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대중음악가 '김정호'
출 생 : 1952년 3월 27일 (전남 광주)
사 망 : 1985년 11월 29일
학 력 : 미확인
직 업 : 국내가수
데뷔 1973년 <이름 모를 소녀>
대표곡 : <작은새><사랑의 진실><하얀 나비><잊으리라>
<사랑의 진실><저별과 달은><님>
● 그의 이야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은
판소리 명가였던 외가에서 물려받아
52년 3월, 본명이 조영호인 김정호는 전남광주에서 부친 '조재영'과 모친 '박숙자'의 2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여수경찰서장을 지내고 출판사를 경영했으며, 모친은 <동일창극> 단원으로 명창 김소희와 함께 활동했던 창의 명인으로 유명했다.
음악적 재능은 외가쪽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모친과 함께 6ㆍ25동란중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외조부 '박동신'은 우리 국악의 거인이었다. 인간문화재 '김동준', 국립창극단장 '박우성' 등이 그의 제자이며 <보국가> <유관순전> <해방가> 등 판소리 창작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국립국악원 수석단원으로 아쟁을 연주했고 서울예전과 전남대 등에서 국악후진양성에 몰두한 '박종선'이 외삼촌이다. 외삼촌 아쟁소리는 그의 음악적 관심의 뿌리이자 시작이었다.
그는 음악적 욕구가 꿈틀거리자 학업까지 포기하고 기타 배우기에 빠져들었다. 이때 찾아간 사람이 <삼청동의 기타박사>라 불리던 '이생회' 선생이었다. 집을 뛰쳐나와 우이동에 골방을 얻어 두문불출하며 온종일 기타와 씨름을 했다.
당시는 통기타가 아닌 <지미 핸드릭스><산타><비틀즈>등 비트강한 록사운드에 대한 관심에 지대하였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노력으로 곧 만만치 않은 기타주법을 익혀 외국록그룹들의 레퍼토리를 제법 맛깔나게 연주할 만큼 진전이 빨랐다.
음악적 야망과 화려한 데뷔
"우리, 음악으로 세상에서 1등 한번 해보자"
70년대초, 북한산에서 임창제등과 미8군에 출연하던 '이상일'을 음악스승으로 모시며 연주에 온 힘을 쏟았다. '임창제'는 이 당시 김정호가 믿고 의지했던 절친한 음악의 형제였다. 이들은 '음악과 결혼했다'고 할만큼 음악적 야망을 함께 키워갔다.
임창제는 "우리가 다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어보면 정호는 늘 기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남에게 조금이라도 기타실력이 뒤진다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극복하고 마는 완벽주의 스타일이었다. 당시 북한산 등성이에 앉아 밤하늘 별을 바라보며 '공부도 많이 못해 무식한 우리가 음악으로 세상에서 1등을 한번 해보자'며 새끼손가락을 걸며 맹세하던 생각이 난다"고 했다.
<스킬보이스>라는 록그룹을 결성하며 미8군 무대로 진출한 '임창제'가 '이수영'과 함께 듀엣 <어니언스>로 데뷔하려하자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던 김정호는 작곡한 노래를 선물로 주었다. <어니언스>의 데뷔앨범속에 수록된 김정호의 곡들은 두사람 합의하에 임창제 이름으로 먼저 발표를 했다.
히트를 하게 되면 그때가서 '이곡들은 김정호가 만든곡들'이라고 깜짝발표를 하고 '김정호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질 때 데뷔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의리있는 임창제는 대표곡 <작은새>외에도 <사랑의 진실><외기러기><저별과 달을> 등 모든 곡들이 대히트를 하자 약속대로 KBS라디오방송에서 사실을 발표하였다.
'김정호가 누구냐'는 대중들의 궁금증이 더해 갈 때에, 임창제의 손에 이끌려 73년 <이름모를 소녀>라는 데뷔곡으로 그는 대중들앞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70년대를 풍미하며 지대한 음악적 영향력을 끼친 천재 대중음악가의 등장이었다.
<어니언스>의 히트곡 <사랑의 진실><작은 새>의 진짜 주인공이 밝혀지자, 미8군무대에서 기타를 치며 <사월과 오월> 멤버로 잠시 활동을 하던 김정호는 TBC방송 '신광철' PD에 의해 <패티킴의 스페셜프로>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미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가수왕으로 등극하며 솔로데뷔를 꿈꾸던 '조용필'과 함께 '김정호'의 동반 게스트 초청은 파격이었다. 폭발적인 반응속에 두사람은 대중들속으로 탄탄한 첫발을 내딛었다.
<이름모를 소녀>는
오랜 세월 애태웠던 짝사랑의 흔적
우이동 시절부터 김정호의 음악성을 인정해온 기독교방송 '김진성' PD는 데뷔곡 <이름모를 소녀>를 듣고, '한국의 모짜르트 탄생'이라고 극찬했다. <이름모를 소녀>는 부인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하면서 품었던 회한을 담은 노래였다.
교동초등학교 선배의 사촌동생이었던 부인은 김정호가 중학시절부터 오랜 세월을 홀로 애태웠던 평생의 반려자였다. 자신의 일상적 음악생활을 이야기하는 연애편지를 하루에도 수차례 보내고 용기를 내 집으로 찾아갔다.
보수적인 그녀의 어머니는 직업도 불안정하고 음악을 한다는 김정호를 미덥지 못해 하였다. 그러나 순수한 심성의 사촌오빠 후배가 싫지않았던 이영희는, 74년 늦봄 <쉘브르>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김정호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3년간의 열애를 하였고, 77년 반포의 17평 주공아파트에 둥지를 틀어 쌍둥이 딸 '정숙'과 '정운'을 얻었다. 12번씩이나 이사를 거듭할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작은 가슴으로 큰 족적 남긴 藝人
거듭된 고난과 시련도 '음악혼'을 잠재우지 못해
75년, 인기정상이었던 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음악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마초는 자신의 노래 <작은 새>처럼 좌절과 방황의 견디기 힘든 고행의 길을 걷게 했다.
매니저 '이상기'와 친형처럼 김정호를 보살피던 '최무성'은 경제적 이중고까지 겪는 그를 위해 76.10월 무교동에 있는 <꽃잎>이라는 생음악 레스토랑을 맡겼다. 83년 재개발로 헐릴때까지 <꽃잎>은 유일한 그의 노래무대였다.
그러나 그는 좌절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한달중 20여일은 한적한 남이섬이나 우이동 <월벽산장>에 칩거하며 꺼져가는 음악혼에 불을 지폈다.
77년, 방위소집으로 군복무를 마칠무렵 함께 활동이 금지되었던 '하남석'과 국악리듬에 <어쿼스틱 기타>와 <신디 사이저>를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80년 3월, 5년만에 대마초 망령에서 벗어난 김정호는 재기앨범 <인생>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해금의 달콤함도 잠깐, 인천 바닷가에 위치한 결핵요양소에 입원하여야만 했다. 오랜 정신적 고통과의 싸움에 지쳐 만신창이가 된 심신 때문이었다.
"과거의 화려했던 때에는 흥미가 없다. 인기보다는 마음에 있는 좋은 노래를 불러서 남기고 싶다"던 김정호는, 일년이상의 치료를 해야했지만 결핵균보다 더 강하게 꿈틀거리는 음악적 열정 때문에 4개월만에 요양원을 뛰쳐나와야 했다.
82년, 다큐멘터리 음악에 빠져있던 <뚜아에 무아> 출신 '이필원'과 가까워지며 신디사이저로 창출하는 환상적 음악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음악적 열정이 꿈틀거리자 김정호는 금식기도와 산상기도에 매달리며 살고 싶은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83년 11월, 이필원이 직접 디자인한 <님>은 김정호의 국악적 감성이 배여있는 눈물겨운 음반이다. 외삼촌의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하려 아쟁, 가야금, 꽹과리를 직접 두둘기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혼을 담아내려 하였다.
한스런 탄식의 이미지를 담은 노래가 <님>이다.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한듯 상여가락을 연상시키는 선율이었다. 머리가 쭈삣 서는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님>은 그야말로 온몸을 불사른 김정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또한 수록곡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는 요양원 시절 송도해변을 걷는 여인에게서 느낀 슬픔의 이미지를 뽑아낸 히트곡이다. 이 앨범은 숨쉬기조차 힘들어 5개월의 최장시간 녹음을 해야만 했던 그의 유작앨범이다.
85년 11월 29일, 33세의 천재음악가 김정호는 50여곡의 주옥같은 곡을 남긴채 세상을 등졌다. 너무도 사랑했던 부인에게 '고생시켜 미안해'라는 유언만을 남기고, 흰눈이 내리던 날 경기도 고양의 <기독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故 김정호는 행복한 가수다
가요사상 추모공연을 세번 헌사받은 가수는 그뿐이다
첫 추모공연은 86년 5월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렸다. 1주기에 맞춰 송창식, 김현식, 윤시내, 하남석, 이정선 등 18명의 동료 및 선후배가 참여해 추모음반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 음반은 가요 사상 최초의 헌정앨범으로 KBS로부터 음반 기획상을 수상했다.
17년후인 2003년 11월 그리운 팬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억수 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 명동 서울YWCA에서 두 번째 추모공연이 열렸다. 두 번째 헌정음반도 탄생했다. 두 장의 헌정음반 또한 전무한 일이다.
그리고, 2006년 11월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그의 세번째 추모공연이 열렸다. 백순진, 최백호, 홍민, 장은아, 김세화, 채은옥, 김소연, 김광석, 김은영, 그리고 라일밴드가 그의 노래메신저가 되었다.
대중가수의 죽음은 곧 대중의 기억에서 삭제됨을 의미한다. 유행에 민감한 대중문화는 현재 혹은 미래지향적 성격이 강하다. 수많은 가수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추모공연이 열렸던 가수는 김정호를 비롯해 김현식, 유재하, 김광석 정도밖에 없다.
故 김정호, 그는 비록 갔지만 그래서 행복한 가수다.
<<이글은 어느 블러그에서 옴겨온 글입니다.>>
01- 이름모를 소녀
02-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03- 그날
04- 꽃잎
05- 꿈속의 사랑
06- 나그네
07- 나는 가야해
08- 날이갈수록
09- 눈동자
10- 님
11- 달맞이 꽃
12- 무정한 사람
13- 별리
14- 봄 여름 가을 겨울
15- 빗속을 둘이서
16- 사랑의 진실
17- 사의 찬미
18- 외기러기
19- 외길
20- 잊으리라
21- 저 별과 달을
23- 하얀나비
24- 행복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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