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명상음악 1 집 - 김영월, 왕준기)
우연히 찾아 본 강희맹선생 묘역.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하상1동 산2
경기기념물 제87호
[蓮城門(연성문)]
묘역 입구에는 선생의 齋舍(재사)인
蓮城齋(연성재, 1965년 건립)가 있다.
묘역 앞에는 荷池谷(하지골, 연꽃 연못의 뜻)이란 마을이 있었다가
1996년에 폐동된 뒤 1999년에 대단위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자 하지골의
뜻을 지닌 연꽃마을로 명명되었다
姜希孟(강희맹,1424~1483)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농학자로
자는 景醇(경순), 호는 私淑齋(사숙재), 菊塢(국오), 萬松岡(만송강),
雲松居士(운송거사), 無爲子(무위자)이며, 본관은 晉州(진주)이다.
세종의 姨姪(이질)이시며, 화가 希顔(희안)의 동생이다.
세종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처
左贊成(좌찬성)등을 역임했다.
저서에 '私淑齋集(사숙재집)', '村談解이(촌담해이)',
'衿陽雜錄(금양잡록)', '四時纂要抄(사시찬요초)' 등이 있고,
시호는 文良(문량)이다.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서 經史(경사)와 典故(전고)에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맡은 일은 완벽하게 처리하면서도 겸손하여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한다.
관인적 취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사회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던
민요나 설화에도 남다른 식견으로 官人文學(관인문학)의 틀을 스스로
깨뜨려 버리는 면도 있었다.
이런 예는 당시 농정의 실상과 농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農謳十四章(농구십사장)'에 잘 나타나 있다.
비석군을 지나면 정면에 강희맹선생 신도비와 삼단의 묘역이 보이는데
중앙에 조성된 묘(계단을 오르면)가 강희맹선생의 묘이다.
神道碑(신도비) 오른쪽 묘역]
묘역 주변에는 선생의 養父(양부)인
姜順德(강순덕, 1398~1459 이숙번의 사위. 사헌부 감찰) 묘를 비롯하여,
선생의 백씨 姜希顔(강희안, 1418~1464 인수부윤) 묘,
선생의 장남 姜龜孫(강구손, 1450~1505, 우의정) 묘,
손 姜台壽(강태수, 1479~1526 순천부사) 묘,
증손 姜復(강복, 1508~1529, 충좌위 부사용) 묘,
고손 姜克誠(강극성, 1526~1576 장단부사) 묘 등이 있다.
위에서 부터 아래로 차례대로 도사공 선경 묘, 부사공 태수 묘
사용공 복 묘, 부사용공 석리 묘이다.
[神道碑閣(신도비각)]
신도비는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2단의 기단석 위에 비신을 세워 놓았다.
기단석 사방에는 蓮瓣文(연판문)을 새기고 있으며,
비신의 뒷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사실적으로 조각해 놓았다.
한편 신도비는 성종 19년(1488)에 건립되었으며,
그 후 500년이 지난 1988년에 碑閣(비각)이 세워졌다.
[神道碑(신도비)]
신도비의 규모는 비신의 높이 1.95m, 폭 80cm, 두께 20cm로
대제학 徐居正(서거정)이 비명을 짓고,
글씨는 弘文館 博士(홍문관 박사) 朴增榮(박증영)이 썼으며
아울러 篆字(전자)를 하였다.
비석군을 지나면 정면에 강희맹선생 신도비와 삼단의 묘역이 보이는데
중앙에 조성된 묘(계단을 오르면)가 강희맹선생의 묘이다.
본관은 진주. 자는 景遇(경우), 호는 仁齋(인재).
이조판서를 지낸 碩德(석덕)의 아들이시며, 좌찬성 希孟(희맹)의 형이다.
세종 20년(143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44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司贍署主簿(사섬서주부)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돈녕부주부, 이조정랑, 부지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1443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1445년 최항 등과 더불어
'용비어천가'를 주해했다.
또한 1444년 신숙주 등과 같이 '고금운회'를 번역하였으며,
1447년에는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사헌부장령, 지사간원사 등을 두루 거치고 단종 2년(1454)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정척, 양성지 등과 함께 팔도 및 서울의 지도를 제작하는 데 참여했다.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인수부윤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1456년에는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그는 관계하지 않았다는 성삼문의 진술로 화를 면했다.
이어 1463년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문장이 당대 으뜸이셨고 글,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세조실록', '예조실록',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등의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금양잡록', '사숙재집', '존담해이'등이 있다.
위에서 부터 아래로 차례대로 취죽공 극성 묘, 문량공 희맹선생 묘,
청천군공 진창 묘가 모셔져 있다.
[인재공, 문량공, 숙헌공, 신도비와 한글창제 도움비]
사당 좌측의 낮은 철문을 열고 묘역으로 들어서면 바로 우측에 있는
비석은 근래에 조성한 것 같다.
[方池圓島(방지원도)]
흔히 묘가 있는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네모난 연못으로 연못안에는 둥근 섬이 있는데..
네모는 땅을 의미하며 둥근것은 하늘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네모난 작은 연못만 있고 중앙에 둥근 섬은 없었다.
잘 가꾼잔듸위로 버섯이 자라고 있다.
인근에는 농사를 짖는 사람이 몇명 보인다.
목이말라 물어보니
연못위에 물이 있는데
그위에 큰나무 밑이 예전에 큰 지하수(우물)였는데
이동네 사람들이 다 이물먹고 살았다고 한다.
사당 우측편에는 2기의 묘가 있는데,
좌측이 姜希顔(강희안) 墓(묘)이다.
동생 희맹과 함께 일찍부터 시, 그림, 글씨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시, 서, 화의 삼절로 일컬어졌다.
그의 시는 위응물, 유종원과 같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문집은 전하지 않는다.
글씨는 전서, 예서, 팔분에 두루 능하여 왕희지, 조맹부에
비견되기도 한다.
1445년 세종이 寶玉(보옥)을 얻어
'體天牧民永昌後嗣(체천목민영창후사)'의 8자를 새겨
옥새를 삼았을 때 글씨를 썼으며, 1455년 주조한 乙亥字(을해자)의
글씨도 그가 썼다.
그림은 남송의 원체화풍과 명초의 절파화풍을 받아들여,
웅장한 모습의 산수를 주로 그렸던 당시의 추세, 기법과는 다른
작품을 그렸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고사관수도에서는 주변의 산수는
배경에 불과하고 수면을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한다.
그의 그림은 흔히 송나라의 유용, 곽희에 견주어진다.
그러나
'서화는 천한 기술이므로 후세에 전해지면 다만 이름에 욕될 뿐이다'
라 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저서로는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인 '양화소록'이 있으며,
그림으로는 '고사관수도', '교두연수도', '산수인물도',
'고사도교도', '강호한거도'등이 남아 있다.
글씨로는 '강지돈녕석덕묘표' 와 '윤공간공형묘비'가 전한다.
강희안선생 묘역의 석물도 학자풍의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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