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간추린 우리역사.-1

털보나그네 2010. 2. 20. 19:02

간추린 우리역사-1.

 (삼성조시대~열국분열시대)

 

세계는 지금 빠른 정보력과 통신,교통의 발달로 글로벌화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런 세계화시대에서 자국의 역사는 상당히 중요하다.

왜곡된 우리역사를 바로잡고 제대로 된 국사교과서를 만들어 우리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고 정신무장을 새롭게해서 세계화의 거센 파도에 대비해야 하지않을까?

 

☆삼성조시대.

 1.환(한,桓)국.-bc7199~bc3898.

환국은 지금으로부터 약 9200여 년 전에 건국되었는데 이 환국은 9명의 황제 12분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분국이란 연합국과 다른 말로 연합국이 서로 다른 나라가 힘을 합쳐 하나의 국가 연합체를 이룬 것이라면, 분국이란 개념은 하나의 독립적인 나라가 국가의 합리적인 통치를 위하여 나라를 나누어 다스린 것이 된다.

 

인류 최초의 국가 환국의 십이분국은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 사납아국, 선비이국, 수밀이국이다. 

 

 환국의 환인은 7대를 계승하였는데 그 분들의 이름은 초대 안파견 환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혁서 환인, 고시리 환인, 주우양 환인, 석제임 환인, 구을리 환인, 지위리 환인 이렇게 일곱 분이다.


그리고 그 일곱 분 환인천제께서는 하늘의 삼신상제님을 계승하여 하늘의 천국을 지상에 열었기 때문에 역시 하늘의 하느님이란 뜻의 천제라는 존칭을 제호 뒤에 붙여 부른다.

그래서 환인과 천제를 합쳐서 환인 천제라고 높여 부르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환인 천제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환국의 초대 임금인 환인 천제인 안파견 환인을 떠오르는데, 그 안파견 환인의 형제가 자신을 포함하여 아홉 분이다.

 

2.배달-bc3898~bc2333.

환국을 이은 것은 배달국임으로 우리는 배달국이 환국과 같이 신선 사회였음을 알 수가 있다. 환은 하늘광명이고, 배달은 밝달이니 그 줄임말은 한자로 단이며, 단은 땅의 광명을 뜻하니, 구분하여 환국은 천선시대이고, 배달국은 지선시대가 된다.

 

배달국 18대 환웅천황의 명호.

1. 거발환居發桓(환웅桓雄) 2. 거불리居佛理 3. 우야고右耶古 4. 모사라慕士羅. 5. 태우의太虞儀 6. 다의발多儀發 7. 거연居連 8. 안부련安夫連 9. 양운養雲 10. 갈고葛古(갈태葛台, 독로한瀆盧韓) 11. 거야발居耶發 12. 주무신州武愼 13. 사와라斯瓦羅 14. 자오지慈烏支(치우蚩尤) 15. 치액특蚩額特 16. 축다리祝多利 17. 혁다세赫多世 18. 거불단居弗檀(단웅檀雄)

 

 

3.단군조선-bc2333~bc238.

단군조선은 나라 땅이 넓어 단군조선을 셋으로 분리했다.이른바 삼한 관경이다.

삼한관경은 고조선을 번한,마한,진한으로 나눈 것인데 진한은 단군천황이 직접 다스리고 번한과 마한은 소단군 또는 부단군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한이란 사람이 밝다는 뜻이다. 또한 통치자를 마한, 진한, 번한의 삼한이라 불렀으니 한이란 군주 통치자란 뜻이다. 그러므로 단군은 조선을 황제의 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름하여 군도이다. 때문에 단군의 군은 군도를 뜻한다.


여기에서 우리민족은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그리고 환인, 환웅, 단군 시대로부터 하늘과 땅과 사람의 광명을 뜻하는 말로 나라의 국호와 통치자의 관직명을 삼았음을 알 수 있다.

 

환국,배달,조선 이 시대를 삼성조시대라고 한다.

삼성조 시대에는 삼신상제께 천제를 지내며 가르침을 받드는 것으로 나라의 국통을 삼으셨다.

 한민족 정신의 뿌리는 바로 삼신이다. 한민족 정신의 근원에는 삼신이 있고, 환국 배달 조선의 삼성조 시대는 철저하게 삼신일체 상제 신앙을 문명의 바탕으로 삼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도의 기틀을 세운 역사였다.

 

☆열국분열시대.

 

1.북부여(태양이 다스린 나라).-bc239~bc58.                                     

북부여의 황실은 결론적으로 태양의 제국이었다. 부여란 그 이름이 먼동이 부옇게 밝아오는 것을 뜻한다. 초대 단군성조께서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부루, 부우, 부소, 부여가 그들이다. 그 중 막내가 부여인데 이 부여가 동방의 문명을 크게 일으켰으므로, 그 명성에 의거하여 단군조선 44대 구물 단군은 그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고쳤고, 해모수가 다시 북부여를 건국함으로서 그 부여의 이름이 계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북부여 황실의 제호를 연구해 보면 역대 황제의 이름이 모두 태양을 상징함을 엿볼 수 있다.

북부여의 개국시조 5세 고두막高豆莫(두막루豆莫婁), 6세 고무서高無胥의 제호 역시 ‘하늘의 해, 태양’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틀림 없음은 고두막한이 처음 개국을 선포한 나라 이름에서 알 수 있다. 그 이름이 바로 ‘동명東明’이다. 동명이란 동쪽의 광명을 뜻한다. 천지에 새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광명, 일출하는 해를 바로 동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옛적 세웠던 모든 나라 이름은 모두가 동방의 광명을 상징하였다. ‘환국, 배달, 조선, 부여, 고구려, 대한’ 모두가 새벽 하늘을 찬란하게 수놓는 동방에 떠오르는 광명을 뜻한다. 그리고 역대 제왕들은 그 자신과 조상의 제호로서 하늘의 제왕인 태양으로 삼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2.남삼한.-bc194~bc8.

삼신일체 신앙에 의거하여 진한,변한,마한이 한나라를 형성하는 삼한이 있었다.

편리상 단군조선시대를 북삼한,열국분열시대의 삼한을 남삼한이라고 칭한다.

 삼한은 상고시대(上古時代)에 한반도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3부족사회(三部族社會) 즉,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말한다. 본래 이 지역에는 목지국(目支國)의 군장(君長:보통 辰王이라고 하며 마한 시대에는 臣智라 하였다)의 세력하에 진국(辰國)이라는 부락연맹체(部落聯盟體)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중심지는 지금의 충남 천안(天安)인 직산(稷山)지방이었다. 그리고 당시 북쪽에 위치하였던 위씨조선(衛氏朝鮮)은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 한무제(漢武帝)의 침략을 받아 붕괴되고(B.C 108년) 그 땅에 한의 군현(소위 漢四郡)이 설치됨에 따라 한족(漢族)의 세력과 문화가 크게 흘러 들어왔다.


진국의 동북계(東北界) 지역에는 일찍부터 북쪽 나라에서 남하 이주한 사람들로 형성된 집단사회가 있었다.

이와 같은 외래의 정치적 세력과 문화는 한의 군현과 이웃한 고대 한민족의 여러 부족국가 또는 부락국가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주었던 것인데, 이 무렵에 이르러 남쪽 진국은 그의 지리적 환경에 따라 마한.진한.변한 등 삼한으로 변하였다.


기자조선 마지막 임금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겨 남으로 망명하여 정주한 곳도 이 고장이다. 이 이류민(移流民)의 사회는 준왕 이래로 스스로 한(韓)이라 부르며 목지국의 우두머리인 진왕(辰王)의 보호와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낙랑(樂浪)의 한인(漢人)들은 이를 진한(辰韓)이라 불렀다. 그 뒤 한(韓)의 칭호는 점점 확대되어 진왕을 맹주로 받드는 모든 소국(小國)에 대해서도 한(韓)의 칭호를 붙이게 되었다.


이리하여 후한(後漢) 말 대방군(帶方郡)이 새로 설치될 무렵에는 진한과 아울러 마한(馬韓)·변한(弁韓)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게 되었다.

마한의 마(馬)는 본래 족명(族名)인 개마(蓋馬)에서 온 것이라 하며, 변한의 변(弁)은 그들이 사용한 관모(冠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위지(魏志)》 및 《후한서(後漢書)》 등은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다고 그 위치를 적고 있다. 그러므로 마한은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진한은 지금의 경상남북도, 변한은 낙동강 유역에서 전라남도의 동부에 이르는 지방으로 보는 것이다.


삼한 지역 내에 분포된 소국(부족국가)들의 수와 그 위치 및 그들의 최고 맹주인 진왕과의 관계를 보면 《위지》를 근거로 하여 엮은 《후한서》에는 마한에는 목지국(충남 천안)을 중심으로 54국, 진한에는 사로국(경북 경주)을 중심으로 12국, 변한에는 구야국(경남 김해)을 중심으로 12국이 있다고 하였으나 그 숫자에 대해서는 고증이 구구하여 아직 결론이 나 있지 않다. 그러나 우선 《위지》 중 <마한조(馬韓條)>를 보면 거기에 나오는 50여 개국은 진한 ·마한 두 지역의 국읍(國邑)을 한데 묶어 열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들 50여 국은 목지국의 진왕을 최고 맹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정치적으로 하나의 큰 연합체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국(國)은 한 부족의 거주지역을 뜻하는 말로, 그 영역과 인구가 낙랑(樂浪) ·대방(帶方) 등 한 군현(郡縣)의 1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대국(大國:목지국과 같은 것)이 1만여 가(家), 소국이 수천 가(家)라 하고 이들 50여 국의 총 호수가 10여 만 호라 하였는데, 이 호(戶)란 혈연적인 가부장제(家父長制)의 공동체였다.

 

 3.최씨낙랑국-bc195~ad37.

 낙랑국은 북부여기와 삼국사기에만 기록이 확인되고 중국사서나 기타 사서에서 전혀 그 기록을 발견할 수가 없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북부여기에 있는 최숭왕은 BC 195년이고 삼국사기에 있는 최리왕은 AD32의 내용이다

즉 낙랑왕국은 고구려에 병합될 때까지(AD32년 : 삼국사기) 적어도 200년이상 존재한 나라로 추정 된다.

 

낙랑국의 위치를 보면 낙랑국은 옥저의 주변국가이던가 아니면 낙랑국내에 옥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낙랑국은 고구려 동쪽에 위치했고 낙랑군의 고구려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여러 중국사서에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낙랑군은 창해군의 서쪽, 즉 북평의 서쪽(고죽국-낙랑군-북평)으로써 현 중국의 하북성과 산동성으로 추정되며 낙랑국은 만주의 동부와 한반도로 추정 된다

 

 4.동옥저.-

지금의 함흥에서 두만강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던 고대의 정치집단. 함흥 일대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집단을 동옥저라 하고, 두만강유역의 집단을 북옥저라고 했다. 보통 옥저라고 할 때에는 동옥저를 가리킨다. 옥저란 말은 '삼림(森林)'이란 뜻의 만주어 '웨지'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며, 원래 예의 일부였던 부조가 성장해 옥저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옥저는 북으로는 읍루.부여, 남으로는 동예와 접해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3세기 전반에 옥저 가구수는 5천여 호였고, 그 거주지역은 해안을 따라 동북 방향으로 1천 리 정도나 되었다.


 옥저의 읍락들은 처음에 모두 고조선에 예속되어 있었다. 기원전 108년에 한의 침략으로 고조선이 망한 뒤에는 한사군의 하나였던 현도군에 속하게 되었다. 기원전 75년에 고구려의 저항으로 현도군이 요하유역으로 쫓겨가자 동옥저는 낙랑국에 귀속되었고, 결국에는 태조왕 이해 팽창정책을 편 고구려를 토벌할 때 읍락이 모두 파괴되고 3천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옥저는 임둔(臨屯)의 옛 땅인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 소관인 부조현(夫租縣)의 후신으로 지금의 함흥 일대를 중심으로 하였는데, 30년 낙랑동부도위가 철폐되면서 56년경 고구려에 신속(臣屬)하게 되었다.


 

정치 형태는 왕이 없고 총 5,000에 이르는 호(戶)를 여러 읍락(邑落:共同體)으로 나누어 각 읍락에서 스스로 삼로(三老)라 일컫는 거수(渠帥)가 있어 하호(下戶)를 다스렸고 각 삼로 위에는 맹주(盟主)인 현후(縣侯)가 군림하였다. 고구려가 옥저를 복속시킨 다음 토착대인(土着大人:두목)을 두고 사자(使者:고구려 官職)로 삼아서 주관하게 하고, 본국의 대가(大加:部族長)로 하여금 조부(租賦)를 징수하는 총책임을 맡게 하였다. 따라서 옥저인들은 조세(租稅)와 초포(貂布:담비 가죽) ·어염(魚鹽), 기타 해산물을 멀리 운반하여 고구려에 공급하였다.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이 발달되어 오곡이 풍부하고 어염 등 해산물이 많아 생활조건이 좋았으나 고구려에 많이 수탈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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