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광명시에 있는 구름산(2012.05.12)

털보나그네 2012. 5. 12. 22:45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2012년05월12일.

홀로...

아침에 뭘 할까를 망설이다, 오늘은 구름산엘 다녀와야 겠다.

마라톤 가방에다 물과 초코파이 2개를 담고 집에서부터 뛰었다.

샘터주유소에서 우회하여 계수터널를 지나는데 도로변으로 뛰다 보니 지나는 차들의 속도감에 겁이 난다.

차에서 뿜어대는 매연도 만만치가 않을 것 같다.

산으로 통하는 길이 있으면 산으로 가려고 알만한 사람이 있나 찾아 보니 사람 구경하기도 힘든 지경이다.

할 수 없이 계속 앞으로 달렸다.

범안사거리를 지나고 능촌사거리를 지나면서 기온이 오르고 더운데다 차에서 뿜어대는 매연이 싫어 무작정 산길이 있을만 한 곳으로 길를 따라갔다.

하지만 결국 원위치,온신초등학교앞이다.

한 노인에게 물어보니 저수지를 끼고 올라가야한다고 한다.

무조건 저수지방향으로 달렸다.

한참을 가다가 한 농부에게 물었더니 자기도 밭에 가는중인데 저수지를 지나 간단다.

저수지만 도착하면 구름산으로 오르는 길이 여러가닥으로 있단다.

같이 좁은 산길를 얘기를 나누며 걸어 갔다.

몇마디 나누어보니 순수하고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작은 저수지는 나중에 알았지만 애기능저수지(노온사저수지)였다.

조금지나가니 영회원이 나온다.

영회원은

영회원(永懷園)인조인열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제1왕자인 소현세자의 빈 강씨의 묘소이다. 강씨의 본관은 금천이고, 시호는 민회빈(愍懷嬪)이다. 경기도 광명시에서 우의정 강석기(姜碩期)고령신씨(高靈申氏) 사이에서 5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627년(인조 5) 9월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2월에 가례를 올렸다. 1636년(인조 14) 원손인 이석철(李石鐵)을 낳았고, 이어서 별손인 이석린(李石麟)과 군주(君主)[딸] 세 명을 낳았다.

강빈(姜嬪)은 병자호란 뒤인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와 함께 나라 심양에 볼모로 갔다가 잡혀간 지 9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후 강빈과 반목하던 인조의 총비(寵妃) 조소용(趙昭容)에 의해 “강빈인조를 저주하였다”는 무고와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아 후원 별당에 유치(幽置)되었다가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6년 3월 사사(賜死)되었다. 이어 강빈의 친정어머니와 4형제는 모두 처형 또는 장살(杖殺)되었고, 어린 세 명의 아들도 모두 귀양을 갔다. 효종 때 황해도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 신원을 건의했으나 묵살되었고, 1718년(숙종 44) 비로소 복위되었다.

민회빈 강씨가 사사되고 선산인 경기도 광명시에 묻힌 지 73년이 흐른 1718년(숙종 44) 4월 민회빈 강씨의 무고함이 판명되어 위호를 복위시키고, 시호는 민회빈이라고 정하여 신원(伸寃)시켰다. 또한 숙종민회빈 강씨의 총명함과 덕을 칭송하면서, 손수 제문을 지어 민회빈 강씨의 원혼을 위로하는 한편, 묘소를 개봉하는 대규모의 역사를 진행시켜 소현세자의 신주를 함께 묻게 하였다. 민회빈 강씨의 묘는 처음에 민회원으로 추존되었다가 1903년(고종 40)에 다시 영회원으로 개칭되었다. 일명 애기릉, 아왕릉(兒王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디지털 광명문화대전>

 

급경사를 치고 올라가니 중간에 천연약수터가 나오고 곧 이어 정상이 나온다.

정상에선 정자를 한창 보수공사중이다.

전망이 좋긴 한데 대기가 맑지 않아 멀리 까지는 안 보인다.

운산전망대 방향으로 가서 가리대광장에서 하산했다.

추어탕집인데 개장기념으로 해장국이 5,000원 이라고 현수막을 걸어나 있어 그집으로 갔다.(원래 산내들 양평해장국집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맛이 별로인데,한 술 더 떠서 먹다가 쌀벌레가 해장국에서 발견하고는 맛이 달아나 버렸다.

계산을 하면서 이야기를 해 주고 조심하라고 했더니 어쩔 줄를 몰라 한다.

 

배가 부르고 날도 더워서 뛰지 못하겠다.

이곳에선 교통도 좋지않아 동네로 가는 버스가 없다.

조금 빠른 거름으로 걸었다.

걷다 뛰다 하며 집에까지 왔다.

 

 

 

 

 

 계수동 지석묘

안골마을 서쪽에 있는 야산 동쪽 능선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는 낮은 산이 둘러서 있고 앞쪽 약 10m 떨어진 곳에는 개울이 흐른다. 1999년 11월 원래 지석묘가 있던 곳이 도로에 편입되어 원 위치에서 서쪽으로 36m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남방식 지석묘로서 덮개돌은 오상편마암으로 되어 있고 규모는 가로 3.15m, 세로 2.62m, 높이 55cm이다. 평면은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마름모꼴이고 긴 축의 방향은 남북을 향해 있다. 3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데, 2개는 오상편마암이고 1개는 녹니석편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1999년 11월에는 지석묘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야산 구릉지에서 3기의 지석묘와 민무늬토기[] 조각, 간석기(돌도끼)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마을 주변에 청동기시대의 취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마다 음력 10월이면 마을주민들이 지석묘 서쪽에 남자 장승을 세우고, 앞쪽 약 250m 떨어진 산기슭에 여자 장승을 세워 풍년, 다산, 무병 등을 기원하는 장승제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