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에 있는 사진은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고, 오른쪽에 사진은 일본 고류사에 있는 일본 국보 제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우리 것은 금동으로 만들었고 일본 것은 나무로 만들었다는 것 외에는, 마치 쌍둥이 불상을 보는듯 흡사하다.
반가사유상은 太子상으로써 석가여래가 젊어서 왕궁을 빠져나와 속세로 들어가 수도하면서 깊은 사유에 잠기셨던 당시의 모습이다. 이같은 인도의 방식이 중국에 들어와 처음에는 태자상으로 조성되었으나, 점차 미륵보살로 불리우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당시 삼국에 크게 유행하던(6-7세기)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미륵불은 미래에 부처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기로 정해져 있는 보살이다. 지금은 도솔천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정진과 사색에 매진하고 있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안치된 <고류사>는 603년 신라에서 이주해 온 직물기술자 진하승(秦何勝)이 건립한 절이다.
신라 불상이 일본에 전해진 과정을 알아보자. 고류사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본래 신라 제26대 진평왕(579∼632 재위)이 616년에 보내준 불상이다.
일본서기에는 “스이코여왕 24년(서기 616년) 7월 신라에서 나말죽세사(奈末竹世士)를 파견하여 불상을 가져다 바쳤다”라고 적고 있다.
부상략기라는 문헌에는 “스이코여왕 24년(서기 616년) 5월3일 여왕이 병환으로 누우니, 쇼토쿠 태자는 여왕의 쾌유를 위하여 조정의 고관들에게 제 고장마다 절과 탑을 세우라고 명했다. 7월 신라왕이 높이 2척의 금불상을 보내 기증하자 이 불상을 호코지(고류사)에 안치하였다. 이 불상은 때때로 빛을 번쩍번쩍 발광하는 이적을 보였다.”라고 적고 있다.
또 다른 주목할 자료도 있는데 “스이코여왕 24년 5월3일 여왕이 쓰러지자 쇼토쿠 태자는 여러 곳에 가람을 세우도록 서원하였으며, 성체(聖體)와 똑같은 불상을 소원하자 7월 신라왕이 금불상을 보내주었다. 높이 2척이며 고류사에 안치했다.” 고 적고 있다.
이 불상은 어찌되었든 신라가 만들어 일본에 전해준 것이지요. 현대 일본의 사학자들도 국보 제1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로부터 전해왔다(水澤澄夫 ‘廣隆寺’ 등)고 인정하고 있다
"일본의 한 대학생은 이 불상에 도취한 나머지 불상과 입맞춤하려고 느닷없이 달려들었다가 그만 불상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저질렀지요. 물론 손가락은 다시 보수됐지만, 그 과정에서 이 불상의 재료가 적송임이 밝혀졌지요. 일본에는 적송이 자라지 않고 우리나라가 주산지이지요. 일본 학자들은 고류사의 이 신라 목조 불상이 일본의 고대 다른 불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적송(赤松)으로 만든 불상 즉 신라가 만든 불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요. 적송은 일명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경상북도 봉화에서만 나는 나무이다."
이 불상은 기록상의 자료, 양식의 동일성, 만든 재료 등으로 볼 때 신라가 만들어 일본으로 보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두 불상은 비슷한 양식을 하고 있지만 똑 같진 않다. 조금씩 다른 부분이 4군데 정도 있다.
1. 우리 불상은 목걸이가 있는데, 일본에 있는 불상에는 목걸이가 없다.
2. 대좌(발아래부분)를 보면 우리 불상은 발 아래 부분만 단층으로 연꽃 무늬를 조각했고,
일본에 있는 불상은 위, 아래 2층으로 만들고 연꽃을 조각한 점이 다르고요.
3. 우리 불상의 옷 주름은 일본에 있는 불상보다 굴곡이 심하게 지어져 있어 생동감이
강하게 느껴지며, 일본에 있는 불상은 옷 주름이 잘 정돈되어 차분한 느낌을 준다.
4. 우리 불상은 입 언저리와 미간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고, 일본에 있는 우리 불상은
입과 눈이 차분히 제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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