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어떤 나라인가?(1)
2009년11월22일.
요즘 MBC방송에서 월화드라마로 선덕여왕이 방영되고 있어 재미있게 보고있다.
드라마를 보다가 신라에는 화랑제도가 있고,골품제도가 있는것이 다르고, 삼한을 통일하려는 꿈을 오래전부터 꾸었던 흔적을 볼 수 있었다.그들이 무엇이길래 삼한을 통일하려고 했을까?의문이 생겨 그 뿌리를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았다.
★박혁거세
박혁거세는 단군조선의 종실의 외손으로서 북부여 서쪽 방어장인 거서간의 아들인것으로 추측된다.
박혁거세의 아버지는 미상인데, 서기전108년부터 서기전70년까지 북부여와 한나라와의 국제정세로 보면 아마도 한나라 군사와 전쟁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거서간(居西干)이라는 말은 서쪽에 머무는 간(干)이라는 뜻이므로 박혁거세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서쪽을 지키던 간(干)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간은 단지 방어장이며 군사권을 가진 왕과는 차별이 있는데, 나중에 신라도 병권을 부리는 왕의 제도가 이루어진다.
斯盧 (사로,신라의 전신)의 始王(시왕)은 仙桃山(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만주)夫餘帝室(부여 제실:공주)의 딸 婆蘇(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嫩水(눈수:만주중부지방에 있는 강)로부터 도망쳐 東沃沮(동옥저:오늘날 함경남도 동해안)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 가까운 해안의 辰韓(진한)의 奈乙村(나을촌)에 와 닿았다. 이때 蘇伐都利(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데려다 집에서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이에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居世干(거세간)으로 삼고, 도읍 徐羅伐(서라벌)을 세우고 나라를 辰韓(진한)이라 칭하고, 또한 斯盧(사로)라고도 하였다.
파소는 고두막한의 아들인 고무서의 딸이다. 고무서는 딸이 셋 있었는데, 첫째딸이 바로 파소로 추정되고, 둘째딸은 소서노로서 고주몽의 둘째 부인이며, 셋째딸은 아직 미상이다.
파소를 선도산 성모라고 부른다. 신라 화랑제도에서 처음에는 여성인 원화가 있었는데 이는 바로 박혁거세의 어머니처럼 여성 수련집단이 존재했던 것 같다. 박혁거세의 박은 박달(단. 檀)이라는 말에서 딴 것이므로 혁거세는 바로 북부여 단군의 후손으로서 외손이 됨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신라의 기원이 되는 진한6촌의 왕에 추대된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를 지니고 있다. 나정우물에 표주박 모양의 알이 있었고, 왕만이 탈 수 있는 용마가 무릎을 꿇고 지켰다는 것은 박혁거세가 왕의 혈통임을 증명해 준다.
고무서의 딸 파소와 고우루 단군의 자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혁거세가 세운 나라가 바로 신라다.
★진한의 후예.
본래 진한의 뿌리는 북진한이니 지금의 만주 일대다. 이 진한의 주민들이 훗날 남쪽 마한 땅에 정착하였으니 이를 일러 남진한이라 한다. 이 남진한은 지금의 경상도 일대다.
이 남진한이 형성된 계기는 북부여 제2대 모수리 단군 정미 원년(BCE 193년)에 도적 위만(衛滿)이 북번한을 강탈하면서 부터다. 이 때 번한(番韓)의 상장군 탁(卓)이 남쪽 마한(馬韓) 땅에 중마한(中馬韓)을 세워 스스로 임금이 되고, 변한(弁韓), 진한(辰韓)이 백리의 땅을 봉함 받았으니, 이것이 곧 남변한, 남진한이다.
이 남진한은 이 때 북진한 출신 백성들 중심으로 세워진 이래, 고우루 단군 3년 계해(BCE 118년)에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의 침략을 받아 북진한의 영토인 해성(海城) 이북 50리의 땅을 점령당했을 때, 이곳에 사는 진한의 백성들이 남진한으로 대대적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이 땅 남진한은 전 북부여의 황실에 대한 향수가 강하였을 터이니, 유약했지만 인정 많았던 고우루 단군의 핏줄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할 것이다.
이제 파소는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였던 한무제(漢武帝)를 격퇴한 한민족의 불세출의 영웅인 후북부여 단군 고두막의 딸이자, 고우루의 혈통을 임신한 까닭으로, 이곳 남진한에서 크게 환영받게 된다.
이곳에서 출생한 혁거세는 그 나이 13세에 진왕에 올랐으니, 그 새로 고친 나라 이름은 사로국(斯盧國)이다. 혁거세가 전통적으로 삼한(三韓)의 중심을 뜻하는 진한(辰韓)의 이름을 버리고 감히 사로국이라 한 까닭은 다름 아닌 그 아버지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바로 고사로(高斯盧)였음으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로국’이라 한 것이다.
만일 혁거세가 나라 이름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아버지 없는 제왕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파소와 혁거세의 미래를 훤히 내다보았던 것은‘고두막(高豆莫)’이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고두막의 심려원모한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두막한은 전북부여 황실을 격하하여 제후로 삼았듯이, 그 전북부여의 직계 혈통 또한 자신의 제후로 삼아, 반독립적인 상태로 남아있던 중마한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제 세월이 흐르고 흘러 파소가 도망친 지 11년 후인 임술년(壬戌年)(BCE 59년)에 고무서가 6대 단군에 올랐을 때 마침 고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에 이르고, 그 일 년 후인 계해년(癸亥年)에 고무서(高無胥) 단군이 아들이 없는 까닭으로 이제 막 사위로 삼은 고주몽에게 보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로서 고주몽은 북부여의 제 7대 단군이자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그리고 그 일 년 후인 갑자년(甲子年)(BCE 58년)에 혁거세는 사로의 시왕이 된다.
대저 신라(新羅)가 유독 동명제(東明帝)를 받들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파소는 아버지 고무서의 딸에 대한 뜨거운 마음, 그 애끓는 애정을 몰랐다.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지아비인 고사로를 덧없이 죽음에 이르게 한 원망을 오직 아버지에게 돌렸다
★신라의 뿌리는 사로국
최근 경북 경주시 고속철도공사 현장에서 2000점이 넘는 유물과 무덤 235기가 한꺼번에 발견됐다. 유적에서는 1-3세기 “사로국”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주거지, 마차 바퀴 흔적이 보이는 도로, 호랑이 모양 대구(허리띠 버클), 오리 모양 토기 등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약 1800년 전 경주 일대에서는 “사로국” 이라는 조그만 나라가 있었다. 진한 변한 마한 중 진한에 속한 12개 소국 가운데 하나였던 사로국은 훗날 “신라”의 모체가 된다.
어느날 사로국 여섯 촌장이 모여 나라를 다스릴 군장을 추대하려 의논하는데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흰 말이 무릎을 끓고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말은 온데간데 없고 자줏빛 커다란 알이 있었는데 이 알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하여 성은 “박”, 세상을 밝게한다 하여 이름은 “혁거세”, 이것이 신라 시조 박혁거세 탄생설화다.
훗날 삼국을 통일하는 신라는 박혁거세와 사로국 6촌장이 연합해 세운 나라다. 사로국은 3세기 중반부터 주변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며 진한 지역에서 맹주가 됐다. 280년에는 사로국왕이 진한 대표로 중국 진(晉)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그리고 503년 지증왕 대 나라 이름을 신라로 바꿨다.
사로국은 경주 충적평야에 있었으며 급량(及梁)·사량(沙梁)·본피(本彼)·모량(牟梁)·한지(漢祗)·습비(習比) 등 6개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후에 사로 6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혁거세거서간(박혁거세)이 즉위했다.
사라(斯羅)·신라(新羅)·사로(斯盧)·시라(尸羅)·신로(新盧) 등으로 표기했다.
사로6촌을 사로6부로 고치면서 성을 내렸는데 6부는 양부(梁部)는 이씨, 사량부(沙梁部)는 최씨, 모량부(牟梁部)는 정씨, 본피부(本彼部)는 손씨, 한기부(漢岐部)는 배씨, 습비부(習比部)는 설씨를 내렸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알천양산촌 |
돌산고허촌 |
취산진지촌 |
무산대수촌 |
금산가리촌 |
명활산고야촌 |
양부 |
사량부 |
모량부 |
본피부 |
한기부 |
습비부 |
이(李) |
최(崔) |
정(鄭) |
손(孫) |
배(裵) |
설(薛) |
고조선 유민이 산곡간에 흩어져 살면서 형성한 6마을의 왕으로 추대받아 13세에 신라의 시조간 된 혁거세는 왕호를 거서간이라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bc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 탄생하던 해 어느 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閼英井) 가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일며 큰 계룡(鷄龍:머리는 닭처럼 생기고 몸은 뱀처럼 생긴 용)이 나타난 것이다.
계룡은 샘 가에서 꼬리를 흔들며 괴롭게 몸부림치더니 왼쪽 옆구리에서 한 옥동녀(玉童女)를 낳아 놓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부근에 사는 한 할머니가 이 광경을 보고 달려와서 아기를 보자기에 싸 안았다.
아기는 용모가 단정하고 예쁘게 생겼으나, 입만은 어머니 계룡을 닮아 닭부리처럼 뾰족하게 나와 있었다. 할머니는 아기를 안고, 월성(月城) 북쪽으로 흐르는 알천(지금의 북천)에 가서 얼굴을 씻어 주었는데, 이상하게도 알천 물이 아기 입술에 닿자 뾰조하던 부리는 떨어져 나가고, 비로소 완전한 여자아이가 되었다.
용의 몸에서 태어난 이 아기를 할머니는 거룩하게 여겨 집에 데려다가 정성스럽게 키웠다. 아기 이름은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이라 불렀는데 알영 아가씨는 자라면서 용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어질고 지혜로웠다.
박혁거세 거서간이 즉위(卽位)하신 후 5년이 되던 해(기원전 53년)여러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 알영 아가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알영 왕비는 나라의 국모로써 거서간을 잘 도왔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임금과 왕비를 성인으로 받들었다. 왕비가 탄생한 알영정은 경주시 탑동 오릉 내에 지금도 남아 있다.
박혁거세는 알영부인과 함께 6부를 두루 돌면서 백성에게 농잠을 권면하여 생산의 증가에 힘썼다.
BC 39년에는 변한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고, BC 37년에는,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는데 쇠같이 단단하다 하여 쇠울이라 하였으며 5년후에는 궁궐을 크게 지어 비로서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
혁거세는 재위 62년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혁거세의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고자 하였으나 커다란 뱀 한마리가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양 다리, 양 팔, 몸통, 얼굴을 따로 묻었다.
그리하여 혁거세의 무덤은 다섯 개가 되었고 그 무덤들을 가리켜 오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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