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거운 시간 되십시
졸본부여(夫餘)에서 밝지(百濟)까지.
동부여에서 고추무(주몽)는 대소태자의 위협을 피해 가우리(句麗)로 도망쳤는데 그곳의 소실묵거,중실무골의 도움을 받아 공석으로 비어있던 가우리의 태왕자리를 차지하였다.
순식간에 일대세력으로 성장한 가우리는 주변의 약소국이었던 우이국과 비류국에게 위협적이었다.
비록 우이(위)국과 비류국이 졸본부여를 맹주로 모시고 있었으나, 졸본부여는 그들을 지켜 줄 만큼 강력하지 못 하였다. 그래서 우이국의 여왕 소서노와 비류국의 왕 송양왕은< 송양왕과소서노는 부녀관계다.송양왕이 우이국과 친선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우이국의 왕에게 시집보냈으나 우이국왕(구태)이 일찍 죽고 말았다. 비록 아들인 크치(비류국의 왕자라서 비류왕자라 불렀다)가 있었으나 나라를 다스리기엔 너무어렸으므로 소서노가 임시로 왕의 자리로 있었던 상황> 가우리의 고추무에 협력하기로 했다.
당시 고추무는 재정적으로 매우 열악하여 신하들의 녹봉도 제대로 줄 수 없는 상항이었다.이런상황에서 부국인 우이,비류국이 스스로 고추무를 찾아 온 것이다 고추무는 직접 송양왕에게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송양왕에게 고추무는 름름해 보였다.그래서 소서노와 고추무를 정략결혼 시키고자 했다.고추무와 소서노도 이를 받아 들였다.
소서노의 막대한 자금력은 가우리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우이국은 훈족과 교류하여 좋은 말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추무의 보병과 우이국의 기병이 합쳐져 가우리의 유명한 "보기군단"이 탄생하게 되었다.
고추무의 가우리는 동부여를 탈출한지 1년만에 소서노의 도움을 받아 대세력으로 성장하였다.이때 공교롭게도 졸본부여의 마지막단군인 고무서단군이 붕어하고 말았다. 고무서 단군에게는 후사가 없으므로 졸본부여는 큰 혼란에 빠졌다.고추무는 졸본부여의 시조인 고두막루천황의 사생아 였으므로 졸본부여의 단군위를 물려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추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졸본부여로 달려가 무방비 상태인 졸본부여를 접수하였다.그 뒤 가우리는 사방으로 뻗어 나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부분노가 송양왕의 비류국을 침략하여, 송양왕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거기다 비류국의 국고까지 약탈하였다.소서노에겐 고추무는 배은망덕하고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지만 그녀의 뱃속엔 그의 아들 온조가 자라고 있었고 막강한 가우리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기에 참는 수 밖에 없었다.
소서노의 아들 크치의 장래를 위해서 참고 또 참았지만 동부여에 있던 예씨부인이 고추무의 아들 누리를 데리고 찾아왔다. 그리고 고추무는 누리를 태자로 임명했다.
소서노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궁을 떠나기로 맘을 먹고 고추무에게 허락해 줄것을 요구했다.
가우리를 떠나 위의 터전인 우이국과비류국을 통합하니 떠돌던 그의 백성들이 다시 돌아왔다.소서노의 세력은 급속도로 커졌지만 아직 가우리와 싸울때가 아님을 알고 고추무의 감시망을 피해 나라의 위치를 옴겼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요서지방이다.이곳이 밝지(百濟)의 시작이였다.(기원전19세기)
하지만 위치가 좋지 안았다.동쪽으로 낙랑,북쪽으로 가우리, 서쪽으로훈족이 있어 뻣어 나갈 돌파구가 없었다.그래서 새 터전을 찾아 배를 타고 한반도로 출발하였다.<이때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가 한반도에 밝지를 세웠으므로 일백백자에 건널제(濟) 자를 써서 지나족들이 "百濟"라고 표현했다.올바른 표현은 밝은 땅이란 듯인 "밝지"이다.
요서에 남겨둔 밝지의 일부세력은 잘 버티어 내고 성장하여 후에 강력해 졌다.
새정착지인 한반도에는 마한이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밝지의 지도자가 된 비류천황은 마한과 협약을 하여 100여리를 얻어내어 살 수 있게되었다.요서지방에 있던 밝지의 백성들은 대대적으로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해 왔다.100여리의 땅은 모자라고 마한과의 마찰은 피할 수 가없게되었다.
또 온조가 독립을 요구해 왔다.10명의 신하와 약간의 백성을 주면 영원한 밝지의 제후국이 되겠노라 한다.
비류천황은 동생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해 준다.그리하여 십제가 밝지의 첫 담로국이 된다.
이때 이상한 일이 생겼다.십제를 방문한 소서노 어하라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이 미스테리는 추측만 있을뿐 아무도 알수가 없다. 온조가 시체를 수습하고 수도를 서둘러 옮겼다고 한다.
한편 비류천황은 마한의 끈질긴 저항을 물리치고 한반도로 들어온지 25년만에 남부지방의 종주권를 차지하고 수도를 마한의 수도였던 커밝한성에 고사부리성을 구축하고 밝지의 수도로 정한다.
이로서 16개의 제후국을 거느린 대세력으로 성장하여 이를 발판으로 대해양제국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류천황은 밝지의 진정한 시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