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미스테리 한성백제

털보나그네 2008. 5. 31. 18:10



단재 선생님의 조선 상고사 내용을 대략 요약하여 소서노의 백제건국과정을 소개 합니다.

 

추무왕의 고구려 건국에 우태의 처였던 소서노가 추무왕에게 개가하여 전 재산을 기울여 고구려를 창

건, 이에 추무왕은 소서노를 정궁으로 대접하고 비류, 온조가 친자식이 아님에도 사랑하기를 친자식처

럼 하나 누리(유리 태왕)가 모친 예씨와 동부여에서 돌아오자 예씨가 제 1황후, 소서노는 소후가 되고

태자도 누리가 되었다.

 

이에 비류, 온조가 상의하기를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모친에게 있거늘,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설 곳이 없다.


대왕이 계실 때에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누리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디에 서겠느냐?
차라리 대왕이 살아계실 때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다."하여 이 뜻

을 소서노에게 고하고 소서노가 추무왕에 고하여 소서노 모자는 다수의 금은보화와 오간, 마려 등 18명

을 데리고 최씨 낙랑국(소위 한사군이라는 낙랑군이 아니고 열국 시대 평양에서 세를 떨치던 우리 민족

의 나라임)을 거쳐 마한으로 들어갔다.(요서로 간것이 빠져있씀)

 

소서노는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으로 백리 떨어진 미추홀과 하북위례홀 등지를 얻어서 소서노

가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이후 소서노는 재위 13년만에 죽고 비류, 온조 두 형제는 새 도읍 문제로 의견이 충돌, 비류는 미추홀,

온조는 하남위례홀에 각기 도읍을 잡았는데 비류의 미추홀은 토지가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이 살 수 없

어 인민들이 많이 달아난 반면, 온조의 하남위례성은 토지가 기름지고 농사가 잘되어 인민이 잘사니 이

에 비류는 분해서 병이 나서 죽고 그 신민이 모두 온조에게로 오니 동,서 양 백제가 다시 하나로 되었다.

이후 온조는 마한을 점령하고 그 주위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본격적으로 백제의 기틀을 마련한다.

 

미스터리 한성백제.

 

 소서노가 그의 아들 비류와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자리를 잡은곳은 비류는 미추홀(인천) 온조는 위례(하남)이였다.

두 아들은 각자의 능력으로 그지역에서 나라를 이룩해 나아갔다.비류왕자와 온조왕자는 무엇을 어떻게 했을까?......

비류는 미추홀를거점삼아 중국대륙를, 온조는 한강상류를 거점으로 한강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영역을 넓혀갔으나...

이들로 부터 비롯된 백제의 역사는 그이후 또 어떻게 변모했던것일까?....

아직까지 밝혀지지않은 많은 미스터리들...그러나 최근에 약간의 실마리를 찾게되는데....

157회역사스페셜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백제사 최대 미스터리, 한성백제의 왕성은 ?

700년에 가까운 백제의 역사 가운데 공주와 부여에 도성을 정한 시기는 고작 185년... 나머지 500여년간의 역사를 차지한 한성백제는 모두에게 잊혀진 왕국이었던 것이다!

2000년 동안 땅 밑에 잠들었던 한성백제의 왕성 ...

왕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이성산성,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이 거론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이 적어 어느 한 곳을 왕성으로 확정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1997년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2000여년 동안 땅 밑에 잠들어 있던 풍납토성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수백상자의 백제초기 유물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높은 관직을 뜻하는 '대부'가 새겨진 토기, 왕궁·관청에서만 사용하는 기와, 전돌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곳이 왕성으로 추정되는데 ...

2세기경, 이미 백제는 강력한 고대 국가를 건설하였다! 

온조가 백성들을 이끌고 올랐던 부아악. 지금의 북한산... 하남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그 옛날의 부아악에 올라보기로 했다. 2000여년 전,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아들이었던 온조가, 따르는 백성들을 이끌고, 앞으로 세울, 나라의 도읍을 정하기 위해 바로 이 곳 부아악에 오른 것이다. 온조는 이 곳에 서서 어디에 도읍을 정할 지 둘러보게 된다. 그리고 그의 눈을 사로잡은 곳... 북에는 한수가, 동에는 높은 산이 그리고 남으로는 비옥한 벌판이, 서쪽에는 큰 바다가 있었던 곳, 백제의 첫도읍지, 하남위례성은 그렇게 정해졌다. 부아악은 온조에게, 하남위례성을 점지해 준, 산이었던 것이다. 

절대왕권 아니었다면, 현실적으로 쌓을 수 없었던 풍납토성의 존재. 이것은 곧, 4세기전, 이미 한성백제가 고대왕국이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삼국사기초기기록을 믿게하는 또 다른 유적이 한강이북에서 발견됐다. 경기도 파주군 육계토성.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때부터 한성백제가 멸망할 때 까지 500년 기간동안, 한성백제는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부일대를 장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97년 한강이북에서 최초로 한성백제의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집자리 육계토성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지만, 집자리 등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2,3세기에 세워져, 몽촌토성보다 축조연대가 앞서는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육계토성은, 임진강 바로 남쪽가에 흙으로 쌓아진 성으로, 여러 가지로 풍납토성과 유사하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초기기록, 그러니까 초기백제나 초기신라에 대한 기록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제를, 3세기 중, 후반 고이왕 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고대국가 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실체가 아예 없었거나, 있었다하더라도 변변찮은 동네국가 정도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고이왕 이전, 백제는 이렇게 풍납토성이라는 거대한 성을 쌓았을 정도로 그 규모나 세력이 대단한 국가였던 것입니다. 동네국가정도가 도대체 무슨 수로 이런 대규모의 성을 쌓을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모든 발굴작업이 끝나봐야 그 정확한 진실을 알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500년의 왕성으로 가장 유력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그 신비의 베일을 벗고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초기백제의 실체... 그것을 오롯이 되살려 내는 것, 그것은 바로 백제의 재발견일 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 역사의 재발견이 될 것입니다. 

 

                                                                                   [출처] 157회 백제사 최대 미스터리, 한성백제의 왕성은 어디인가? |작성자 잉글랜드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백제는 온전한 백제가 아니었다...빙산의 일각일 뿐이였다.아직 알지 못하고 찾지 못한 많은 사실들이 역사학자들의 노력으로 그 전말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서울은 조선시대의 한양(漢陽)으로만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이전 고대백제제국의 첫 도읍지이고 우리민족의 혼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고토의 땅이였음을 그리고 북한산은 그것들의 중심축이였음을 알아야 할것이다...북한산은 지금도 그 모든 진실들을 알면서도 묵묵히 ...언제나 그자리에서 바라만 보고있다..그리고 말없는 말을 하고있다...

 

풍납토성

선문대학교 고고학과 이형구 교수가 측량한 결과, 풍납토성은 둘레가 약 3.5km, 밑변이 30~40m, 높이가 15m, 넓이 약 26만평으로, 현존하는 토성 중 대한민국에서 최대 규모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이 성이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축정된 것이라고 2000년 4월에 발표했다. 성의 규모와 축성 시기를 보았을때 당시 이 성을 축조한 백제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국가 체제를 수립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이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중국 은나라의 수도 유적이다. 9.9m이상의 성벽을 가진 9km의 유적은 1만 여명이 일년에 330일씩 18년 이상을 작업해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에 비추어보았을때 풍납토성도 그만한 인력을 동원하여 장기간 시간을 들여 축조할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한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풍납리식 민무늬토기·신라식 토기들과 그물추·물레·가락바퀴(방추차)·기와 등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더욱 연구·조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백제불교 초전법륜지 '불갑사' :: 대웅전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의 전법(傳法) 및 창건(創建)
 

불갑사(佛甲寺)는 호남(湖南)의 명찰(名刹)로 유서(由緖)깊은 고찰(古刹)이다.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인도스님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남중국 동진(南中國 東晋)을 거쳐 백제 침류왕 1 년에 영광땅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에 최초로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이 절이 제불사(諸佛寺)의 시원(始原)이요 으뜸이 된다고 하여

불갑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옛 백제지역의 고찰(古刹)을 대부분이 백제가 멸망되면서 백제서기가 유실되어 그 창건역사를 고증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어렵지만,

불갑사 고적기(古蹟記)에서 불갑사의 최초 창건을 "羅濟之始 漢魏之間"이라고 하여불갑사가 백제초기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과, 이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구전(口傳)과 지명(地名), 사명(寺名), 그리고 마란난타존자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서 어느 정도의 확신은 가능하다.

마라난타존자가 최초 상륙했다는 법성포(法聲浦)의 백제시대 옛 지명은 아무포(阿無浦)로 불리웠으며, 고려시대 부용포(芙蓉浦), 고려말 이후 법성포로 되었다.
아무포는 나무아미타불의 음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이는 마라난타존자가 중국에서 백제에 당도할 때 아미타불상을 모시고와 처음 도착한 포구가에

모셔 놓았었다는 구전과 마라난타존자가 극락정토신앙과 염불을 중심으로 불법을 교화했었다는 점, 그리고 인도스님에 의한 백제포교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일본쪽 설화

(살아있는 몸을 가진 아이타 여래가 천축에서 교화를 마치고 백제로 날아와 내전 위에 나타나 눈부신 빛을 내어 궁중을 다 비추니...용안이 빛을 잃고 신하들이 혼비백산하였다. 이때 여래가 군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근신하지 마라. 너희 왕이 옛날 천축에서 월개 장자로 있을 적에 극락세계의 나를 청하여 공경하고 공양하였기에 지금 이 나라 임금이 되었으나 향락에 빠져 주야로 악업을 지어 3악도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너희를 제도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느니라..."
그 뒤 큰절을 지어 여래를 받들게 되니 비구들이 별같이 절 안에 늘어서서 주야로 경전을 외고 군신이 밖에 구름처럼 모여 조석으로 그 명호를 불렀다. 온 나라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공경하며 예배하였다)는 선광사 연기(善光寺 緣起)의 기록을 볼 때 마라난타 스님은 포구에 상륙한 후 아미타불 정토신앙을 전파했을 것이며 이로부터 아무포라고 불리다가, 불법을 꽃피웠다는 의미의 부용포, 뒤에는 더 명확하게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라는 의미의 법성포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고려 태조 때부터 불리우게 된 영광(靈光)이라는 지명은 우주법계와 억만생령이 본래부터 함유하고 있는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불법을 들여온 은혜로운 고장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한 아미타불을 다른 말로 "무량광불"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무량한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영광이라는 말과도 의미가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지명도 불교 명칭이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마라난타 스님이 동진에서 오자 왕이 교외로 나가 궁궐안으로 맞아들여 예경함으로써 백제불교가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한산에 사찰을 세우고 열명을 출가 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어보아야 할 것은 마라난타존자는 공식적인 국가적 전교사절로 온 것이 아니라면 국왕이 처음부터 마라난타존자를 영접했다고 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에 당도하여 영광의 법성포 및 불갑사 지역, 나주의 불호사 지역 등 남쪽지역에 교화의 발길을 재촉한 뒤에 당시의 수도인 한산으로 향해 온다는 이야기를 국왕이 듣고 나서 궁궐로 영접해 들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삼국사기에서는"마라난타존자는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어, 불에 들어가도 타지않으며 쇠붙이나 돌로 변신할 수 있는 등 무궁무진하게 화현(化現)하였다." 라고 하였고, 해동고승전에서는 "신통한 이적으로 사물에 감통(感通)하니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방으로 돌아 다니는데 뜻을 두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교화의 인연이 닿는 곳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나서서 갔다." 라고 하여 마라난타존자의 신통력과 불법전파의 열정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나주 불호사의 상량문과 단청기에는 마라난타존자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로 상륙하여 불갑사와 불호사를 창건한 후 한산으로 올라가 불법을 전파했다고 전래 되어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간접적 고증자료 이기도하다.
마라난타존자의 불법전래 후 392년 백제 아신왕은 불법을 믿으라는 교령을 전국적으로 내리게 된다.
그 후 약 140년간 불법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고 단지 미륵 불광사 사적의 "백제 성왕 7년(526년)에 겸익이 인도에서 배달다삼장과 함께 범어(梵語)원전 논장(論藏(아비달마))과 5부 율장(律藏)을 가지고 귀국하자 왕은 나라안의 명승 28인을 소집하여 겸익법사와 함께 율장 72권을 번역하게 했다."

는 점과, 조선도교사(이능화著)의"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달리 도교가 발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불교가 성행하여 승려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고 하는 기록을 통하여 백제시대에 불교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역시 불갑사도 백제 말기까지 여전히 사원의 역할을 유지하고 수행교화의 도량으로 융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할 때 영광지역의 저항이 거세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불갑사도 전화를 면치 못하고 쇠폐했었으리라 짐작된다 

 

 한성백제(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시대에 축조된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의 터(사진)가 발견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의 미래마을지구를 발굴 조사한 결과 길이 21m, 너비 16.4m에 이르는 육각형 모양의 대형 건물 터(면적 105평)를 발견했다고 12일 밝혔다.

출토 유물로 볼 때 기원후 200년 쯤에 축조된 것으로 조사단은 추정하고 있다.

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신희권 학예연구관은 “당시 백제 고위 계층의 주거지도 20평에 불과하다”며 “이 건물은 집회 장소 등으로 사용된 공공시설로 보인다”고 말했다.

풍납토성의 중앙에 있는 경당지구에서는 ‘여(呂)’ 자 모양의 제사 건물터(길이 16m, 너비 14m)가 발견된 바 있다.

.




조사단은 이번에 건물 터가 발견된 미래마을지구는 토성의 중앙 서쪽에 있어 경당지구와 함께 토성에서 가장 중요한 궁전과 관청, 제사 터가 집중된 왕성의 핵심지역일 것으로 보고 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흠정만주원류고’의 가치

광복이후 일제에 의해 왜곡된 백제사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연구인력의 제한과 문헌자료의 부족 등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백제사 인식체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 때 편찬된 책이다. 흠정이란 황제의 저술 또는 황제의 칙명에 의해 만들어진 저술을 뜻한다. 청나라 건륭 43년에 아계(阿桂) 등이 칙명을 받들어 편찬한 이 책은 부족, 강역, 산천(山川), 국속(國俗) 네 부문으로 나누어 총 20권으로 간행됐다.

당시 이씨조선은 친명배청(親明排淸)정책을 견지하는 바람에 조선과 청의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한국 고대사를 의도적으로 미화했을 리 만무하다. 단지 자신들의 터전인 만주의 고대사 원류를 추적하다보니 우리 민족사의 한 축인 백제사와 만나게 되고 그것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기술했다고 봐야 한다. 이 ‘만주원류고’에 보이는 백제는 후진적이고 허약한 나라가 아니라 강토는 광대하고, 인구는 많고, 역사는 깊고, 문화는 우수하고, 국력은 강대한 대제국이었다.

광복된 지 어언 60년인데 우리가 아직도 식민사관의 잔재를 벗지 못한 채 고대사연구를 국내의 한정된 자료에 의존하면서 ‘흠정만주원류고’와 같은 소중한 역사기록을 방치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요서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


백제가 요서(遼西)를 지배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송서(宋書)’ 97권 백제전에 실려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지배하고 백제는 요서를 지배했는데 백제의 소치(所治)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백제의 소치(所治)’라는 표현이다. ‘치(治)’는 고대사회에서 도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군치(郡治) 현치(縣治)일 경우에는 지방장관이 거주하는 군청, 현청 소재지를 뜻하고 국가의 소치(所治)는 소도(所都) 즉 국도를 의미했다.

예컨대 ‘한서(漢書)’ 고제기에 ‘치진중(治秦中)’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치’는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성이라는 뜻으로, 한(漢) 고조가 진중(秦中)에 수도를 정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백제소치’도 백제국의 도성, 즉 국도를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이런 고기록을 근거로 ‘백제의 국도는 요서에 있었다(國都在遼西)’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한국사학계는 그동안 이 ‘치’를 도성이 아닌 통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는 요서 진평군은 과연 중국의 어느 지역일까.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통고(通考)’에는 그 지역을 ‘당나라 때 유성과 북평의 중간지점’이라 했는데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다시 마단림의 견해를 기초로 이곳을 청나라 때 금주, 영원, 광녕 일대라 추정했다.

그러면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역에 국도를 정했다가 한반도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흠정만주원류고’는 그 시기를 양나라 천감(天監)시대로 보았다. 천감이란 중국 양나라 무제의 연호로 천감 1년은 서기 502년이며 신라 지증왕 3년, 고구려 문자왕 11년, 백제 무령왕 2년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백제 수도가 본래는 요서에 있다가 무령왕 때 비로소 남쪽 한반도로 천도해 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양서(梁書)’ 백제열전에 있다. “진(晉)나라 때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남제(南齊) 천감시대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그 후 남한(南韓)지역으로 옮겨갔다.”

‘삼국유사’는 ‘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왕의 거처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했다. ‘북사(北史)’의 백제국에 대한 설명 가운데는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居拔城)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고마성의 고마는 곧 곰(熊)을 뜻하므로 웅진성의 우리말인 ‘고마나루’의 ‘고마’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거발성은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흠정만주원류고’는 거발성이 바로 요서의 진평성(晉平城)이라고 적시했다.

  
양나라 때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양직공도(梁職貢圖)’를 보면 ‘백제국기(百濟國記)’를 인용하여 ‘백제는 옛날의 내이(萊夷)이며 마한족이다’라 했다. 내이는 우이와 함께 청주(靑州), 즉 오늘의 산둥성 일대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하나다(‘서경’ 우공편). 산둥성 내산(萊山) 밑에 살아서 그들을 내이(萊夷)라 불렀는데 내산은 바로 오늘의 칭다오와 옌타이 일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71년에 북제(北齊)가 백제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의 직을 수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동청주는 오늘날 산둥성 자오저우완 일대에 해당된다. 역사학자 허광웨는 ‘부유인이 본래는 산둥성에 있다가 차츰 이동하여 춘추시대에 요서에 도달하고 전국시대에 다시 오늘의 지린성 부여지역에 도착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록들을 미루어 볼 때 원래 한반도 지역에 있던 백제가 중국의 요서에 진출하여 요서, 진평을 잠시 경략했다기보다, 대륙의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백제 세력이 나중에 차츰 남하하여 한반도에서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의 요서 지배에 관한 기록은 ‘송서’ 이외에도 ‘양서’ 백제전, ‘남사’ 백제전, ‘자치통감’ ‘위서물길전(魏書勿吉傳)’ 등에 나타나는 명백한 사실임에도 일본의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를 위시한 식민사학자들은 대체로 이를 부정하거나 묵살하는 태도를 취했다. 요서 지방은 한반도 서남부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천 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백제가 이곳에 진출해야 할 필요성이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교 국사교과서는 ‘백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다”라고 기술하여 백제의 요서 지방에 대한 지배를 진출로 폄훼했고, 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술 더 떠서 “근초고왕은 해상무역에도 힘을 기울여 요서지방에 무역기지로서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하여 지배와는 상관없는 무역기지의 건설로 왜곡했다. 이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를 탈피하지 못한 데서 온 오류다.

대륙 백제의 수도 요서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은 미궁에 싸인 한성 백제 이전의 백제사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


왕과 제후 거느린 대제국

‘흠정만주원류고’ 3권은 “사서(史書)에 ‘백제는 무예를 숭상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했는데 그 말은 전혀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다”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이 말을 잇고 있다. “백제는 여러 제후나 왕을 세워 그들의 공훈에 보답했는데 송(宋), 제(齊)나라 시대로부터 이미 그러했다. 이는 백제의 땅이 넓고 백성도 많았다는 증거다.”

일부 사학자들 중에는 ‘백제가 왕과 제후를 거느린 대제국이었다’고 말하면 코웃음을 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흠정만주원류고’의 이 기록은 ‘남제서(南齊書)’ 백제전에 나타난 사료를 근거로 한 것이다.

‘남제서’ 백제전에는 “건무(建武) 2년에 백제의 모대왕(牟大王)이 자기의 신하 사법명을 매라왕, 찬수류를 벽중왕, 해례곤을 불중후, 목간나를 면중후로 책봉한 뒤 형식상 남제에 국서를 보내 승인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건무는 남제 명제(明帝)의 연호로 서기 494년이며 신라 소지왕 16년, 고구려 문자왕 3년, 백제 동성왕 16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백제의 동성왕 시대에 백제가 자체적으로 왕과 제후를 책봉했다는 이야기인데, 모대왕이 남제에 요청한 사법명 등의 왕후 관작칭호 앞에 붙여진 명칭이 대체로 북 중국의 동부해안 지대 지명인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백제의 왕과 제후는 단순히 명의상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실제 백제세력이 이 지역 해안지대까지 뻗쳐 있었음을 말해준다.

옛날 천자(天子)밑에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이 있었다. 제후와 왕공을 분봉(分封)하는 것은 대제국의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구려가 비록 강성했지만 왕과 제후를 책봉했다는 역사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룩한 후에도 왕과 제후를 거느리지 못했다.

그런데 백제가 ‘중건후왕(衆建侯王)’, 즉 자체적으로 여러 제후와 왕을 책봉했다고 하는 것은 백제는 제후국이 아니라 대제국이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백제의 강역은 서북으로는 광녕, 금주, 의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성, 개주, 동남쪽으로는 조선의 황해, 충청, 전라도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강역은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었다. 또 위(魏)나라 때 물길(勿吉)과 도모해 고구려 땅을 빼앗아 동북으로는 물길과도 이웃해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또 신라의 60~70성을 취하여 그 강토가 더욱 넓어졌다.” 이것은 ‘흠정만주원류고’에 나오는 당시 백제의 강역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백제는 융성기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의 서북과 동북쪽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소유했고 이런 기초 위에서 왕과 제후를 거느리는 제국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서력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경주 평야에 신라를 세웠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압록강 중류의 동가강 유역에서 건립했으며,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한강유역에 터잡고 출발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 중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됐고 20년 후 고구려, 그로부터 다시 19년 후 백제가 성립됐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기록을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는 처음에 백제의 부용(附庸) 국가였는데 나중에 가라, 임나 등 여러 나라를 겸병하여 백제와 대등한 이웃나라가 됐다.”

‘흠정만주원류고’는 무슨 근거로 이러한 논리를 전개한 것일까. 아마 북사(北史)의 다음 기록을 참고한 듯하다. “신라는 백제에 부용되어 있던 국가다.” 여기서 ‘부용’이란 큰 나라에 부속된 작은 나라, 즉 독자적으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국가를 말한다. ‘맹자’에는 ‘강역이 50리가 안 되어 제후에게 부속된 작은 국가를 부용국이라 한다’는 설명이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신라는 원래 독립국가가 아니라 백제의 부속국가로 있다가 나중에 차츰 발전하여 독립국이 된다. 그렇다면 백제보다 먼저 신라가 건국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신라와 백제의 출발을 놓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 기록이 이처럼 현격한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민족의 역사를 주로 한반도 이주 이후의 역사로 한정한데 반해 중국의 고대사료는 그 이전 대륙시대 역사까지 포괄하여 다룬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 것이다.

삼국 중 가장 생명력이 길었던 백제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이르렀고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금강하류로 침입했다. 이로써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함락됐다.’

이것은 백제 멸망에 대해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는 668년, 신라는 935년에 멸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상식이다. 따라서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패망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흠정만주원류고’의 기록을 통해서 본 백제의 패망 시기는 이와 전혀 다르다. 아마 ‘북사(北史)’와 ‘구당서(舊唐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참고한 듯하다.

‘북사(北史)’에는 “백제에는 5방(五方)이 있고 방은 10군(郡)을 관리한다”라고 했고, ‘구당서(舊唐書)’에는 “6방이 각각 10개군을 관리한다”라고 했다. 두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군이 50개 내지 60개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해 빼앗은 것은 37군이다. 빼앗지 못한 군이 5분의 2나 된다. 이것은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보존됐음을 뜻한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멸망한 백제는 일부분에 불과하며 절반 가까운 세력이 그대로 남아 백제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는 것이 ‘흠정만주원류고’의 주장이다. 또한 삼국 중 백제가 최후까지 남았다는 사실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후당 시기에 백제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사서에 실려 있고 원(元)나라 때도 백제가 중국과 내왕한 사실이 사서에 등장한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1280~1367년까지 존속했다. 이를 근거로 추정하면 백제는 935년에 멸망한 신라보다 최소한 수백년 가량 더 존속했고, 따라서 백제는 삼국 중 최후까지 남아 있었던 나라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느 민족이나 자기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미화하고 과장하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미화나 과장은커녕 오히려 축소되고 폄훼된 경향이 짙다. 중화 중심의 사대(事大)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백제사는 두 번에 걸쳐 크게 왜곡되는 수난을 겪었다. 첫째, 고려 시기 신라 중심으로 삼국사의 정통을 세우는 과정에서 초기 백제사의 상당부분이 삭제 혹은 훼손되었다고 본다. 둘째, 일제에 의한 왜곡으로,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먼저 한국사 연구에 손을 댔는데, 이때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백제사를 총관(總觀·전체를 대충 살펴봄)하는 ‘백제약사’와 ‘백제사강화’를 저술했다. 이마니시의 백제사 서술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백제가 신사시대(信史時代)로 들어간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고 그 이전은 전설의 시기로 파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가 왜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보호와 통치하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마니시의 이와 같은 백제사 인식체계는 백제의 후진성과 타율성을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百濟이야기(졸본부여에서 밝지까지)-1  (0) 2008.07.26
관곡지(7/9)  (0) 2008.07.09
강희맹  (0) 2008.05.19
하연정숭의전설.  (0) 2008.05.17
일본의국보1호  (0) 2008.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