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간추린 우리역사.-2

털보나그네 2010. 3. 1. 08:25

 

 

 간추린 우리역사.-2

 

 

세계는 지금 빠른 정보력과 통신,교통의 발달로 글로벌화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런 세계화시대에서 자국의 역사는 상당히 중요하다.

왜곡된 우리역사를 바로잡고 제대로 된 국사교과서를 만들어 우리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고 정신무장을 새롭게해서 세계화의 거센 파도에 대비해야 하지않을까?

 

 

 ☆사국시대.

 

1.고구려.-bc58~ad668.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이 서기전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의 옛 문헌에는 그보다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키고, 낙랑군과 현도군을 압박하여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구려는 고국원왕백제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고, 신라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숙신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牙山灣)까지 지배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고, 함께 공격당한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잃었다.

 

6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 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신라의 진흥왕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 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 전쟁은 수나라의 멸망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태종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요동성 등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에게 대패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수도인 평양을 차지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백은 후일 그 계승국인 발해로 이어진다.

 

2.백제.-bc18~ad660.

 

'백제(百濟)'라는 국명은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다 나라를 세웠다는 뜻에서 유래됐다. 건국 목적이 해양지향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백제의 건국 설화를 보면 고구려 주몽(朱蒙)의 큰아들 비류(沸流)와 둘째인 온조(溫祚)가 열명의 신하와 백성들을 이끌고 강과 바다를 건너(濟海) 왔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十濟, BC18)를 세웠고, 비류는 따르는 백성을 이끌고 미추홀(彌鄒忽:인천)에 백제를 건설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백제가 기원전 18세기에 건국됐으며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강력한 절대왕권을 갖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쓰다 소우키치·이마니시 류 등 일본학자와 이병도 교수를 비롯한 대부분 한국 고대사학자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은 허구라고 비판하면서 대체로 3세기 중반 고이왕 이후부터 역사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을 발굴하고 있는 국립문화재 연구소는 이 토성이 백제 초기 3세기쯤에 축조가 끝난 한국 최대 판축토성으로 판명됐다고 1999년 9월 12일 밝혔다. 백제가 고구려에 밀려 온조왕 이후 475년 문주왕 원년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기기까지 493년간 한성은 백제의 왕성(王城)이었으며 적어도 3세기 이전에 강력한 왕권을 갖춘 고대국가였음이 확인됐다.

한강을 북쪽으로 끼고 반 타원형 모양으로 3.5km를 둘러친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은 폭이 40m, 높이 9m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판축토성이다. 판축토성은 사방에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나무판을 댄 뒤 흙을 차곡차곡 다져 만든 성을 말한다. 이 같은 거대한 규모의 토성을 축조하려면 대규모 인력동원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백제는 이미 절대왕권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이러한 절대왕권을 기반으로 백제는 삼국 중 강력한 해상제국을 건설했다. 백제가 자리잡은 한반도 서·남해안 일대는 굴곡이 매우 심한 까닭에 육상교통은 불편한 반면 도처에 항만이 발달하여 이른 시기부터 해상교통이 편리하였다. 비류가 바닷가에 터전을 잡고자 했던 것은 대외교역에 유리한데다 생필품이 소금을 팔아 이익을 남기려는 경제적인 측면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백제는 발달한 항해술을 이용하여 색다른 문화요소를 섭취하려는 욕구가 강렬했다. 백제의 대외교섭은 상업적인 성격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이면에는 고구려·신라와의 대립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후사를 도모하려는 정치적인 색채가 강했다는 것이다.

백제는 초기에 신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으나 286년에 형제국인 고구려와 첫 군사적 충돌을 빚은 후 그 나라와 앙숙관계를 유지했다. 백제의 위대한 정복군주였던 근초고왕(346∼375)은 고구려를 공격하는 한편 중국 동진(東晋)과 친선관계를 맺었다. 또 336년에는 일본열도를 제패한 야마토(大和國) 정권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특히 6세기 전반의 한반도 3국과 일본의 야마토 정권의 인적 교류를 보면 고구려와 신라가 일본에 1회씩 사신을 파견한 데 비해 백제는 23회 사신을 파견했다. 반대로 야마토 정권은 고구려, 신라에는 한번도 없었으나 백제에는 14회의 사신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경기만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당시 경기만 지역은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뿐 아니라 중국을 잇는 최단 교역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백제는 결국 광개토대왕의 남하정책으로 한강을 빼앗기면서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특히 고구려의 수군에 의해 서해 해상권을 제압당하면서 대외관계도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로 인해 오늘날 하남인 위례성에 수도를 세워 한강을 지배했던 수도를 사비성과 부여로 옮기면서 영토가 대폭 축소됐다. 백제 후기에 들어와 성왕 등은 빈번이 권토중래를 꾀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삼국간 쟁탈전이 치열했던 4·5세기에 왜(倭)가 수차례 걸쳐 백제를 군사적으로 도와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369년경 한반도에 야마토 정권이 출병해 신라를 격파하는 등 곤경에 처한 백제를 군사적으로 도왔다는 것이다.

중국 옌볜대학의 전춘원(全春元) 교수는 <한민족이 동북아 역사에 끼치는 영향>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영토 확장을 꾀했을 때, 백제는 일본 야마토 정권의 지원을 받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399년에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5만 대군을 풀어 가야지구를 점령하고 있던 야마토 정권의 지원군을 섬멸했다고 광개토대왕비에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 일본 지원군은 백제의 요청으로 한반도에 출병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 광개토대왕 영락 14년(404년)에 백제의 유인과 책동으로 야마토 지원군은 백제군과 배합하여 고구려 남쪽 경계선인 대방(帶方)지구까지 깊숙이 쳐들어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407년에도 한반도에 출병했으나 고구려의 거센 반격으로 괴멸됐다. 이처럼 한반도 삼국 쟁탈전에 일본 야마토국의 무력개입은 몇 차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했으며, 이로 인해 친(親)백제노선을 걸었던 왕조가 붕괴됐다. 즉, 4세기 이래 줄곧 친백제노선을 걸었던 닌도쿠계 왕조가 붕괴되는 등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왕조 교체라는 정치적 대변혁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백제가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 패망하자, 왜는 661년 수만명의 병력과 왜선(倭船) 4백여척을 동원해 백제 부흥군을 도왔다. 하지만 백제 부흥군 지원에 나섰던 이들은 금강 양안에 배치되어 있던 당나라 군선 1백70여척과 신라 지상군의 공격을 받아 거의 몰살당했다. 백제와 왜는 663년 백제 부흥군이 패망할 때까지 무려 3백년간 동맹관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다. 세계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혈맹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백제로부터 일방적으로 시혜만 받았던 게 아니었다.

백제는 왜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수했을까. 야마토 정권을 백제의 영향권에 계속 묶어 두기 위해 고급문화를 전수했을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또 백제는 왜를 예속시켜 고구려, 신라와 전쟁을 치를 때 군사력을 동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백제는 강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타개하기 위해 일찍부터 왜와 가야 세력을 끌어들여 삼각동맹체제를 구축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남북조로 분립된 중국 내륙의 남조 정권과 협력하여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5세기 후반부터는 신라까지 끌어들여 하나의 거대한 외교벨트를 구축했다. 그러나 관산성 패전 이후 신라와의 동맹관계가 깨지게 되었고 가야 세력도 신라의 수중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백제는 고립화되어 갔다. 중국 대륙도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마지막 동맹국인 왜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는 6세기 때 학자군을 왜에 파견했는데 인솔자로 저미문귀(姐彌文貴) 장군을 비롯한 고위 장교들이 선발됐다. 이는 군사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552년 10월 백제는 왜에 승려와 불상, 경륜(經綸) 등을 보낸 대가로 554년 1월 왜군 1천명을 동원해 관산성 전투에 투입했던 것이다. 야마토 정권은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친백제노선을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왜의 경제적 기반을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독차지했다. 이는 전쟁을 치를 때 안정적인 군비 확충을 염두에 둔 조치로 해석된다. 예를 들면 무령왕은 아들 순타(淳陀) 태자를 왜에 파견하여 교역체계의 관리를 맡겼으며 개로왕은 백제 귀족의 해외 기반까지 장악하려고 아우인 곤지를 정로장군 좌현왕으로 제수하고 왜의 가와우치 아스카(河內飛島) 일대에 파견해 해외자산을 관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왜에 선진문화를 전수했던 것은 일본에 파병을 요청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는 것이다. 백제가 일본열도로 건너간 도래인들의 해외자산까지 관리하려 했다면 도래인의 경제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백제가 고대 일본에 전수해 준 문화와 기술은 무엇일까. 백제는 수도를 옮길 때마다 고대 일본에 고급 문화를 전파했다. 여기에는 불교, 유교, 문필, 천문학 등 사상과 학문을 비롯해, 궁전·도성을 축성하는 토목기술과 사원을 짓는 건축기술, 농업기술이 포함됐다. 또 교량과 제방축조기술은 물론 금속공예, 수공업, 요업, 조각, 회화, 기악, 의학, 조선, 광산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아스카(飛島) 문화를 꽃피웠던 것도 백제 문화의 전파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백제의 해외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에 대해 갖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들어 중국에 진출한 백제인의 해상 활동이 1천5백년간 이어져 왔다는 설과 함께 백제의 전성기인 4세기 중엽에 만주에서 백제의 식민지가 있었다는 요서 경략설, 백제가 야마토국을 끌어들여 한반도 남부(가야지역)를 강점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함께 백제의 지방 통치체제인 담로가 중국과 일본 등지에 설치되었다는 주장과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된 거타지(居陀知) 설화를 근거로 백제가 패망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명쾌한 사료는 없으나 백제의 대외진출을 입증하는 증거물은 있다.

대표적인 것은 현재 일본 나라현 덴리(天理)시 이소노카미(石上神宮)에 봉안된 '칠지도(七支刀)'다. 칠지도는 백제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신표로 하사한 물건으로 알려졌다. 칠지도의 명문(銘文)에는 5세기에 백제대왕 밑에 불사후(弗斯侯), 불중후(弗中侯), 이중후(而中侯), 팔중후(八中侯) 등 7개 후왕국(侯王國)들이 있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백제는 중국과 일본 등지에 식민지를 두어 수세기 동안 지배하는 등 삼국 중 해외 진출이 가장 왕성한 국가였다. 이를 입증하는 사례로는 백제의 행정조직에서 알 수 있다. 국내 사료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당의 요사렴(姚思廉)이 편찬한 <주서(周書)> 백제전과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북사(北史)> 백제전에 보면 백제 말기의 행정조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국가기구를 내관(內官)과 외관(外官) 등 둘로 나누는 독특한 편성을 하고 있다. 내국 행정관서에는 11개 부가, 대외관서는 10개 부가 편성되어 있었다. 백제의 대외 관련 부서가 10개나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서해를 오래 전부터 지배한 백제가 대외경략 차원에서 중시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총 10부 중 군부 관련이 3개 부이고 교역과 외국인 관리를 담당하는 부서만 3개에 달했다. 특히 외사부(外舍部)는 외국에 있는 백제 공관을 말하는 것으로 식민지 각지에 파견한 관원과 해외에 진출한 본국인을 관리했다.

백제의 행정조직 가운데 대외 관련 부서가 10개나 있었다면 백제는 틀림없이 바다 건너 해외에 강력한 식민지를 건설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역사학자인 문정창(文定昌) 선생은 저서인 <백제사>에서 백제가 삼국 중 최강국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와 <일본서기> 등을 토대로 백제의 역사가 왜곡되고 축소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백제는 서쪽으로는 중국의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허난(河南), 양쯔강 하구의 오·월국 등 여러 지역을 점령하여 3백년간 통치했으며 동으로는 오진조 왜국을 분국으로 만들어 수세기간 지배하였다는 설을 제기했다.

또한 백제가 공식적으로 660년에 패망했으면서도 그 이후 '존재했다'고 해석할 만한 사료들이 확인되고 있다. 즉, 백제라는 간판이 한반도 내에서 자취를 감췄을 뿐이지 일본과 중국 등지에 망명정부가 수립돼 10세기와 13세기까지 '불멸의 왕조'처럼 건재하고 있었다는 단편적인 기록물도 있다. <고려사>(성종 4년, 984년 5월 조)에 따르면 송나라에서 고려 성종을 책봉하고 내린 조서에서 "항상 백제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영원히 장회(長淮) 족속을 무성하게 하라"하여 '백제'의 존재가 보인다. 여기서 장회는 양쯔강과 화이수이(淮水)를 뜻하는데,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고구려 주민을 강제 이주시킨 지역 가운데 하나인 지앙수이(江淮)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3세기 중엽에 백제는 이미 중국의 주산반도와 한반도 및 일본의 규슈를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역을 무대로 1천5백여년 동안 거대 해상교역권을 구축했다고 한다. 이는 지중해 문명의 여명기에 시리아 연안으로부터 지중해를 석권하고 북해까지 진출했던 페니키아의 해상무역 왕국에 버금가는 해상제국을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보면 백제는 빼어난 기상과 뛰어난 무용, 고도의 문화와 우수한 해양기술 등을 발휘, 중국의 광대한 면적을 식민지로 지배했으며, 일본 열도에 진출, 분국과 영지를 획득해 수세기 동안 통치했다는 것이다.

 출처:http://www.changpogo.or.kr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JBhh8Hy0UkE$

 

3.신라.-bc57~ad668.

 

때는 기원전 70년

고조선의 멸망 후 그 백성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촌락을 이루고 살았는데 알천의 양산촌, 돌산의 고허촌, 취산의 진지촌, 무산의 대수촌, 금산의 가리촌, 명활산의 고야촌이다.

서라벌에는 이 여섯마을이 촌장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이 여섯마을을 진한의 6부라 하였다.

어느날 양산촌의 촌장이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한 아이를 얻었다. 그 아기는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 에 의해 길러졌고 박처럼 큰 알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박” 이름은 나라를 밝게 비추어 준다고 하여

“불구내”라고 하였다. 한참 후에 빛난다의 뜻을 지닌 “혁” 세상에 있다는 뜻의 “거세”로 바꾸어 “혁거세”라 하였다.

 기원전 57년 6부 촌장들은 나라를 세우니 이름을 서라벌(서나벌이라 부르기도 함)이라 하고 임금을 거서간(왕 또는 귀인이라는뜻) 이라 부르며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옹립한다. 박혁거세 신라의 시조인 것이다. 그의 나이13세 때의 일이다.

 BC 53년 1월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우물 이름을 따라서 알영이라 하였다. 알영은 자랄수록 덕기(德氣)가 있으므로, 혁거세가 그녀를 비로 맞이하여 알영부인(閼英夫人)이라 하였다. BC 41년 혁거세가 알영부인을 동반, 6부(部)를 순행하면서 백성에게 농잠(農蠶)을 권면하여 생산의 증가에 힘쓰니, 백성들이 이들을 이성(二聖)이라 칭송하였다.

 BC 37년 수도에 금성(金城)을 쌓고, BC 32년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 4년 61세로 죽자 담엄사(曇嚴寺) 북쪽의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지금 위치는 경주시 남천(南川)의 남쪽이다.

 

 

4.가야.-ad42~ad532.

 

 가야는 서기 전후 무렵부터 562년까지 한반도의 남단인 지금의 경상남북도 서부지역에 존재하였던 국가들의 총칭, 또는 좁은 의미에서 보아 김해의 가야국(加耶國)이나 고령의 대가야국(大加耶國).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경상남도 해안지대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이 지역에서는 사회통합이 진전되어 변한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발전추세가 지속됨에 따라 소국간의 통합이 한 단계 더 진행되어, 2∼3세기에 변한지역은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변한소국연맹, 즉 전기가야연맹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세력범위는 낙동강유역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다가 4세기초 이후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라 전기가야연맹은 약화되기 시작하여, 4세기말 5세기초에는 그 중심지역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들어 옛 가야지역의 내부에서 재통합의 기운이 일어나고 지배 권력의 주체 및 중심지역이 옮겨져서, 고령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후기가야연맹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그뒤 백제 ·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었다. 그러나 신라 · 백제의 팽창에 따라 530년대에 김해의 금관국을 비롯한 남부지역이 병합되자 가야는 다시 약화되고, 결국은 562년 고령 대가야가 신라에게 병합됨으로써 후기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여러 가지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데, ‘가야(加耶 · 伽耶 · 伽倻)’외에 ‘구야(狗邪 · 拘邪)’,‘가라(加羅 · 加良)’,‘가락(伽落)’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 명칭들은 모두 ‘가야’ · ‘가라’를 음차 표기한 것인데, 그 가야의 뜻에 대해서는 ‘갈래[分派]’,‘강(江)’,‘겨레[同族]’,‘성(城)’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가야에 속하는 국가들로서는 먼저 《삼국지》의 변진12국(弁辰十二國), 즉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 접도국(接塗國) ·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 고순시국(古淳是國) · 반로국(半路國, 혹은 半跛國) · 악노국(樂奴國) · 군미국(軍彌國) ·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 감로국(甘路國) · 구야국(狗邪國) · 주조마국(走漕馬國) · 안야국(安邪國) · 독로국(瀆盧國) 등이 있다.


한편, 국내 사료인 《삼국유사》의 5가야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 고령가야(古寧伽耶) · 대가야(大伽耶) · 성산가야(星山伽耶) · 소가야(小伽耶) · 금관가야(金官伽耶) · 비화가야(非火伽耶) 등이 있고,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령가야 · 금관국 · 아시라국(阿尸良國) · 대가야국(大加耶國) 등이 나타나 있다.

 

 전기 가야 연맹.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 가야의 건국설화에 따르면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9간(干)이 추장이 되어 각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던 바, 하늘로부터 보랏빛 줄이 내려와서 보니 붉은 보자기 안의 금합에 6개의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아도간이 이를 집으로 가져간 지 12시간 만에 금합을 열어보니 여섯 알이 어린아이로 변하였는데, 그 중 먼저 태어난 이가 수로였다.

42년에 그는 곧바로 금관가야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기 5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설화는 9간으로 대표되는 김해지역의 토착세력과 수로 집단이 연합하여 금관가야국(변한 12국 가운데 구야국)을 건국한 사실과 그 뒤의 어느 시기에 그 국가를 중심으로 가야연맹체를 결성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전기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금관가야가 위치한 김해지역은 일찍부터 풍부한 철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 철은 화폐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으므로 《삼국지》 <동이전>에는 왜(倭)를 비롯한 한예(韓濊)와 중국 군현세력들이 여기서 철을 수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여 중국의 군현 및 왜 등과 경상도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금관가야는 중국 군현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지속적인 문화축적을 이루는 한편, 이를 경상도 내륙지역의 여러 국가와 왜 등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의 이익을 보면서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가야연맹체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낙랑군·대방군의 소멸과 고구려의 남진이 본격화되면서 가야연맹도 커다란 변동을 겪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왜·가야 세력과 동맹을 맺고, 신라는 이에 맞서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다. 400년 왜 세력이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 광개토왕은 보기(步騎)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신라국경에 집결한 왜군을 격파한 다음 임나(가야)의 종발성(從拔城:위치 미상)까지 진격하였다. 고구려군의 침공으로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의 여러 가야국들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쇠잔해졌으며, 일부 세력들은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경상도 내륙지방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전기가야연맹도 와해되고 말았다.

 

1대 수로왕 은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천신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國)의 왕녀인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수로왕은 157년을 재위하다가 죽었는데, 그 아들 거등왕이 뒤를 이었다.


199년에 즉위한 2대 거등왕은 가야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과 허왕후(許王后)의 아들이다. 비는 천부경(泉部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고 한다


253년에 즉위한 3대 마품왕(마품(馬品)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가락국기 駕洛國記〉에 따르면 253년에 즉위, 39년을 다스리고 291년 1월 29일 죽었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이며,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291년에 즉위한 4대 거질미왕은 아버지는 마품왕(麻品王)이며, 어머니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이다. 비는 아간(阿干)의 벼슬을 지낸 아궁(阿躬)의 손녀인 아지(阿志)이며, 이품왕(伊品王)을 낳았다

 

346년에 즉위한 5대 이시품왕(이픔왕이라고도 함) 아버지는 거질미왕(居叱彌王)이며, 어머니는 아궁(阿躬) 아간(阿干)의 손녀 아지(阿志)이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인 정신(貞信)으로, 좌지왕(坐知王)을 낳았다.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400년에 왜가 신라를 침범함에 고구려가 구원군을 보내어 왜적을 물리치고 임나가라(任那加羅)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이시품왕대의 사실로 주목된다.


407년 즉위한 6대  좌지왕 은 김질(金叱) 또는 김토(金吐)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5대 이시품왕(伊尸品王)이며, 어머니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이고, 비는 대아간 도령(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다. 취희왕(吹希王)의 아버지이다.

즉위한 뒤 용녀(傭女)와 혼인을 하고 그녀의 척당을 관리로 등용하니 나라 안이 소란하여졌다. 이 틈을 타서 신라가 가야를 치려고 모의하였다. 이때 박원도(朴元道)의 충고로 용녀를 귀양 보내고 정치를 바로잡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421년 즉위한 7대 취희왕은 질가(叱嘉)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좌지왕(坐知王)이며, 어머니는 대아간(大阿干) 도녕(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다. 비는 각간(角干) 진사(進思)의 딸 인덕(仁德)이다. 질지왕(知王)의 아버지이며, 451년 2월 3일에 죽었다.


451년 즉위한 8대 질지왕은 김질왕(金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7대 취희왕(吹希王)이며, 어머니는 진사(進思) 각간(角干)의 딸 인덕(仁德)이다. 비는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 방원(邦媛)이다.

즉위한 이듬해에 시조인 수로왕과 왕후 허황옥(許黃玉)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들이 처음 만난 자리에 왕후사(王后寺)라는 절을 짓고 전(田) 10결을 주어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고 한다.


《남제서 南齊書》 동남이전(東南夷傳)에 “가라국(加羅國)은 삼한종(三韓種)이다. 건원(建元) 원년(479)에 국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냈다. ……이에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을 제수하였다.”고 하였는 바, 하지왕이 혹 질지왕인지도 모르겠다.


492년 즉위한 9대 겸지왕은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김(金)은 성이고, 겸지(鉗知)가 이름이나, 지(知)는 가야와 신라인의 이름에 붙는 어미로서 실제의 이름은 ‘겸’이다. 아버지는 질지왕(知王)으로 김질왕(金王)으로도 불리었으며, 어머니는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딸 방원(邦媛)이다. 왕비는 각간 출충(出忠)의 딸로 숙(淑)이며, 아들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다.

492년에 즉위하여 30년간 재위하였다.


521년 즉위한 10대 구형왕은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조에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季男)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으나, 또한 〈개황력 開皇曆〉을 인용하며 법흥왕 19년에 망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世宗)·무도(茂刀)·무득(茂得)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를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써 대접하고, 왕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였다. 아들 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角干)의 벼슬에 까지 올랐다. 김유신은 무력의 손자이다.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후기 가야 연맹.


전기가야연맹의 해체 후 가야세력은 연맹체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로 존속하다가 5세기 후반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다.

고령지역은 경상도 내륙지방이었기 때문에 고구려군 침입 때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고령 지산동의 거대한 고분들은 바로 대가야 세력의 성장을 알려주는 고고학적인 증거이다.

대가야는 점차 경남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의 가야국가들을 포괄하면서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가야연맹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을 금관가야가 주도한 가야연맹과 구분하여 후기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에 대가야 시조설화가 전하는데, 이것은 고령지역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였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설화에 따르면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고 한다. 이 설화에서 고령 대가야왕의 조상인 이진아시의 ‘아시’는 알지(閼智)·하지(荷知)와 같이 대수장(大首長)이란 뜻이다. 또한 대가야국 시조를 수로왕과 형제 사이로 묘사한 것은 가야연맹을 주도한 대가야가 전기가야연맹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표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는 대가야가 그 밖의 가야국가들을 가야연맹에 끌어들이려는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대가야가 부상할 즈음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결성하였는데, 이때 두 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전략상 가야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대가야는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하였다.

《남제서》 <동이전 가라국조>에, 479년 가라국왕(可羅國王) 하지(荷知)가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爵號)를 받았다는 자료가 전한다. 하지는 중국기록에 보이는 유일한 가야인으로서 이 무렵에 대가야가 중국과 교류할 만큼 세력이 커졌음을 보여준다.

 

481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신라 북쪽 변경지역에 침입하여 호명(狐鳴) 등 7성을 취하고 미질부(彌秩夫:현 포항시 흥해읍)로 진격할 때, 가야군은 백제군과 더불어 신라군을 도와 고구려군을 격파한 적도 있었다. 이 무렵 대가야는 소백산맥을 넘어 전북 임실·남원을 일시 점령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6세기 초반 백제와 신라의 압박이 강화되면서 대가야의 성장은 방해를 받게 된다.


 510년 백제는 대가야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여 경남 하동·거창 등을 위협하였다. 대가야는 522년 신라에 결혼동맹을 요청하였으며, 신라의 법흥왕은 대가야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을 가야왕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는 한편으로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내부체제를 굳건하게 정비한 다음, 서쪽 가야지역으로 무력진출을 적극 꾀하고 있었으며, 결혼동맹을 받아들인 것도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미 신라는 지증왕대에 가야지역을 침략하여 김해지역 등을 한차례 점령한 적이 있었고, 524년에는 법흥왕이 직접 남쪽 변방지역을 순행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532년 지속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한 금관가야는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신라의 금관가야 병합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을 위협하였다. 대가야는 신라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다시 백제·왜와 연합을 추진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이들 세력들이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백제 성왕이 주재한 대책회의에 참석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가야의 이러한 외교정책도 554년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관산성(管山城:옥천)에서 신라군에 대패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진흥왕은 555년 창녕지역에 비사벌정(比斯伐停)을 설치하여 중앙군단을 주둔시키고 가야정벌을 본격화하였다. 가야세력은 관산성싸움의 패배로 무기력해진데다가 일부는 신라에 항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백제의 원조가 끊기고 일부 세력마저 가야연맹에서 이탈하자, 대가야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562년(진흥왕23년) 이사부(異斯夫)가 신라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

 16대 도설지 대가야왕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이때 나머지 가야국가들도 차례로 신라에 병합되면서 가야제국은 소멸하였다.


 가야는 연맹체의 주도세력만 바뀌었을 뿐, 멸망할 때까지 연맹체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연맹체 아래에서 각 가야국가들은 정치적인 독자성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다른 지역과 통합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전영토를 아우르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가야세력이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멸망당한 요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가야는 비록 멸망하였지만, 가야의 문화와 인물들은 신라 역사의 전개와 문화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6세기에 대가야의 가실왕(嘉實王)이 성열현(省熱縣: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신의 악사 우륵에게 가야금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우륵은 가야금과 더불어 12곡을 지어 바쳤다. 후에 우륵은 가야국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예상하여 신라에 망명한 다음 신라인 제자들에게 가야금을 전수하였다. 가야금은 신라 궁중음악으로 채택되어 거문고·비파와 함께 신라 3대 현악기가 되었다. 또한 중원경 출신인 강수(强首)는 가야인의 후예로서 유학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으며, 7세기 중엽 중국과의 외교문서 해독 및 제작으로 명성을 떨쳤다. 한편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들은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어 신라의 영토확장과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김구해(金仇亥)의 손자 김무력(金武力)은 관산성싸움에서 백제군을 격파하는 데 크게 공을 세웠으며, 그의 아들 김서현(金舒玄)은 대야주(大耶州:합천) 군주(軍主)가 되어 진평왕 대에 활약하였다. 그리고 김서현과 왕족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김흠순 형제는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그들의 누이인 문명부인은 태종무열왕의 왕비로서 문무왕을 낳았다. 김유신의 후손들은 중대 말기에 경주 토착귀족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다가 통일신라시대 말에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9대 이뇌왕 

일명 이부리지가(已富利知加). 대가야 시조 뇌실주일(惱室朱日, 또는 伊珍阿鼓王·內珍朱智)의 8세손으로 부인은 신라의 이찬(伊飡) 비지배(比枝輩, 또는 比助夫)의 딸(혹은 누이)이다. 아들은 제10대왕인 월광태자(月光太子)이다. 그런데 월광태자는 제16대왕인 도설지왕(道設智王)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러한 세계의 차이를 10을 16으로 잘못 기록하였거나, 10대는 직계이며 16대라는 수를 왕계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가야·신라인의 이름 어미에는 ‘지·치’가 붙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보아 이뇌왕의 ‘뇌(腦)’자는 ‘치 자의 잘못이라고 보기도 한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제와 신라의 공격이 계속되자 신라와의 친선을 도모, 522년(법흥황 9) 신라에 청혼하여 비지배의 딸(또는 비조부의 누이)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신라는 처음 왕녀와 함께 100명의 시종을 보냈는데, 이들의 거취가 문제되어 양국관계가 불편해졌다. 이에 신라가 왕비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다. 524년에는 신라 남부국경선을 순시하던 법흥왕과 만나기도 하였다


16대  도설지왕

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王)으로부터 제16대왕이다. 아버지는 이뇌왕이며, 어머니는 신라의 이찬(伊飡)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라고 전한다.


가야연맹제국이 차례로 신라에 병합되었지만 대가야만은 홀로 버티었으나, 최후로 562년(진흥왕 23) 사다함(斯多含)이 거느린 5천의 기병을 선봉으로 한 정벌군총사령관 이사부(異斯夫)의 대군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16세 520년의 대가야는 멸망하고 말았다

 

☆남북국시대.

 

1.대진국(발해)-668~926.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한다.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뒤의 고왕)이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營州:조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서기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영주에서 이진충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 지역은 여러 민족이 생활하는 곳이라, 한족에 대한 반발심이 많았다. 이곳은 강제 이주된 고구려인 3만여 호가 살고 있었으며 대당 전쟁에 참가한 고구려 동북 지역 사람들도 포로나 노예로 잡혀와 있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이진충의 난은 성공적이었고, 당을 압박하는 분위기였다. 고구려인 부대를 지휘한 대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과 대조영, 말갈인인 걸사비우가 이 반란에 참가한다.

그들은 요동 지역을 근거지로 삼으려고 했으나, 이진충의 난 실패로 빠르게 동으로 이동하면서 각지에 흩어진 고구려 인을 수습하였다.


그들은 고구려. 당 전쟁의 피해가 없었던 당과 멀리 떨어진 만주의 동북부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그들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진충의 난을 진압한 후 투항한 거란족 출신 이해고를 대장으로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추적한다. 처음으로 전투를 개시한 부대는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인 부대였는데, 병력의 엄청난 차이로 부대는 괴멸되고 추장인 걸사비우는 전사한다. 이런 와중에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걸중상도 죽어, 대조영은 혼자서 패전된 말갈인 부대를 수습하고, 전열을 보강해 당과 일대 격전을 벌인다. 당의 이해고는 앞 전투의 승리에 자신감을 가지고, 고구려인 부대를 얕잡아 보지만 천문령에서 매복한 고구려인 부대에 기습당하여 부대가 완전히 괴멸 당한다.


이 전투가 '천문령 대첩'이다. 대조영은 소규모 부대로 대 부대인 당의 대군을 전멸시키고, 이해고는 수 천기의 기병만 이끌고 후퇴한다. 당은 더 이상 군사력 부족으로 인하여 대조영 세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서기 698년 대조영은 만주 동부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육정산) 기슭에 진국(震國:振國)을 세웠다.


당은 진국의 성립을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유역과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진국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작을 수여하였는데, 이로부터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천문령 전투는 발해국 성립과 직접 연결된 의의 깊은 전투로서, 어떠한 외부 세력도 발해국의 성립에 위험이 되지 않았다.

당도 신라도 어떠한 외부 세력도 미치지 못한 이 지역에, 대조영 집단은 고구려 멸망 후에도 자치적으로 고구려인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는 이들 지역에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한다.


중앙 통치 집단이 생기자, 각 지역의 고구려인 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모여 대조영 시대가 끝나기 전에 대다수 옛 고구려 고토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중앙 정부 역시 완성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고구려인들은 예전의 고구려 시대만큼 새롭고 강한 나라에서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발해의 시조인 고왕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었다는 《구당서》의 기록과,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었다는 《신당서》의 기록이 병존한다. 종래 이 때문에 이를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한편, 한국측의 기록인 《신라고기(新羅古記)》, 《제왕운기(帝王韻記)》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라고 표기하였다. 대조영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대조영이 죽은 뒤 대무예(大武藝)가 2대 무왕(武王)에 즉위하였다. 그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정하고,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여 북동방면의 여러 종족을 정복하였다. 발해의 세력이 강해지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발해와의 화친관계를 깨고 당나라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에 반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대문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에 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당과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문제를 둘러싼 외교분쟁을 수차례 일으켰다. 이러한 와중에 732년 가을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함께 당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자, 그해 9월 발해는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등주(登州:산동성 봉래)를 급습하였다.


당은 유주(幽州:북경)에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를 끌어들여 남동쪽에서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737년 무왕이 죽고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文王)에 즉위하여 대흥(大興)·보력(寶曆)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1∼2대 왕을 거치면서 국가기반이 확립되자, 문왕은 내부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먼저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정당성·중대성·선조성) 6부(충·인·의·예·지·신부) 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지방에도 경부(京府)·주(州)·현(縣)으로 구성된 3단계의 통치체계를 갖추었다.


또 문왕은 750년대 전반경에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로 옮겼다. 그의 말년에 수도를 일시적으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흑룡강성 휘춘현 팔련성)로 천도한 적도 있으나, 성왕(成王)대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그것을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북방면의 말갈부락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부(府)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정비를 통하여 국력이 향상되자, 762년 당은 문왕에게 한 등급 높은 관작인 발해국공(渤海國公)을 수여하였다.


서기 794년 문왕 대흠무의 친척동생〔族弟〕대원의 가 4대 왕 폐왕이 된다.

문왕이 죽자, 그의 적남인 굉림(宏臨)이 일찍 죽어 대원의가 왕위를 이었으나 의심이 많고 포학하였으므로 즉위 직후 수개월 만에 살해되었다

794년 폐왕의 뒤를 이어 5대왕 성왕이 즉위한다.

이름은 대화여(大華璵). 할아버지는 문왕이며, 아버지는 대굉림(大宏臨)이다. 폐왕 대원의(大元義)의 뒤를 이어 즉위, 수도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기고 중흥(中興)이라는 연호를 세웠으나 곧 죽었다.


같은 해 성왕의 뒤를 이어 6대왕 강왕이 즉위한다.

이름은 대숭린(大嵩璘). 제3대 문왕의 막내아들이다. ‘정력(正曆)’이라는 연호를 썼다. 당나라에서는 즉위 이듬해인 795년 2월 대숭린에게 ‘발해군왕’의 책봉을 내리고, 798년에는 다시 ‘발해국왕’의 책봉을 내렸다.

15년간에 걸친 치적은 네 차례에 걸친 당나라에의 사신파견과 빈번하였던 일본과의 사신내왕이 알려져 있을 뿐, 특기할 만한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서기809년 강왕의 뒤를 이어 7대왕 정왕이 즉위한다.

이름은 대원유(大元瑜).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의 아들이다. 영덕(永德)이라는 연호를 세웠다. 재위기간이 4년에 지나지 않았으며, 치적으로서 특기할 만한 것이 전하지 않는다


서기812년 정왕의 뒤를 이어 8대왕 희왕이 즉위한다.

이름은 대언의(大言義)이며, 제7대 정왕의 아우이다. 주작(朱雀)이라고 건원(建元)하였으며, 재위 동안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냈다.

814년에는 당나라에 불상을 보내기도 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발해 불교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이밖에 특기할 업적은 없다.


서기817년 정왕의 둘째 아우 대명충이 9대왕 간왕이 된다.

형인 제8대 희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태시(太始)’라고 건원(建元)하였으나, 즉위한 다음해에 죽었기 때문에 정치·행정·외교면의 업적은 별로 없다.


서기 818년 간왕에 이어 그의 종부(從父)이며 대조영 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 대인수(大仁秀)가 10대 선왕(宣王)에 즉위하였다.

선왕은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세력을 복속시키고, 또 요동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요하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菟州)를 설치하였다.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였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이 결과로 발해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서기831년 대이진이 11대 왕이 된다.

연호는 함화(咸和)이며, 시호는 전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신덕(新德)이며, 할아버지는 제10대 선왕(宣王)이다.

즉위하자 여러 사신과 학생을 당나라에 파견하는 등 선왕에 이은 율령제국가 수립에 노력하였고, 당나라와의 경제·문화 교류에 힘썼다.


왕자 명준(明俊)을 832·836·837년 세차례에 걸쳐 수십인과 함께 당나라에 파견하였으며, 왕자 광성(光晟)· 연광(延廣)· 대지악(大之) 등도 833·839·846년에 각각 당나라에 파견하여 당나라의 문화수용에 적극성을 띠었다.

이때 학생 해초경(解楚卿)· 조효명(趙孝明)· 유보준(劉寶俊)· 이거정(李居正)· 주승조(朱承朝)· 고수해(高壽海) 등도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당나라에서는 장건장(張建章)이 서적을 가지고 발해에 들어오는 등 발해와 당나라의 문화적 교류는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편, 왜국(일본)과도 빈번한 내왕이 있어, 선왕 때 이어 왕문구(王文矩)가 계속 파견되었고 하복연(賀福延) 등도 파견되었는데, 그 목적은 주로 신라 견제와 경제적 이해관계였을 것으로 생각 된다


서기858년 대이진(大彛震)의 동생 대건황이 12대 왕이 된다.

연호와 시호는 전하지 않으며,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 단지 당나라와 왜국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당나라와의 교섭은 당나라 내부의 농민폭동과 관련하여 빈번하지 못하였던 데 반하여, 왜와의 교섭은 계속되었다.

858년 겨울 정당성좌윤(政堂省左允) 오효신(烏孝愼) 등 104인을 왜에 보냈으며, 860년에도 이거정(李居正) 등 105인을 왜에 보냈는데, 그 목적은 주로 신라에 대한 견제와 경제적 이해관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기 871년 대건황의 아들 대현석이 13대왕에 오른다. '현석왕'이라고도 한다.

《신당서》 발해전(渤海傳)에는 당나라 의종(懿宗)때 세차례나 당나라에 조공의 사신을 보낸 것으로 적혀 있으나 믿기 어렵다. 그것은 경왕이 즉위한 872년에서 겨우 1년 반이 지나 당나라의 의종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와의 교류는 매우 활발히 전개하여 877년(경왕 6)에는 공목관(孔目官) 양중원(揚中遠)을 비롯한 105인으로 된 사절단을 보냈고, 882년에는 배정(裵) 등 105인으로 된 대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이처럼 대규모의 사절단을 자주 왜에 보냈던 것은 평화적인 무역으로 이익을 얻고자 한 것이며, 정치·군사·문화의 교류에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서기894년 대위해가 14대왕이 된다.

연호와 시호·가계 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당나라와 왜와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있다.

왜에는 전대의 현석(玄錫)때도 다녀왔던 문적원감(文籍院監) 배정(裵)을 894년에 파견하였으며, 905년 당나라에 오소도(烏炤度)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동안 대위해는 발해왕계에서 빠져 있었으나, 김육불(金毓)의 노력에 의하여 《당회요 唐會要》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발해의 제14대왕으로 밝혀졌다


서기907년 대인선이 15대 왕에 오른다.

그는 발해의 제15대 마지막 임금이었다. 그의 재위 시절의 발해는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팽창주의에 두려움을 느끼고 신라 등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이를 견제하려 하였다.


이에 야율아보기가 925년 12월 대원수 요골(堯骨) 등을 이끌고 친정(親征)을 감행하자, 발해는 저항다운 전투도 치르지 못하고 다음해 정월에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포위되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건국 후 229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해 7월에 있었던 거란군의 회군시에 그는 왕후와 더불어 거란 본토로 끌려갔다.


그 뒤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의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았다. 그 뒤 사용한 이름은 거란이 내린 오로고(烏魯古)였으며, 왕후는 아리지(阿里只)였다. 이 이름은 《요사 遼史》 국어해(國語解)에는 야율아보기와 그의 왕후가 대인선으로부터 항복받을 때 탔던 말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대인선은 발해 제13대왕인 대현석(大玄錫)을 계승한 제14대왕으로만 알려져 내려왔다. 그러나 김육불<金毓이 《당회요 唐會要》에서 895년(乾寧 2) 10월 발해왕 대위해(大瑋)에게 칙서를 내린 기사를 찾아내게 되어 이 대위해를 현석왕을 계승한 제14대왕으로 하고, 대인선은 대위해를 계승한 제15대왕으로 고쳐야 한다는 것을 《발해국지장편》에서 밝힘으로써 결정이 되었다



발해가 쇠퇴할 무렵인 916년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족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중원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배후세력인 발해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925년 12월 말에 야율아보기는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하여 보름만인 그 이듬해 1월 15일에 멸망시켰다. 이때 발해는 귀족 간의 권력투쟁이 극심하였기 때문에 거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이로써 서기926년 15대 왕(대인선)을 마지막으로 230년간 지속된 발해의 역사는 끝이 났다.


거란은 발해고지(渤海故地)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거란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발해 유민은 곳곳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그것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발해유민 가운데 수만 명은 고려로 투항하여 한국사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의 주류를 이루었고,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현재 전하는 발해 귀족의 성씨 가운데 왕성(王姓)인 대씨(大氏) 다음으로 고구려계인 고씨(高氏)가 많았던 것에서 고구려유민이 지배층의 주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전하는 발해국서(渤海國書:일본에 보낸 발해의 외교문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고, 일본도 이를 인정하였다.


또 문왕은 스스로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고구려 왕실이 주장한 ‘천손(天孫)’을 일컫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그 유민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유민은 발해인과 여진인(女眞人)으로 각각 분리되었는데, 이 사실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상호융합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발해의 취약한 결집력은 발해가 거란에게 쉽게 멸망된 이유 중 하나이다.



<발해의 대외 관계>

 

 일반적으로 종래의 연구에서는 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적대적이거나 소원한 관계로 파악되어 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보다 능동적인 입장에서 그 관계가 검토되고 있다.


발해의 건국 당시 신라와 당의 관계는 옛 백제 지역의 통치 문제를 놓고 대립관계에 있었다. 반면 일본과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당과의 직접적 충돌과정에서 등장한 발해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여 신라와의 외교관계를 추진하였다. 즉 대조영은 700년경 신라 효소왕 9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러한 사정은 최치원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 5품인 대아찬의 질(秩)을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 있어서 신생국 발해에 대한 전성기 신라의 지위가 우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우호적 관계는 발해 무왕 대무예의 세력팽창으로 신라에 위협을 주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점차 대립양상을 뛰게 되었다.


聖德王 20년(721)에 신라가 북쪽 국경에 장성을 축조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정세를 추측할 수 있다. 또한 733년에 발해가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함에 따라, 당과 연합한 신라가 발해의 남변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신라는 적극적으로 당나라와 교섭을 한 반면 일본과의 외교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발해는 일본과 국교를 개시한 때이기도 하다.

이러한 국제관계를 고찰한다면, 발해와 신라의 관계가 그다지 우호적일 수 없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양국의 상호교섭은 활발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의 문왕 대흠무가 재위하던 8세기 중, 후기는 신라 사회가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던 때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이르러 발해와 신라는 상설 교통로가 개설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발해의 교통로 5개가 있었는데, 그 중 남해부(南海府)는 신라로 가는 길이었다.


5개의 교통로 중 하나가 신라로 가는 길이었다는 것은 양국의 상호왕래가 빈번하였음을 말해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양국의 사신 왕래가 빈번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발해의 멸망 >


 발해의 멸망은 당나라의 멸망과 시기를 같이 한다. 한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당의 흥망과 반비례함을 또한 알 수 있다.

당나라 초기에 거란은 8부(部)로 나뉘어 있었고, 당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이용하여 돌궐을 견제하였다.

측천무후 시기를 거쳐 안녹산의 난을 거치면서 거란은 차츰 원시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발전하였다.

마침내 10세기 초에 이르면 거란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걸출한 부족 수령이 출현하여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된다.


 916년, 마침내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내부의 각 부족을 통일하고, 많은 한인(漢人)들을 등용하여 강국으로 발돋움하였다.

중국을 점령하려는 원대한 뜻을 가진 그는, 중원이 쉽게 점령될 곳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즉, 대규모로 중원을 향해 침공해 들어가려면 후환을 없애야 했던 것이다. 그 후환이란 바로 서북쪽의 돌궐, 토번 등과 동쪽의 발해였다.

이에 거란은 먼저 서북쪽의 여러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점령하였는데, 924년경에는 서쪽 영토가 현재 중국의 감숙성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발해는 11대 대이진(大彛震)의 후기부터 마지막 왕인 15대 대인선에 이르기까지(840-926) 날로 쇠락해져갔다.


이 시기의 당나라는 농민반란과 군벌들의 계속된 전쟁으로 어지러웠다. 따라서 발해와의 관계도 차츰 소월해졌는데, 발해의 조공은 불과 4차례에 불과하였다.

이에 발해는 거란 세력의 위협에 맞서서 후량, 후당의 지원을 얻고자 이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발해는 이미 내부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당나라 장안성을 모방한 대규모의 건축공사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으며, 봉건 귀족들은 그들의 피땀 위에 향락과 사치를 일삼았다.


당나라와 교통이 어렵게 되었어도 일본과의 왕래는 계속되었는데, 이때의 교역품은 주로 금, 은, 보화 등 귀족들의 사치품들이었다. 이런 사회풍조는 결국 수십만 변방 군사들의 전투력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925년에 이르면 발해의 군, 관직의 주요 인사들이 백성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거란과 발해는 이미 924년부터 변방에서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925년 12월에 야율아보기는 서북 점령부족들의 병사를 이끌고 발해의 상경으로 진입하였다.


926년, 발해의 마지막 왕인 15대 대인선은 마침내 거란의 대군 앞에 무릅을 꿇었다.

이로써 대조영이 698년에 건국한 발해는 229년의 역사를 끝으로 종막을 고하였던 것이다.


거란은 발해지역에 '동쪽의 거란국'이란 뜻으로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발해의 옛 제도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유화정책을 썼다. 그러나 발해의 왕족들은 모두 거란 지역으로 이주시켰고,  2년 뒤인 928년에는 대량의 발해유민들을 심양 이남의 요동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 후로 약 200여년에 걸쳐 발해유민들은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에 흡수되기도 하였고, 일부는 지속적으로 고려로 망명하였다.


한편 일부 유민들은 후발해국,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등의 국가를 세워 거란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발해 부흥운동을 기도하였다.

그들의 투쟁은 일시적으로 거란의 통치를 흔들어놓기도 하였지만, 결국은 오래 가지 않고 진압되었다.

 

2.통일신라.

 

삼한은 기본적으로 한반도 중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연맹국가인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을 통칭해 이르는 말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이 삼국의 체제정비, 그러니까 온전한 형태의 국가가 성립되는 시기를 4~6세기로 잡고 있다. 그래서 당당히 '삼국'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이다. 세나라가 각각 나라의 형태를 만드는데 200여년이나 걸렸다고 보면 실제 그 이전의 삼한은 지금의 개념으로 보아 '국가'라 부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한을 따로 부족국가 내지는 연맹국가로 부르고 있다.

 

신라는 온전한 국가의 개념을 가진 상태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렸다.그래서 '삼한통일'이 아니라 '삼국통일'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건 지금의 학자들이 당시의 상황을 부르는 용어라 그 시절에는 어떻게 불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신라는 분명 '삼국'을 통일을 한 것이다.

 

또한 신라가 당을 끌어들인 것이 잘못이라면 호태왕 비문의 '400년에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신라를 치고, 광개토 왕이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격파했다.'는 기록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백제가 왜와 함께 그저 신라 국경선을 노략질 하려고 연합했을까. 당시를 지금의 민족 개념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다.

 

발해의 경우는 지금도 분명히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

 

또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전부 얻지 못했으니 진정한 통일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그럼 이건 어떨까.

명나라는 원의 전성기 시절의 영토를 모두 확보했었나?

그 절반도 얻지 못했다. 오히려 동서남북 사방에 이민족들이 산재해 있었다.

 

물론 신라는 당에 의존적 외교를 폈고, 결과적으로 고구려, 백제의 패망은 당의 강력한 군사력이 주원인이었다고 판단한다면 신라의 통일에는 부정적 견해도 있겠지만 그만큼 역사는 냉정한 시각으로 보는게 중요하다.

중국에서 영토확보를 위해 '동북공정'어쩌고를 연구하는데 여기에 맞서 너무 우파적인 역사관을 지니고 대응한다면 상대하기가 쉽지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고구려-백제-신라의 국가체제 정비가 4~6세기에 되었다면 그제서야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고 그 국가들의 영토를 장악했다면 분명히 삼'한'통일이 아니고 삼'국'통일인것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맞는다.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년의 기간을 상,중,하대중 중대신라시대로 구분하고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로 본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범상치 않았고  영특했다.  당나라  태종도  그를 보자마자  이렇게 감탄했다.
  " 호오, 성인의 기개가  서려 있구나 !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로잡을  원대한 뜻을  품었던  김춘추는앞서가는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앞장섰다.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여  이 나라를  앞서가는  나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인품과  외교 수완이  뛰어나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654년  진덕 여왕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법률을 제정하고,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군사 조직을  강화하는 등  본격적인 국가 체제를 확립하였다.  660년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켜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듬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군사를 일으켰으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백제의 옛 땅에 5도독부(五都督部)를 두고, 한편 신라에는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를 두어 문무왕(文武王)을 계림주 대도독에 임명하였다. 그 뒤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그 옛 땅에 9도독부(九都督府)를 둠과 동시에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반도 전체를 총괄케 했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욕을 신라로서는 감수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고구려 검모잠의 부흥군을 원조하여 당나라의 축출을 꾀하고, 또 백제 옛 땅에 군대를 출동시켜 당군을 각처에서 격파하였다. 671년(문무왕 11년) 신라는 결국 사비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김인문(金仁問)을 신라 왕에 임명하고 신라 정벌을 감행하였다.

675년 신라는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거머쥐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불교를 내세워 국민들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했다.(이때 원효 대사가 불교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신라 문화의 전통 위에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합하여 찬란한 민족 문화를 이룩하며 그 전성기를 맞는다.(불국사,석굴암,성덕 대왕 신종 등..)

이 시대에 무역왕인 장보고는 황해바다를 위협하는 중국의해적으로 부터 신라 백성들을 구하기위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중국해적으 무찔렀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중국-신라-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을 주도하여 신라인의 진취적 기상을 떨쳤다.

 

통일신라는 200여년동안 번영을 누렸으나 , 신라 귀족들의 왕위다툼으로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왕위다툼으로 신라왕실의 힘이 약해지자, 견훤이 후백제를 일으키고 뒤이어 궁예가 후고구려를 일으켰다. 우리나라가 다시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진 것이다

뒤이어 삼국으로 나뉘어진 이시가를 후삼국시대라고 한다

후고구려는 궁예의 포악한 정치로 왕건이 왕으로 즉위하고 나라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고려라고 바꾸었다. 이때 신라의 왕 경순왕이 신라를 고려에게 바쳐 고려는 우리나라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견훤의 아들들이 왕위다툼을 하자 견훤은 고려로 투항하였다. 왕건은 견훤을 내세워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다시 삼국을 통일한 고려로 된것이다

 

신라의 역대 왕] 

구분

왕명

별칭/이름/시호

재위기간

제1대

박혁거세

박혁거세거서간

BC57~AD4

제2대

남해왕

남해차차웅, 남해거서간

4~24

제3대

유리왕

노례이사금

24~57

제4대

탈해왕

탈해이사금

57~80

제5대

파사왕

파사이사금

80~112

제6대

지마왕

지마이사금, 지미왕

112~134

제7대

일성왕

일성이사금

134~154

제8대

아달라왕

아달라이사금

154~184

제9대

벌휴왕

벌휴이사금, 발휘왕

184~196

제10대

나해왕

 

196~230

제11대

조분왕

조분이사금, 제귀왕

230~247

제12대

첨해왕

첨해이사금

247~261

제13대

미추왕

미추이사금

262~284

제14대

유례왕

유례이사금

284~298

제15대

기림왕

기림이사금,기립왕

298~310

제16대

흘해왕

흘해이사금

310~356

제17대

내물왕

 내물마립간

356~402

제18대

실성왕

실성마립간

실금왕, 실주왕

402~417

제19대

눌지왕

눌지마립간

417~458

제20대

자비왕

자비마립간

458~479

제21대

소지왕

소지마립간, 조지마립간

479~500

제22대

지증왕

지증마립간, 지대로, 지도로, 지철로

500~514

제23대

법흥왕

 원종

514~540

제24대

진흥왕

삼맥종, 심맥부

540~576

제25대

진지왕

사륜, 금륜

576~579

제26대

진평왕

백정

579~632

제27대

선덕여왕

덕만, 성조황고

632~647

제28대

진덕여왕

승만

647~654

제29대

태종무열왕

무열왕, 춘추

654~661

제30대

문무왕

법민

661~681

제31대

신문왕

일초, 정명

681~692

제32대

효소왕

이공, 이홍

692~702

제33대

성덕왕

천중, 융기, 흥광

702~737

제34대

효성왕

승경

737~742

제35대

경덕왕

헌영

742~765

제36대

혜공왕

건운

765~780

제37대

선덕왕

양상

780~785

제38대

원성왕

경신

785~798

제39대

소성왕

준옹

798~800

제40대

애장왕

청명, 중희

800~809

제41대

헌덕왕

언승

809~826

제42대

흥덕왕

수종, 수승, 경휘

826~836

제43대

희강왕

제륭, 제옹

836~838

제44대

민애왕

838~839

제45대

신무왕

우징

839

제46대

문성왕

경응

839~857

제47대

헌안왕

의정, 우정

857~861

제48대

경문왕

응렴

861~875

제49대

헌강왕

875~886

제50대

정강왕

886~887

제51대

진성여왕

만, 원

887~897

제52대

효공왕

897~912

제53대

신덕왕

경휘

912~917

제54대

경명왕

승영

917~924

제55대

경애왕

위응

924~927

제56대

경순왕

927~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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