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스크랩] 족보에 대하여

털보나그네 2008. 4. 14. 17:14

 

 

족보에 대하여                         

 

족보는 일찍이 중국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왕실계통(王室系統)의 제왕연표(帝王年表)를 기술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는 한(漢)나라 때 관직 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새로 설치하고, 후보인물의 내력과 그 선대(先代)의 업적 등을 기록하여 비치한 것이 사가(史家)에서 족보를 갖게 된 시초(始初)가 되었다고 한다.

 

1. 성씨의 유래


족보를 알기에 앞서 우선 성씨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한다.
성(姓)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발생된 것으로 세계에서 성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민족은 중국민족(中國民族)으로, 하(夏), 은(殷), 주(周) 시대부터 제후(諸侯)들이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성이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우리나라 성(姓)씨의 유래는 중국문화의 수입 이후부터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옛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에 고(高)씨라 하고, 백제는 시조 온조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고 하여 그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다.


이렇듯 고구려와 백제의 성을 대충 살펴보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의 기원(起源)은 아무래도 신라(新羅)의 박(朴)·석(昔)·김(金)의 3성과 이(李)·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의 6촌 성(六村 姓)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신라(新羅)의 왕실(王室)계보를 보면 역대 56 왕(王) 가운데 박씨(朴氏)가 10명 석(昔)씨가 8명 김(金)씨가 38명으로 되어 있다.


박(朴)씨는 박 속에서 나왔다 하며 성(姓)을 박(朴)이라 하고,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여 B.C 57년에 왕으로 추대했다. 석(昔)씨는 B.C 19년 석탈해(昔脫解)로 57년 유리왕(儒理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김씨(金氏)는 65년 탈해왕 9년 금성(金城) 서쪽 계림(鷄林)의 나무 끝에 걸려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신라를 이끈 박(朴)·석(昔)·김(金) 3성(三姓) 씨의 유래이다.

물론 이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는 학자도 있지만 현재까지의 학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빌려서 밝힌 내용이라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우리나라의 성씨의 최초 유래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여 이와 보이나 이는 후대에 붙인 것으로 이미 학자들 간에 고증되어 밝혀졌다. 신라 말기부터 귀족(貴族)들 간에 쓰이다가 고려 초기에 정령(政令)으로 비로소 일반에게 사용되어 고려중엽 이후 널리 보급된 것으로 추측된다.

 

2. 사성(賜姓)에 대하여


신라의 왕족인 3성(三姓)씨 박(朴)·석(昔)·김(金) 이외에 이(李)·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의 육촌성(六村姓)은 32년 유리왕(儒理王) 9년에 6부로 고치면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첫 임금으로 추대했던 육촌(六村)에게 각각 성을 내렸으니 ‘알천양산촌장’ 알평(謁平)에게 이(李)씨, ‘돌산고허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 최(崔)씨, ‘무산대수촌장’ 구예마(俱禮馬)에게 손(孫)씨, ‘취산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에게 정(鄭)씨, ‘금산가리촌장’ 지타에게 배(裵)씨, ‘명활산고아촌장’ 호진(虎珍)에게 설(薛)씨를 각각 사성 했다고 한다.

 

이들 6성은 앞서 말한 박(朴)·석(昔)·김(金) 3성과 함께 우리가 쓰고 있는 성의 시초를 이루는 것이므로 성의 역사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뜻을 갖는다. 그 예로서 진흥왕(眞興王:540~ 576년)의 순수비(巡狩碑)로 서울의 북한산비 창영비(昌寧碑), 함흥의 황초령비(黃草嶺碑), 이원(利原)의 마운령비(磨雲嶺碑) 등의 비문에 나타난 수행자 명단을 보면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성이 없으며, 대신 그 사람의 출신부 이름만 밝혀져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은 진지왕(眞智王:556~ 579)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의 무술오작비(戊戌午作碑)나 진평왕(眞平王:579-632) 때 세워진 경주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사성(賜姓)은 王이 성을 내려주는 일인데 이를테면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 권행(權幸)은 원래 김씨(金氏)였는데 태조(太祖)가 권씨 성을 내려준 것이며, 수성최씨(隋城崔氏)의 시조 최영규(崔永奎)도 본디 김씨(金氏)였는데 고려 충렬왕이 최씨로 하사한 것이다. 또 일직(一直) 안동 손씨(孫氏)는 본디 순씨(旬氏)였고 예천권씨(禮泉權氏)는 원래 우씨(旴氏)였는데 王의 이름자(字)와 같다는 이유로 손씨와 권씨를 개성 하게 했다.

 

고려시대에 사성이 빈번하여 국가(國家)에 공(功)이 있는 사람에겐 왕씨성(王氏姓)을 곧잘 주곤 했다. 아마도 이런 일이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던 모양인데, 거부한 사람들도 허다하였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고려 고종 6년(1219)  3월 최충헌(崔忠獻)의 경우를 보면 王氏 성을 사성 했는데, 그 해 9월에 사성한 것을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3. 성씨의 사용


이와 같이 성씨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고대 부족국가 때부터 사용한 것이 아니고 모두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 지어낸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즉 어느 때부터 성을 쓰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으나 사헌(역사적 문헌)이나 중국에 보낸 국서(國書)를 미루어 짐작하기를 고구려는 장수왕 때부터 고(高)씨를, 백제는 무왕 때부터 부여(扶餘)씨를,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金)씨의 성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때에도 온 백성이 모두 성씨를 쓴 것은 아니다.

온 백성이 보편화 된 성씨를 쓴 것은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년)에 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법령이 내린 이후부터라 한다. 그리고 신라를 이끈 박(朴)·석(昔)·김(金) 3성(三姓)씨와 이(李)·최(崔)·손(孫)·정(鄭)·배(裵)·설(薛)의 육촌성(六村姓)이 오늘날 우리 성씨의 시조가 되는 이유는 이들이 바로 한강 이남을 지배한 한민족(韓民族)이라고 풀이하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조와 조선조에서는 사대사상에 젖어서 중국의 유명한 성을 본떠 쓰는 일이 유행하였고, 스스로 대국(大國)의 성현명족(聖賢名族)의 후예임을 자처할 뿐만 아니라, 성보(姓譜)를 장식하여 문벌을 과시하는 폐단도 없지 않았다. 조선조 영조 때 이의현(李宜顯)은 우리나라의 성을 298성으로 보았고, 1985년 11월의 경제기획원 자료조사에 의하면 274성 씨가 기록되어 있다.

 

4. 보첩(譜牒)에 대하여


보첩(譜牒)이란 혈통의 관계를 엮은 책을 말한다. 보첩(譜牒)에는 족보(族譜), 대동보(大同譜), 파보(派譜), 세보(世譜), 가승보(家乘譜), 계보(系譜), 만성보(萬姓譜)가 있으며 그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족보(族譜)


한 종족(種族)의 계보(系譜)다. 같은 씨족의 세계(世系)를 도표 식으로 나타낸 책이며, 시조(始祖)이하 세계의 계통(系統)을 수록(收錄)하여 동족(同族)의 발원(發源)에 대한 사적(史籍)과 선조(先祖)로부터 본인(本人)에 이르기까지 각(各)·휘(諱)·호(號) 등 사략(事略)을 상세히 수록(收錄)하여 종족(宗族)의 근원(根源)을 밝히고 선조(先祖)의 행적(行蹟)과 동족간의 소목(昭穆)을 알려 화애돈목(和愛敦睦)함을 목적(目的)으로 편수(編修)한 것이다.

 

나. 대동보(大同譜)


같은 시조(始祖) 밑의 중시조(中始祖)마다 각각 분관(分貫)하여 씨족 간에 종합 편찬된 족보이다. 한 성씨(姓氏)의 시조 이하 동계혈족(同系血族)의 동족 간에 분파(分派)된 파계(派系)를 한데 모아 대동(大同)하여 집대성(集大成)한 각파(各派)의 파조(派祖)는 시조로부터 몇 세손이며 어느 대(代)에서 분파(分派)되어 파조(派祖)가 되었는가를 볼 수 있도록 계통(系統)을 수록(收錄)하였다. 누구나 전체가 수록되어야 대동보(大同譜)의 면모(面貌)를 갖추게 되는 것이며 단 한파만이라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상식(常識)이다.

 

다. 파보(派譜)


시조로부터 어느 한 파속(派屬)만이 각(各) 휘(諱) 字와 사적(史蹟)을 수록(收錄)한 것이며 대동보(大同譜)와 다른 점은 각파(各派)의 문중(門中)에 대한 후손의 손록(孫錄)을 상세히 수록(收錄)할 수 없다. 동일파계(同一派系)의 동족은 빠짐없이 수록(收錄)하여 보사(譜事)에 참여함으로써 파손(派孫)으로서는 소중할 것이다.

 

라. 세보(世譜)


한 종파(宗派)이상이 동보(同譜)·합보(合譜)로 편찬되었거나 어느 한 파속(派屬)만이 수록(收錄)한 보책(譜冊)이다. 대부분 동일계파의 계통만을 수록(收錄)하는 경우라도 상계(上系)에서 각 분파조(各分派祖)를 밝혀 어느 몇 대조 세대(世代)에 갑(甲)과 을(乙)과 파(派)가 갈리어 갔다는 것과 분파조(分派祖)의 사략(史略)등을 명기하여 수록 편수함을 세보(世譜)라칭(稱)하며 세지(世誌)라고도 한다.

 

마. 가승보(家乘譜)


가승(家乘)이란 시조 이하 중조(中組)와 파조(派祖)를 거쳐 본인(本人)에 이르기까지 직계존속(直系尊屬)만을 수록(收錄)한 가첩(家牒)을 말한다. 본인(本人)의 고조부(高祖父)이하는 전부 수록(收錄)하여 재종(再從)·삼종(三從) 형제자매(兄弟姉妹)까지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고조부(高祖父)이상은 직계선조(直系先組)만을 수록하고 형제(兄弟)가 많을 때 경제적인 부담(負擔) 때문에 족보(族譜)를 각기 모실 수 없으므로 종가(宗家)에서 족보(族譜)를 모시며 지손(支孫)은 가승, 즉 가보(家寶)만을 모시는 옛 풍습에서 나온 것이다. 대동보(大同譜)나 파보(派譜) 등은 족손(族孫)이 전부 수록되어 있으므로 시조(始祖)나 파조(派祖)이하 본인(本人)에 이르기까지 찾아보기란 쉽지 않으므로 간략(簡略)하게 자기에게 해당되는 직계(直系)만을 계통적(系統的)으로 수록(收錄)하여 계보(系譜)를 자녀(子女)의 교육용(敎育用)으로 또는 생일(生日)과 기일(忌日)이 수록됨으로 가족(家族)에 대한 참고용으로 모시고 있다.

 

바. 계보(系譜)


가문(家門)의 혈통관계(血統關係)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系統的)으로 나타내는 도표(圖表)로써, 소목(昭穆)을 밝히기 위하여 각(各)·휘(諱)·자(字)만을 수록(收錄)한 계열도(系列圖)를 말한다. 시조 이하 분파(分派)된 각(各) 파조(派祖) 본인(本人)까지 수록(收錄)한 것 등을 계열도(系列圖)라한다.

 

사. 만성보(萬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각(各)성씨(姓氏)의 관향별(貫鄕別)·시조이하(始組以下)·역대(歷代)·중조(中祖)·파조(派祖) 등을 요약(要約)하여 수록(收錄)한 것이다.

 

5. 족보와 관련된 필수 용어


족보에 관련된 필수 용어는 시조(始祖), 중시조(中始祖), 일가(一家), 종씨(宗氏), 등이 있다.

 

가. 시조(始祖)


시조(始祖)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일관 시조(一貫始祖)’라는 시조(始祖)와 ‘중시조(中始祖)의 시조(始祖)’를 말한다.
먼저, 신라시대 시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계보로 내려오는 집이 지니고 있는 시조를 일컫는 일관 시조(一貫始祖)라고 하고, 신라시대에 시조가 나타나기는 했으나 그의 아들을 모르게 되었고, 또 그의 손자를 모르게 된 시조가 있는데 이런 시조를 ‘중시조(中始祖)의 시조(始祖)’라 하며 이를 “비조(鼻祖)”라고도 한다.
‘일관 시조(一貫始祖)’의 대표가 ‘벽진 이씨(碧珍李氏)’로 신라말 벽진 장군 이총언이 ‘벽진 이씨’의 ‘일관 시조’이다. 그 외의 모든 성씨는 중시조의 시조를 두고 있다.

 

나. 중시조(中始祖)


중시조(中始祖)를 통상 관향(貫鄕)의 시조(始祖)라고 한다. 시조 중시조가 받은 것을 관(貫)이라고 하며, 관(貫)은 살고 있는 땅 이름으로 되었다. 본관(本貫)이란 말이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김해 김(金)씨, 경주 김(金)씨, 전주 이(李)씨, 수안 김(金)씨 등에서 ‘김해’ ‘경주’ ‘전주’ ‘수안’이 바로 관향(貫鄕)이며 이를 본관(本貫)이라고 한다. 이 관향을 처음 사용하게 된 시조를 중시조라고 한다. 예를 들어 ‘수안김씨’를 말할 때 ‘성(姓)’이 ‘김(金)’이고, 관향(貫鄕)인 ‘수안(遂安)’이 ‘씨(氏)’로 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대부분이 신라시대에 시조가 나오고 고려시대에 중시조가 나온다. 그것은 고려 중엽부터 성씨가 주어진 것으로 되다 보니 삼국 중에서 이전의 부족인 삼국 중에서 통일신라를 통한 신라계통의 혈맥이 우선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즉 고구려나 백제, 신라시대에는 성씨가 없었다는 말과 걸맞게 되는 것이나 그래도 신라는 통일신라에 이어지다 보니 거의 모두가 신라의 혈통을 선호했던 것이다.

 

다. 일가(一家)


돈을 내어서 족보를 함께 만드는 사람들을 일가(一家)라고 한다. 일가라는 말은 ‘같은 한집’이라는 뜻이다. 시조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 모두가 일가로 되어서 족보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일가에는 ‘가까운 일가’가 있고, ‘먼 일가’가 있는데 가까운 일가를 ‘한집안’이라고 한다.

 

 

 

 

출처 : 화타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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