘: 화장)하여 남은 유골이나 사리(舍利)를 탑과 같은 형태의 부도(浮屠)에 봉안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비용과 공력이 너무 많이 든다.
따라서 자연 바위에 구멍을 뚫어 사리함(유골함)을 넣고 입구를 막으면 적은 공력으로 부도를 대신할 수 있는 개량 장례법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마애사리 공(구멍)의 예는 북한산 도선사 위의 ‘김상궁 사리탑’, 불암산 ‘학도암 마애사리공’, 불암산 ‘불암사 마애사리공’ 등에서 볼 수 있다. 어느 시대에나 간소화해 실용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기에 시대가 발전했던 것 같다.
이러한 마애사리공을 보면 요즈음에 유행하고 있는 납골당의 원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시대를 앞서간 장례법이기에 자연히 머리가 숙여진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누군가 이 사리공의 막은 돌을 열고 내용물을 가져가 버렸다는 점이다. 아마도 사리를 넣었을 사리함이 탐나서 꺼내 갔으리라….

 

※반월암입구 절로 오르는 층계 양쪽으로 범어(梵語)로 쓴 ‘옴마니반메훔’ 진언이 가득 적혀 있다 

 

 

세조 때 왕실의 안녕을 빌던 원찰이 서울 네 곳에 있어서 4대 명찰이라 했다는데 동쪽은 불암사, 서쪽은 진관사, 남쪽은 삼막사, 북쪽은 승가사였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시왕(十王)에게 10번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해서 일곱 번(49번) 심판 받고, 100일에 심판 받고, 1년(小祥), 3년(大祥)에 심판 받아야 심판이 끝나는 것이다.
이 때 돌아가신 영혼이 잘 보이게 도우려고 산 자들이 망자를 위해 재(齋)를 올린다. 죽은 지 일주일 후에 진광대왕에게 심판 받고, 그 일 주일 뒤에는 초강대왕에게 심판 받고…. 이렇게 하여 3년 뒤 오도전륜대왕에게 심판 받는 것으로 심판이 끝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게는 길만이 길이 아니고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통해

바깥 세상을 내다볼 수 있었고

또 바깥 세상으로도 나왔다.

 

그 길은 때로
아름답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길을 타고,

사람을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니 웬일일까...

신경림의 <바람의 풍경> 중에서]


 

 



삼층석탑
경기유형문화재 112호인데 승장 김윤후(金允候)가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처인성 싸움에서 죽인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김윤후는 살리타이를 쏘아 죽였는데 나라에서 제수한 상장군의 직위를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끝내 제수 받지 아니하였다 한다. 그런 승장 김윤후를 기념하기에는 탑이 너무 아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삼귀자

 

관악산 삼막사 경내에 있다. 절 오른쪽에 조성해 놓은 돌계단을 오르면 바위를 깎아 상형문자와 같은 거북 귀자 3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자들은 조선 후기에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池雲英, 1852~1935)이 인근 백련암지에 은거할 때 쓴 것이다. 바위면을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3가지 형태로 음각하여 놓았는데, 오른쪽의 것은 현재 사용하는 글자이고, 가운데 글자는 거북이의 등을 표현한 상형문자, 왼쪽 것은 두 글자의 중간 형태로 보이는 글자이다. 글씨의 크기는 왼쪽부터 높이 74cm, 77cm, 86cm이며 왼쪽에 ‘불기 2947년경신중양 불제자 지운영 경서’란 명문이 있어 1920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운영

본관 충주. 호 설봉(雪峰) ·백련(百蓮). 1884년(고종 21) 통리군국아문주사(統理軍國衙門主事)가 되고, 1886년 사대당 정부의 극비지령을 받아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로서 도일, 도쿄[東京] ·요코하마[橫濱] 등지에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암살을 꾀하다 일본경찰에 잡혀 비밀문서 ·비수 등은 압수당하고 본국에 압송, 영변으로 유배되었다. 1889년 풀려나와 운영(雲英)으로 개명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유 ·불 ·선에 통달했고, 시 ·서 ·화에도 뛰어나 삼절로 불리었다. 글씨는 해서에, 그림은 산수 ·인물에 능했다. 주요작품에 《후적벽부도》 《신선도》 등이 있다.

[출처] 지운영 | 두산백과

 

삼성각.

삼막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이 절은 677년(문무왕 17) 원효(元曉)·의상(義湘)·윤필(潤筆) 3대사(大師)가 관악산에 들어와서 막(幕)을 치고 수도하다가, 그 뒤 그 곳에 절을 짓고 삼막사라 하였다.

사지(寺誌)에 의하면, 원효가 창건하고, 신라 말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개칭하였는데, 고려의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 하였다고 한다.

1348년(충숙왕 4) 나옹(懶翁)이 이 절에 머무르면서 수도하였고, 1394년(태조 3)에는 왕사 무학(無學)이 이 절에서 국운(國運)의 융성을 기원하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1398년 왕명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1880년(고종 17) 의민(義旻)이 명부전(冥府殿)을 짓고 이듬해 칠성각(七星閣)을 지은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을 지칭하여 조선시대부터 남왈삼막(南曰三幕)이라고 하였는데, 이 절이 남서울의 수찰(首刹)이자 서울 주변의 4대 명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망해루(望海樓)·대방(大房)·요사·칠성각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은 조선 초기 무학 대사가 석조기둥으로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양식의 건물이며, 내부에 봉안된 탱화와 범종은 광무연간에 제작된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 맞배지붕인 망해루는 청명한 날 서쪽을 바라보면 서해가 보인다고 하여 망해루라 일컬었다. 또, 명부전 내부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십대왕(十大王)·판관 등의 상이 모셔져 있는데, 십대왕상은 이 절의 보물이라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높이 2.55m의 3층석탑과 조선 정조 때의 인물인 김창영(金昌永)의 탄생전설을 지닌 거북모양의 감로정석조(甘露井石漕)가 있으며, 자연암석에 양각한 아미타삼존불이 있다.

 

 

 

 

 

 

 

 

 

 

 

 

 

 

석실분.

삼성산의 남쪽 기슭 중턱에 있는 안양사(安養寺)의 오른편에 1기가 있고, 이보다 위쪽에 있는 십자 바위 아래쪽에 또 다른 1기가 있다. 유적은 안양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까지 2기의 무덤이 알려졌으나, 지형 조건으로 보아 더 많은 무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의 무덤은 무덤방으로 통하는 널길이 마련되지 않은 횡혈식(橫穴式) 돌방무덤이다. 돌방의 세 벽은 막돌을 가지고 축조하였으며, 나머지 한 벽은 커다란 판석을 이용하여 축조한 공통점을 지닌다. 돌방의 길이는 3.4∼4.5m, 너비는 1.5∼1.7m이며, 현재 높이는 0.85∼1m이다. 십자 바위 아래쪽의 무덤은 도굴되었고, 금귀걸이가 나왔다고 전하지만 그 유물이 어디에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석수동 돌방무덤은 무덤 양식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므로 자세한 발굴 조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뚝갈(뚜깔)

뚝갈은 우리나라 전역의 산과 들에서 나는 다년생 초본이다. 생육환경은 햇볕이 잘 들어오는 양지쪽의 물 빠짐이 좋은 곳에서 자란다. 키는 약 1m이고, 잎은 길이가 3~15㎝이고 마주나며 표면은 짙은 녹색이고, 뒷면은 흰빛이 돌며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있고 양면에는 흰색 털이 드물게 있다. 꽃은 흰색으로 원줄기 끝이나 가지 끝에서 달리며 꽃줄기 분지에서는 아래로 퍼지거나 밑을 향해 있는 털이 있다. 열매는 9~10월경에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으로, 뒷면이 둥글게 달린다. 어린잎은 식용, 뿌리는 약용으로 쓰인다.

 

 

 

 

짚신나물꽃과 산부추꽃.

 

 

금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