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百濟이야기(대륙백제와십제)-2

털보나그네 2008. 9. 3. 13:08

 

  

 

 대해양제국 밝지(百濟).

 

 

 

 

밝지의 성장.

 

 밝지시조 비류천황(沸流) 의 한반도 남부 정복사업은 계속되었다.  밝지는 마한(馬韓) 24개국을 모두 종속시키고, 정복지에 담로왕을 세우며 나라를 안정시켰다. 지나족들이 분열하여 중원이 혼란스러울 때 외밝지(外百濟)도 강대하게 성장하였다.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던 밝지는 드디어 마한(뱕지)과 예맥의 군사 수천 기(騎)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

 밝지는 지금의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반경을 넓혀, 부여를 서쪽의 전연(前燕) 근처로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 요동지역의 강자인 전연과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 결과 기원후 343년 경으로 짐작되는 전연과의 전투에서  밝지는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거니와, 바로 이 때문에 그 존재가 동아시아의 역사 무대에 부각되었던 것이다.

 4세기에 접어들어 북중국은 5호16국 시대의 대혼란이 개막되었고, 그 파장은 고구려에도 미치게 된다. 고구려가 서쪽지역에 국력을 집중하는 틈을 타 만주의 밝지는 고구려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력을 확보한다.

( 고구려가 요동을 지배하고 밝지는 요서를 지배했는데 밝지의 소치(所治:수도,도성)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한반도에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한 밝지는 해상을 장악함은 물론 중국대륙까지 눈을 돌리게 된다. 밝지는 먼저 황해의 많은 도서를 부속 영토로 하였다. 밝지왕실의 사냥터로 유명한 강화도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서남해안에 사람이 사는 15개의 섬은 모두 밝지의 행정지배를 받으면서 기항지 역할을 했다.

 이곳을 토대로 한 밝지의 해외경영은 다양한 인종의 거주와 물산의 집중을 가져왔다.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밝지는 해상교역활동의 중심지로 성장해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잡거하는 국제화를 일찍부터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황해바다를 토대로 한 밝지의 영역은 이후 더 확장돼 나간다

 밝지의 강역은 서북으로는 광녕, 금주, 의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성, 개주, 동남쪽으로는 조선의 황해, 충청, 전라도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밝지의 강역은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었다. 또 위(魏)나라 때 물길(勿吉)과 도모해 고구려 땅을 빼앗아 동북으로는 물길과도 이웃해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또 신라의 60~70성을 취하여 그 강토가 더욱 넓어졌다.”

급기야 금강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하면서 대만해협을 통과, 중국 남부 연안의 복주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해상통로가 형성되었다.

 "흑치"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군도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최근 중국학자들은 흑치가 필리핀임을 증명한 바 있다

 

 488~490년에는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던 북위와의 해전(海戰)에서 북위 선단을 격파할 정도로 비상한 해상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밝지의 선박은 이미 국제적으로 이름나 있었다. 650년에 왜가 제작한 대형 선박 2척의 이름을 「구다라선(百濟船)」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밝지선박을 가리키는 「구다라선」은 크고 튼튼한 선박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밝지와 고구려는 각각  비류와 주몽을 시조로 설정하고 있지만, 모두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갖추고 있었다. 고대에 있어서 사당은 그 친족집단의 구심점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사당은 늘 종가에서 관장하게 마련이고, 또 한 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동명묘(東明廟)가 부여 옛 땅이 아닌, 백제와 고구려의 건국지에 각각 설치되었고, 이전할 수 없는 성지(聖地)였다. 때문에 고구려 왕들은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 후에도 동명묘가 설치된 만주의 환인지방(고구려 건국지)까지 어려운 길을 달려가 참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 밝지와 고구려 왕들은 즉위할 때 이곳을 참배하는 의식을 통해 왕위에 대한 보증을 얻었던 것같다. 결국 이것은 두 나라가 서로 부여의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양보할 수 없는 경쟁의식을 낳았고, 급기야 무력대결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십제의 건국.

 

  비류천황의 동생인 온조가 독립을 요구해 왔다.10명의 신하와 약간의 백성을 주면 영원한 밝지의 제후국이 되겠노라 한다.비류천황은 결국 허락을 했고 이것이 십제의 시작이였다.(온조밝지의탄생)

요서에서 이소식을 듣은 소서노는 마한에 가서 비류를 크게 꾸짖고 십제로 달려갔지만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이후 부터 십제는 밝지의 시선에서 곱게 보이지 않고 항상 감시의 대상이 되였다.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진으로 삼았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

 

 가우리(고구려)와 밝지는 피를 나눈 형제국이며 건국 초기에 양국은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낙랑이 멸망하면서 양국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고 결국 국경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처음엔 작은 국경 분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어느덧 피를 흘리는 전쟁으로 번지자 밝지의 천황은 지용을 겸비한 십제의 태자 큰구수를 밝지의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밝지의 대신들과 귀족들이 가만히 있었을리 없었다. 큰구수는 어디까지나 십제의 인질일 뿐이며 그의 시조인 온조는 비록 밝지와 피를 나눈 형제이지만 국모인 소서노를 주살하여 밝지의 귀족들에게는 원수보다 못한 역적이었다. 그런 온조의 후예인 큰구수에게 밝지의 총사령관 직을 맏긴다는 것은 위험을 건 도박이었다. 하지만 밝지의 천황은 큰구수의 능력을 믿고 그를 결국 밝지의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제 큰구수는 십제의 태자도 아니며 밝지의 인질도 아니었다. 이제 그는 밝지와 십제의 군사를 모두 이끄는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375년, 그동안 십제, 밝지로 양분되어 있던 군대는 이제 큰구수의 직속 부대로써 하나로 뭉쳐 대군단이 되었고 외밝지의 군대 역시 큰구수의 휘하로 들어가 이제 큰구수는 밝지 최대의 군벌세력이 되었다. 이때부터 밝지의 천황은 큰구수를 조금씩 견제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십제의 인질이었던 그가 이제는 밝지 최대의 군벌이 되었으니 이제 그를 무시하는 처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도리어 그를 모함했다가 보복을 받을것을 두려워해 입을 다물고 있는 신하들도 많았다.

 

  밝지가 맹렬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 진(秦)나라는 또다른 진(晋)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두고 싸웠는데 이 전쟁도 패배하여 그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때 큰구수는 기세 좋게 진(秦)나라에 옛 배달민족의 영지인 청구국의 영지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으나 진왕이 거절하자 대군을 몰아 무력으로 그 땅을 점령해 버렸다. 산둥반도를 빼앗긴 진나라는 내륙지방으로 쫒겨났고 이제 큰구수는 진(晋)과 중원의 패권을 두고 격돌하게 된다. 이 싸움마저도 밝지의 승리로 돌아가니 이제 밝지는 옛 쥬신제국이 다스리던 중원의 땅을 모두 다물한것은 물론 한반도남부, 일본을 식민지로 하는 대해양제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제 큰구수에게 대항할힘을 지닌 세력은 중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지나족들은 밝지의 공격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큰구수의 대활약으로 중원 대륙과 요서지방을 차지한 밝지제국은 이제 천하통일의 위업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당시 밝지는 중원의 서쪽과 요서지방, 한반도 남부, 현 일본의 규슈, 시코쿠, 규슈 지방에 식민지를 둔 말 대로 대 해양제국이었다

.

390년, 밝지의 서울 곰나루에는 새로운 밝지의 천황 오오진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치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밝지 천황의 직영지는 한반도 남부에 불과했지만 중원, 일본, 각 담로국에서 들여온 특산물과 조공품이 넘쳐나 나라는 늘 풍요로웠으며 황실의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대 해양제국의 위력을 등에 업고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오오진천황의 이름은 ``위대한 신``이라는 뜻이며 말 그대로 밝지의 신민들은 그를 신처럼 믿고 따랐다. 후에 오오진이 일본으로 망명할 때 120현민 (밝지 인구의 절반) 목숨을 걸고 현해탄을 건너간 이유도 그들의 신인 천황을 따르기 위함이었으니 당시 밝지 천황에 대한 신민들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오진이 천황에 즉위한 다음해인 391년, 우리 한민족의 불세출의 영웅이신 광개토 호태왕께서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에 가우리의 태왕으로 즉위하셨다. 이 어린 소년 태왕의 즉위가 위 밝지의 종말을 고하는 것일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광개토 호태왕은 어렸을 때부터 밝지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우리의 16대 태왕이신 사유열제께서 위 밝지에게 암살당한 것은 물론 그 동안 밝지가 가우리에 안겨준 수모를 한시도 잊은적이 없었다. 이 소년 태왕은 놀랍게도 즉위 1년만인 392년,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을 앞세우고 4만의 보기군단을 동원해 질풍과 같은 속도로 밝지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 무모하고 멍청한 멧돼지의 행동으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이 소년 태왕은 아무런 생각없이 군대를 밝지로 몰아간게 아니었다.

 

 호태왕은 밝지군의 선두에 서서 늘 가우리를 괴롭혔던 십제의 왕 진사왕이 유약한 겁쟁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군대를 몰아 밝지 이북의 18개 성을 함락시켰고 그 여세를 몰아 밝지 최대의 해양기지인 관미성을 20일간 맹공을 퍼부어 함락시켰다. 가우리는 그동안 밝지의 해군과 육군의 협공을 받아 늘 고전했으므로 밝지의 해군력을 무마시키는것과 동시에 관미성의 기술자들을 포섭하여 가우리 해군의 증강을 노린 것이다. 18세의 호태왕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은 이처럼 교묘하고 놀라운 것이었다. 이후 강대해진 가우리의 수군은 지나족들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하여 그들의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등 그 활약이 대단했다.

 순식간에 밝지 이북의 18개 성이 떨어진 사실을 접한 오오진 천황은 경악하여 즉시 군의 경계를 강화했으며 비겁하게 가우리의 공격이 무서워 도망간 십제의 진사왕을 찾아내 자결시켜 버린후 그의 조카인 아신을 십제의 왕으로 올렸다. 오오진 천황은 진무를 좌장군으로 삼아 빼앗긴 이북의 18개 성을 되찾아오도록 명했다. 하지만 이미 광대한 첩보망을 구축한 호태왕은 그들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었고 밝지군은 호태왕의 거미줄 같은 수비망에 막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오진 천황은 작전을 바꾸어 수군을 동원해 남펴라를 기습하는 작전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호태왕에게 간파되어 밝지의 수군은 남펴라의 마의 삼각주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도주하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가우리의 반격에 당황한 오오진 천황은 잠시 군을 뒤로 물리고 군을 재정비하기 시작하는 한편 호태왕의 남진에 대비해 대부분의 병력을 북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그 덕분에 밝지의 천황궁의 수비대는 2천으로 줄었고 호태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관미성에서 포섭한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대선단을 구축, 수만의 군대를 동원해 밝지의 천황군을 직공하는 대담한 작전을 세웠다. 밝지의 천황궁은 발칵 뒤집어져 귀족들은 짐을 싸들고 도망치기 바빴으며 천황은 조상의 신주들만 챙긴 채 부랴부랴 망명길에 오르고 말았다.

 

 

십제의 운명.

 

 본국의 오오진 천황이 나라를 버리고 일본으로 방명하자 십제는 큰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그동안 밝지의 권위를 등에 업고 가우리를 괴롭혔으니 호태왕이 자신들을 가만히 놔둘리 없지 않은가? 예상했던바와 같이 호태왕은 그동안 밝지의 개가 되어 가우리를 괴롭혔던 십제를 멸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십제의 왕궁을 포위해 버렸다. 십제의 아신왕은 성밖으로 나와 스스로 항복하여 그동안의 죄를 사면해 줄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호태왕은 당장이라도 십제를 쳐없애버리고 싶었지만 항복하는 적을 죽이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았으므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십제의 조공을 받는 조건으로 그들을 용서했다.

 

 한편 일본으로 넘어간 오오진 천황은 일본에 새로운 나라인 나라밝지를 세우고 이제부터 이 일본을 기점으로 담로국들을 통치한다고 온 나라에 선포하였다. 담로국들은 하례물을 들고 새로운 나라의 개국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십제도 나라밝지에 축하 사절단을 보냈다. 하지만 오오진은 십제가 호태왕의 개가 되겠다고 맹세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십제를 멸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십제는 기묘하게 행동하여 가우리에 항복한것은 자신들이 고립되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벌인 행동이었다고 변명하면서 대신 십제 아신왕의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겨우 천황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래포구(11/8)  (0) 2008.11.08
강희맹선생묘역  (0) 2008.10.04
百濟이야기(졸본부여에서 밝지까지)-1  (0) 2008.07.26
관곡지(7/9)  (0) 2008.07.09
미스테리 한성백제  (0) 2008.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