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11월29일.
★석탈해의 출현.
혁거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남해가 왕이 되었지만 이것은 혁거세의 뜻이 반영되어 왕이 된것이 아니라 6부의 협의에 따라서 왕이 된것같다. 즉, 남해라는 인물자체가 좋았지만 마한에서 혁거세가 죽은뒤 다시 왕을 보낼 것이 염려되서 왕을 세우는데 세습제인양 보이기 위해 남해가 왕이 된 것같다. 그리고 남해가 왕위에 오를때 혁거세와 알영 왕비는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는데 혁거세의 시신은 다섯 토막으로 잘려있었다고 하니 반란이 일어났었고 남해가 그뒤를 이었지만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게 있었다는 것이 짐작되어진다.
세습제가 확실히 자리매김 하게 된 시기는 내물왕때이다. 이전까지 석씨, 박씨의 주도의 왕권이 석씨가 완전히 소외되고 김씨 일변도로 변하는 시기가 내물왕때 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적자(嫡子)라고 적혀 있지만, 박혁거세기(朴赫居世紀)에 적혀 있는 은유법 문구에 의하면 남해차차웅은 석탈해와 연합하여 박혁거세로부터 왕위를 빼앗았으므로, 남해차차웅은 박혁거세의 적자가 아닐 수도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남해차차웅이 박혁거세의 적자로 적혀 있는 것은, 신라의 사가가 정변을 감추고 신라 왕통의 연속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그렇게 적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
남해의 이름 南海는 신라의 역사서가 쓰여 질때 불교의 영향으로 南海라는 불교식 이름을 가지게 된 것같다.
아마 원래의 이름은 나무(木)이었을 것이다,당시의 발음이 나매였으니 이 발음이 그대로 후대로 전승이 되다가 南海라 한것 같다.그당시엔 한자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남해차차웅기(南解次次雄紀) 7년조에는 석탈해(石脫解)를 대보(大補)로 임명하여 석탈해에게 군국정사를 모두 맡겼다고 적혀 있다. 이는 석탈해가 남해차차웅과 연합하여 박혁거세를 쫓아낸 공으로 대보(大補)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신라의 실권(實權)은 석탈해가 장악하였다.
그래서 남해의 치세24년중 14년은 6부 공화의 치세이고 나머지 10년은 탈해의 치세라 할수 있다.
석탈해는 혁거세거서간시절부터 등장하여 오랜동안 역사에서 등장하고있다.
석탈해는 어디서 왔고 누구인가?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가락국기>에서는 탈해이사금의 출자를 완하국이라 적어 놓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이라고 적으면서 동시에 정명국(正明國)이나 화하국(花廈國) 출신이라는 설도 제시해 놓았다. 그러면서 용성국의 위치를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리에 있다고 밝혀놓았다.
석탈해는 인도의 타밀인이 세운 촐라왕국에서 온 인도사람이다.
석탈해는 인도 남부 ‘촐라왕국’ 출신으로 추정된다. |
또 제3대 유리(儒理)왕이 죽어 서기 57년 석탈해가 왕위에 오르고 대보자리에 자신에게 집을 양도했던 ‘표주박(瓢)을 허리에 찬 호공(瓢公)’을 발탁했는데, 신라 1000년 역사에서 왕의 최측근인 대보(大補)라는 직위를 맡았던 사람은 오로지 이 두 사람뿐이며 두 사람은 매우 특수한 관계로 호공 또한 타밀 출신으로 추정된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족속과 성을 자세히 모른다. 본래 왜인으로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고 일컫는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호공에 대한 최초의 장면이자 그의 정체에 대한 설명의 전부인데 전형적인 왜인은 아니지만 아무튼 왜가 있는 지역에서 건너왔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박은 인도나 아프리카 등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며 타밀인은 기원전부터 뜨거운 날씨 때문에 목을 축이기 위해 허리에 표주박을 차고 다니는 습관이 있다.
약 2000년 전 막강한 선진 철기문화와 해상력을 갖춘 타밀인은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베트남과 중국 남부지역 등을 누비며 해상무역과 힌두교 전파에 주력하면서 타이완(臺灣) 위쪽에 흐르는 흑조(黑潮,쿠로시오)난류를 타고 일본에까지 도착했다.
두 역사서 모두 모두 석탈해의 출신지가 “왜의 동북쪽 1000리 (약 435㎞) 되는 곳” 이라고만 밝히고 있을 뿐인데 당시 왜가 규슈(九州) 북쪽을 가리켰다는 점에서 다파나국의 위치는 오늘날 교도현(京都縣) 부근으로 볼 수 있다. 1세기 후반 저술된 ‘한서(漢書)’ 지리지에 따르면 기원전 현재의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왜에는 100여 개의 소국이 있으며 통역관에 의해 한(漢)나라와 의사소통이 되는 곳이 30나라”라고 밝히고 있는 만큼 다파나국도 이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에 있던 타밀인의 집단 거주지를 석탈해가 자신의 고국 별명인 ‘다파나국’ 또는 ‘용성국’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
탈해이사금, 즉 석탈해가 완하국을 떠나 가야에 왔다는 사실은 흥미로우면서도 단순히 설화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도 탈해왕이 금관국, 즉 금관가야의 해변에 닿았다가 다시 신라로 가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사실은 이 설화가 단순한 설화로만 치부하기 힘들게 한다. 역사성을 부여한다면 석탈해 세력은 신라로 가서 권력층의 일부가 되기 전 가야에 먼저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과 탈해이사금의 조우와 대결에 대해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실존성에 대해 논란이 되곤 하지만, 역사적인 부분에서 해석하여 두 이주세력간의 대결을 설화화 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석탈해는 가야에서 김수로왕에게 밀려 신라로와 남해차차웅,유리이사금에게 영향력을 과시하다 결국 신라 제4대 왕(재위 57-80) 탈해이사금(脫解泥師今)에 이른다.이때 그의 나이는 62세다.
ㅡ한국민요/ C.Cheval!!!!ler 편곡ㅡ
코리안 심포니오케스트라/지휘 금난새
앨범:(1994) 조수미 - 새야 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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