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맹 [姜希孟]
1424(세종 6)~1483(성종 14).
조선 초기의 문신.
뛰어난 문장가이며 공정한 정치를 하여 세종·성종 때 모두 총애를 받았다. 본관은 진주.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무위자(無爲子),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지돈녕부사 석덕(碩德)의 아들로, 희안(希顔)의 동생이다. 1447년(세종 29) 18세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예조참의·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68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1473년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이조참판·판돈녕부사·우찬성을 거쳐 1482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부지런하고 치밀한 성격으로 공정한 정치를 했고 박학다식(博學多識)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한편으로 아첨하며 자기 공을 자랑한다는 비방도 들었다.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뛰어난 문장가였고 민요와 설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소나무·대나무 그림과 산수화를 잘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현재 일본의 오쿠라[小倉] 문화재단에〈독조도 獨釣圖〉가 남아 있다.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예종실록〉을 편찬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의 시집인 〈진산세고 晉山世稿〉를 엮었다. 세조 때 〈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의 언해, 성종 때는 〈동문선〉·〈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국조오례의서례〉 편찬에 참여했다. 금양에 있을 때 자신의 경험과 견문을 토대로 지은 농업에 관한 저서로 〈금양잡록 衿陽雜錄〉이 있고, 당시 골계전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촌담해이 村談解頤〉가 있다. 그밖에 서거정이 편찬한 유고집 〈사숙재집〉 17권이 있다.
훈구파(조선 세조의 찬위를 도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관료학자들)
훈구파(조선 세조의 찬위를 도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관료학자들)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권람(權擥) ·서거정(徐居正) ·양성지(梁誠之) ·이석형(李石亨) ·강희맹(姜希孟) ·이극돈(李克墩) 등이 이 파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조의 공신(功臣) ·충신(忠臣) 또는 어용학자(御用學者)들로서 높은 관직에 기용되었고, 관찬사업(官撰事業)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수차에 걸친 공신전(功臣田)의 지급을 통하여 막대한 농장(農莊)을 가지고 있었다.그 후 신진사류(新進士類)인 사림파(士林派)의 등장으로 그 세력이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즉,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해 토지제도의 개혁을 요구함으로써 두 세력 사이에 충돌을 야기하였으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훈구파는 이 사화에서 영남유생과 싸워 승리했고,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도 사실상 승리하였다.
-姜希孟(강희맹)-
胡孫投江月波動影凌亂(호손투강월 파동영릉란]
- 飜疑月破碎引臂聊戱玩(번의월파쇄인비료희완)
- 水月性本空笑爾起幻觀(수월성본공소이기환관)
- 波定月應圓爾亦疑思斷(파정월응원이역의사단)
- 長嘯天宇寬松偃老龍幹(장소천우관송원노령간)
- 어라, 달이 다 부서져 버렸나?
- 팔을 뻗어 달 조각을 만강 속의 달을 지팡이로 툭 치니
- 물결 따라 달 그림자 조각조각 일렁이네.져보려 하였네.
- 물에 비친 달은 본디 비어있는 달이라
- 우습다. 너는 지금 헛것을 보는 게야.
- 물결 갈앉으면 달은 다시 둥글 거고
- 품었던 네 의심도 저절로 없어지리
- 한 줄기 휘파람 소리에 하늘은 드넓은데
- 소나무 늙은 등걸 비스듬히 누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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