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河演) 정승묘의 전설
인천의 진산이면서 주산이 되는 소래산에는 세종때 영의정을 지냈던 하연(1376~1456)의 묘가 있다.
이 묘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살피기 앞서 간평(看評)부터 하기로 하겠다.
소래는 인천의 동남방에 있다. 수인선 협궤철도가 지나는 곳으로서 포구가 유명하다.
고구려때에는 '매몰소현'이었고 고려숙종때에는 왕비인 인준태후의 친정이라하여 '경원군'으로 승격되였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의 인천으로 바뀐것은 인종의 왕비인 순정왕후의 친정 고을이기 때문이었다.
인천의 주산 되는 소래산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청량산이 , 동남쪽으로는 성인산의 군자봉이 문필봉으로 솟아올랐다.그 북동남간에 관악산과 금지산, 수리산의 아아한 산줄기는 기고만장으로 펼쳐져 있고, 북으로는 넓은 부평들 한복판을 계양산 높은 봉우리가 동서로 병풍처럼 둘러 있어 낙산을 이 주산의 정상에서 내려뻗은 용세는 굽이굽이 이어져 내려 산아래 무공단좌형(武公端坐形)의 명당을 이룬다. 안산을 바라보면 외래조안(外來朝案)으로 천마산이 둘러있고 , 작은 물줄기는 청룡을 감싸 흘러가니 묘쓴 지 수백 년 후에 대발할 진혈이 있게 마련이다.
이 명당터에 바로 진주 하씨 하연과 부인 성산 이씨가 합장되여 있다. 하연은 부윤 자종의 아들로서 정몽주에게서 배웠다. 태조5년(139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다음 세종5년(1423)에 대사헌, 세종13년(1431)에 대제학,세종29년(1449)에 영의정이 되였다. 단종1년(1453)에 돌아갔는데 묘를 지금의 소래산 아래에 잡았다. 묘를 쓴 뒤로 어느때부터인가 괴이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다음과 같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하연이 죽은뒤 어느땐가 부터 인천 부윤이 부임만 하면 그날밤으로 변사를 당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두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이어 일어나는 괴변이니 어느 누구도 인천 부윤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흉한의 손에 죽는 것도 아니고 연유도 모른 채 죽어가기 때문이었다. 선임 사또들은 저마다 각오를 단단히 했다. 어떤 귀기가 오더라도 반듯이 물리쳐 없애겠노라고 다짐을 하면서 공포감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하는 수 없이 조정에서는 방을 내걸어 인천 부윤을 자청하는 사람에게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부임시키기록 하였다.
그때 서울에 기골이 장대하고 호걸찬 장부가 있었으니 백씨성을 가진 젊은이었다. 저녁 무렵에 도착한 신임 사또는 관속노비들을 대강 점검하고 저녁상을 받았다.
신임 사또가 부임하는 날이면 관방노속들은 물론이요, 신임사또의 친지들까지 합세하여 변사의 진실을 밝혀보려고 선화당 대청에 대촉을 밝히고 사또와 자리를 같이 하였다. 그러나 밤이 되면 사또는 또 어김없이 말 한마디 못하고 눈을 부릅뜨며 기절초풍하고 죽어가는 것이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왜 하필이면 사또만 죽는것인지 그 이유를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더니, 정말로 희한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변고였다.
그는 인천 부윤으로 자원하고 길일을 잡아 부임하였다. 이윽고 해가 지니 관속노비들은 횃불을 높이 들어 사방을 밝히었고, 이방들은 신임 사또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흘러감에 따라 관속들의 초조감은 더해지갔고 전에 변괴가 났던 시간에 다다르자 사또 또한 태연해보이려고 했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대촉이 바람도 없는데 일렁이며 꺼질 듯 말덧 하더니 싸늘한 기운이 몸을 움츠러 들게 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멀리서부터 관노들의 벽제(벽제 : 지위 높은 사람이 지나갈때 구종별배가 잡인들의 통행을 통제하던 일) (별배 : 벼슬아치 집에서 불이던 하인) 소리와 말 발급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곧이어 아문을 거쳐 걸어들어오는 발자욱 소리가 들였다. 신임 사또는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극도의 공포가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이른바 정체를 알 수 없는 귀신의 무리들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이 혼몽해지는 가운데서도 기운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앞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것이 도대채 어찌 된 일인가 한 백발의 정승이 구중구배들을 이끌고 당상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백사또는 엉겁결에 머리를 조아려 하례를 하였다. 백발의 정승은 껄껄 웃으며, 내가 이제서야 이고을의 임자를 만났구나. 그동안 집이 편치 못해 고을의 부윤에게 이야기 좀 해보려 했으나 말도 꺼내기 전에 모두 죽어버리니 안타까운 마음만 더해갈 뿐이었다. 이제 내가 비로서 기상이 출충한 대장부를 만났으니 비로소 소원을 말하게 되였노라. 그대는 들어보라. 소래산 아래에 내무덤이 있는데 그 앞에 우시장이 있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냄새가 고약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도다. 내가 살아서 무슨 덕을 많이 쌓았는지 참으로 운좋게 대명당에 들어서 쉬고 있는데 우시장 때문에 지기가 상하고 체백마저 고통스러우니 그대가 앞장서서 소시장을 다른곳으로 옮겨주었으면 한다. 하고 말하더니 창졸지간에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신임 사또는 잠시 후 정신이 들어 깨어 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관속들은 아무런 낌새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 었다. 신임 사또 역시 그 시각이되자 혼절하여 쓰러지니 이번에도 또 초상을 치르는가 싶었든 것이다. 그렇게 걱정하던 중에 사또가 홀연히 깨어나니 여기 저기서 환호성이 울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은 사또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정승 귀신이 찾아와서 부탁의 말을 남기고 갔다는 이야기를 듣자 모두 머리를 조아리려 지엄하신 영혼에게 하례를 올렸다. 새날이 밝았고 신임 사또가 밤새 무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을 사람들은 저마다 몹시 기뻐 했다. 지난밤 사건의 자초지종이 전해지자 모두들 혀를 차며 놀란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맞았어. 거기는 하연 정승의 묘역인데 언제부터인가 소시장이 생겨 시끌 벅적하고 똥냄새가 진동하니 영의정의 체백이 편안할 리 있었겠는가? 시장을 다른곳으로 옮겨야 됨세. 암 그렇구 말구. 명당이 어디 그렇게 아무 데나 생기는 감. 청룡이 겹겹이 호종하고 백호가 중중한 저곳에 맺인 혈이야말로 이곳에서는 으뜸인데 진혈이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지않을 수 있겠나?" 삼삼오오로 모여 이렇게 이야기 하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같았다. 그리하여 새로 부임한 사또는 즉시 우시장을 옮기고 묘소 근처를 청결히 한 후 제수를 장만하여 하연 정승의 묘에 참배를 하였다. 그 후부터는 아침마다 꿩이 한 마리씩 떨어져 있어 그것으로 적(炙)을 삼아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명당진혈이 자기 스스로를 지키는 사례로써 민간에 널리 전해져오는 이야기다. 더불어 대장부의 기개와 용맹함이 귀신의 소원을 들어 적덕하였다는 미담이기도 하다. (육관도사의 풍수 명당이야기 (하) 손석우 지음 터에서 옮김
하우명 효자정각
오랫동안 가문을 지켜온 하씨(河氏) 문중에서 조선조 숙종 때, 영의정 하연의 3남 하우명(河友明)의 효행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문표와 효자비를 세워 크게 표장하고 만백성들에게 알리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시흥시 신천동422번지에 세워진 ‘하우명 효자정각’이며, 시흥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조 성종 때 효자 하우명 선생은 1413-1495년대 살았던 인물로서, 호는 연당, 본관은 진주이며, 부친은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3남이다. 지방 관리직을 맡았던 작은 벼슬을 하였으나 그만두고, 세조임금이 큰 벼슬로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며 고향에서 부모를 봉양하는데 지성을 다하였다.
그의 효행은 아버지 하연으로부터 본받아 전수된 것으로 본다. 하연은 영의정으로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가묘(조상의 사당)에 참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으며, 돌아가신 부친의 초당을 수리하여, 평소 쓰시던 기물이나 자리를, 차마 조금도 바꾸지 않을 정도의 효자 부친에게서, 그 아들 하우명대에 까지 체 받은 것이다.
하우명은 아버지가 영의정에서 물러나자, 아버지를 풍자 섞인 유머로 기쁘고 즐겁게 해드리며, 조석으로 반드시 손수 조리하여 맛을 먼저 보면서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봉양하였다.
여로하신 아버지가 노환으로 치매를 앓게 되면서,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종아리를 치시는 등의 병이 심해도 전혀 개의치 않고, 더욱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웃고 노래하며, 조금도 아버지의 뜻을 거스리지 않았다. 수년 동안이나 계속된 병간호였지만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조금도 게으르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아버지 하연이 별세하신 후, 3년 동안 상례기간 중, 한 번도 내당에 들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드리는 제수는 반드시 직접 손수 마련하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제수에 T는 물과 땔감까지도 종복들을 시키지 않고 손수 마련할 정도였다.
2)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한 효자 하우명
3년간의 부친의 상기가 끝나자, 어머니도 노병으로 쇠약해지자, 소래산 묘소 옆 별장으로 모시고 와서, 고기나 물고기 등의 맛좋고 영양 있는 음식을 손수 만들어 봉양한 효자였다.
잡숫고 싶은 것이 있으면, 꼭 구하여 드렸다. 즉, 그물이나 낚시도구를 손수 만들어 고기잡이와 사냥까지 하면서,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게장’과 ‘꿩고기’ 를 즐기시므로 미리 가을에 ‘게’를 잡아다가, 진흙담은 항아리에 저장하여, 아무리 겨울철이라도 게장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다. 친히 노복들과 자녀들을 데리고 숲속에 그물을 처서 꿩을 잡는 수고에 감동하여, 길손이나 이웃들도 도왔다는 것이다.
어머니도 아들이 조리하지 않은 음식 맛을 알아차리고 들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향한 하우명의 헌신적 효행은 온 지역에 말없이 퍼져 나갔다.
3) 미물의 호랑이도 감복시킨 효성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 곁에서, 아버지에 이어 3년간이나 시묘(侍墓)할 때, 일화가 남아있다. 묘 옆에 석등을 설치하고, 어머니가 쓸쓸 하실 가봐 밤새도록 불을 밝혀드렸다. 어느 날 등불이 꺼지고 등잔이 넘어져, 이튼 날 슬퍼하며 묘 주위를 살펴보니, 붉은 여우 한 마리가 죽어있고, 맞은편 여막근처에는 송아지만한 큰 호랑이 한 마리가 걸터앉아있어 놀랐으나 개의치 않았다. 제사를 마치고 나오며 던져준 음식을 받아먹으며, 해치기는커녕 수호신으로 지켜주는 듯하였다.
그후 오랫동안 제수감으로 거위와 오리를 키워왔는데, 하루는 그 호랑이 녀석이 물고 올라가 버렸다. 이에 하우명은 “제수로 쓰기위해 정성으로 키웠는데, 아무리 짐승이라도, 내 정성을 몰라주는 구나” 탄식하고 있을 때, 3일 만에 물고 갔던 거위가 다시 돌아온 오자, 이는 그의 정성이 지극하였기 때문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3년간의 시묘를 마친 후, 소래산 아래 초상화를 모시는 ‘영당’을 짓고 계절에 따라,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와 같이 제수를 받들어 제사를 모시면서, “부모님은 평소에 ‘형제자매들과 같이 식사해야 배부르다’ 고 하셨다” 면서, 먼저 간 형제들의 신위를 배치하여 제사로 모셨다. 하우명은 천성에서 울어 나오는 효심으로, 다른 어른들에게도 변함없이 대했으며, 다른 사람을 모함하지 않았다.
이에 감동한 지방관리가 임금께 상신하자, 나라에서 정각과 문표를 세워 만백성들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벼슬을 버리면서까지 부모를 봉양한 아름다운 효행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소산서원
묘소가 정갈하게 잘 보존되어 있고 주변도 깨끗하다...역시 명당자리라서 그런지 이땅을 밝는순간부터 마음이 경건해 지고 차분해 진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밀려오려한다...집집마다..가로등마다..불이 하나둘씩 껴지고 있다...
발를 재촉하여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지...
풍수지리는 잘 모르지만 좋다는 자리에 와보면 공통적으로 느끼는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풍경이라는것....
시흥에서 18년을 살면서 이곳을 처음와본다...먼곳도아닌 바로옆동네 대야동에서 살면서...
소래산은 수없이 올랐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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