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orale - Laurens Van Rooyen
덕수궁돌담길과 인왕산 산행.
2018년12월09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영하10도이하의 한파로 꽁꽁 얼어붙었다.
오늘도 영하11도라고 한다.
9시30분경 집에서 나와 전철를 타고 시청앞에 도착.
추워서 밖으로 나가기가 싫다.
하지만 어느덧 나의 발길은 대한문앞에 서있다.
덕수궁 돌담길를 걷고싶어서 일부러 찾아왔다.
입장료는 1,000원이다.
무작정 들어갔다.
참 오랜만에 덕수궁을 찾는다...일부구간이 공사중이다.
중화문를 지나 중화전앞에 서서 광경을 보니 아무래도 뭔가 잘못안것 같다.
돌담길은 밖에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덕수궁뒷길로 접어들어 오래된 구한말 시절의 거리를 걷는것을 말함일꺼다....
이미 입장권을 끊고 들어왔으니 오랜만에 덕수궁을 돌아보는것도 나쁘지 않다.
아이들이 어릴적에 가족나들이로 가끔씩 찾았던 추억이 생각이 난다.
대한문 담장을 끼고 궁 뒷길로 접어들었다.
사진을 찍는사람들,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삼삼오오로 몰려다니며 서로 사진을 찍는다.
나에게 사진을찍어달라는 사람도 있어 최선을 다해 찍어준다...
고종의길이라는 표시가 있고 안내가 있고,경찰이 지키고 서 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가 영국대사관구간에 닿았다.
2017년08월30일자로 개통이 되었는데 58년만이란다.
1959년 영국대사관이 임대하여 일반인 통행이 제한되기 시작하여 58년만에 다시 일반인에게 돌아왔다.
이 길은 고종이 선왕의 어진이 모셔진 선원전과 경희궁으로 드나들던 길목이란다.
이길를 나오니 대한성공회의 오랜교회가 나오고 일요일인 오늘도 목회가 진행중에 있었다.
조선일보건물도 보이고 골목을 빠져나오니 광화문 광장이 눈에 들어온다.
트인 공간으로 나오니 찬바람도 불어대고 차가운기온이 옷속으로 파고든다.
길를 건너 이순신장군동산밑을 지나 세종대왕동상앞으로 지나서 광화문으로 향한다.
광화문을 통과하여 경복궁 고궁박물관으로 하여 사직공원으로 이동.
성곽길로 올라 인왕산정상을 찍고 창의문으로 가서 명찰를 받아 목에걸고 북악산을 넘고 숙정문을 지난다.
그리고 서둘러 삼청공원으로 하산.
삼청공원후문으로 하산하여 삼청동을 지나 다시 경복궁역을 향해서 걸었다.
날씨가 차가워 서둘러 전철역으로 숨어버렸다.
대한문.
덕수궁(德壽宮)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입니다.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여 행궁[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궁궐의 모습을 갖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특히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 대화재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다.
대한문(大漢門):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으로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환구단건립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다.1906년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고,1970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으로 물러앉게 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우측편에는 공사중이라 관람불가.
중화문뒤로 중화전이 보인다.
원래 2층으로 지었으나 1904년 화재 때 소실된 후 1906년 보수했다.
중화전(中和殿)
덕수궁의 정전이다. 처음에는 2층으로 지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06년에 복원했다.
중화전을 정면에 두고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한 품계석이 눈에 띈다.
중화전 내부에 있는 어좌는 왕이 실제로 앉던 자리다.
향로는 좌,우에 하나씩 두고 각종행사때 향을 피우곤 했는데 일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면 뚜껑이 소실되었다.
석어당 昔御堂.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와 임시로 정치를 행하였던 곳으로, 1904년의 화재로 원래 건물은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90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단청을 전혀 입히지않은 백골당이라 더욱 인상적이다,석어당 정면우측에는 향나무가 있고,좌측에는 살구나무가 긴 역사를 함께하며 서 있다.
준명당과 즉조당
즉조당: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던 건물로서, 1623년(인조 즉위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뒤부터 즉조당이라 불렀다.
준명당: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건물을 중건하였던 1897년에 새로 지었다.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인데,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이 나 타 버린 뒤에 즉조당(卽阼堂)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이 건물의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모양 평면을 이루고 있다.
덕홍전과 함녕전
함녕전
함녕전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하던 공간으로, 1897년(광무 1)에 건축되어 1904년(광무 8)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해 12월에 중건되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은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정광헌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설계로 지어졌다.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절충된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다.
정광헌
정면 7칸, 측면 5칸의 이 건물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설계로 지어졌다. 건축 당시부터 정관헌은 고종 황제가 다과와 음악을 즐기거나 연회를 열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정관헌의 발코니와 장식은 화려하고 아름다워 그 자체로도 훌륭한 미술관이다.
기둥과 난간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자두나무 꽃)과 소나무, 사슴, 박쥐 등이 새겨져 있다.
또한 '고요하게 내다보는 곳'이라는 건물 이름의 의미는 고종황제가 커피를 즐겨마시던 곳이라서 더욱 유명해 졌다.
준명당(浚明堂)
석조전
덕수궁 안에 있는 근대 서양식 건물. 영국인 J.M. 브라운의 발의에 의해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기본설계는 영국인 G.R. 하딩이, 내부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했으며 공사감독은 한국인 심의석,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小川陽吉], 영국인 M.H. 데이빗슨 등이 했다. 3층 석조건물로 1층에는 거실, 2층에는 접견실 및 홀, 3층에는 황제 황후의 침실·담화실·거실·욕실 등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릭오더의 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양 측면에 튀어나온 현관을 만들었다. 건물 앞의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의 건축을 모방해 지은 것이다.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덕수궁돌담길.
60년 가까이 끊겨 있던 서울 덕수궁 돌담길 1.1㎞가 7일부터 모두 연결된다.
서울시는 그간 영국대사관의 점유로 막혀 있었던 돌담길의 마지막 70m 구간을 이날부터 시민에게 전면 개방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덕수궁 대한문∼덕수궁길∼미국대사관저∼영국대사관 후문∼영국대사관 정문∼세종대로 등의 돌담길 경로가 모두 이어진다. 이전처럼 돌담길 끝자락 영국대사관 앞에서 다시 되돌아 나올 필요가 없다.
서울시는 "2014년 영국대사관의 문을 두드린 뒤 4년여에 걸쳐 대사관, 문화재청과 함께 협의하고 협력해 이뤄낸 결실"이라고 말했다.
덕수궁 돌담길 1.1㎞ 중 170m는 영국대사관의 점유로 1959년부터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돼왔다. 서울시는 협의 끝에 시 소유 부지에 있는 영국대사관 후문∼대사관 직원 숙소 앞 100m를 지난해 8월 먼저 반환받아 개방했다.
이날 연결되는 70m는 영국이 1883년 매입한 부지로 영국대사관 후문부터 정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영국 측은 보안을 이유로 개방을 꺼렸으나, 시와 문화재청은 담장 안쪽으로 길을 새로 내고 돌담에 출입구를 설치하는 방안으로 영국을 설득했다고 시는 전했다. 덕수궁과 영국대사관이 하나의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있다.
다만, 담장 안쪽 길은 덕수궁 보호를 위해 궁 관람 시간과 같이 개방·폐쇄한다.
러시아관저
불로문
조선시대 왕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창덕궁 연경당 입구에 세워진 돌문의 모형이다.
ㄷ자 모양의 단순한 형태로 돌문에 전서체로 불로문이라고 새겨져 있다.
사직공원입구.
사직단
등료정 登科亭
조선시대 서울에는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이 다섯 군데 있었는데, 필운동(弼雲洞)의 등과정(登科亭), 옥동(玉洞)의 등룡정(登龍亭), 삼청동(三淸洞)의 운룡정(雲龍亭), 사직동(社稷洞)의 대송정(大松亭), 누상동(樓上洞)의 풍소정(風嘯亭) 등으로 이를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이라고 하였다.
오사정은 조선 전기부터 무인의 궁술연습지로 유명했는데, 갑신정변 이후 활쏘기 무예가 쇠퇴하자 많은 활터가 사라졌고 일제강점기에는 활쏘기를 금지했으나 황학정만 그 맥을 이어왔다. 지금 황학정이 세워져 있는 곳은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이다. 대한제국 때까지 남아 있던 유일한 궁술연마장으로 지금도 이곳에서는 궁술행사가 열린다.
추녀마루 멋내며 잡귀 쫓는 雜像
숭례문이나 광화문 추녀마루를 바라보면 자그마한 장식물 몇개가 눈에 뜨인다. 한줄로 죽 늘어선, 사람 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도 한 것들. 거기 삼장법사가 있고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있다면….
진흙으로 빚어 만든 토우(土偶·흙인형). 잡상(雜像)이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야담집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신임 관료가 부임해 전임자에게 첫인사를 할 때 반드시 성문 문루(門樓) 위의 잡상 이름을 단숨에 외워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잡상이 무엇이길래 옛사람들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추녀마루에 잡상을 장식하고 또 그것을 줄줄 외었던 것일까.
잡상은 조선시대 궁궐의 전각(殿閣)이나 문루와 같이 큰 건축물에만 모습을 나타낸다. 잡상의 임무는 하늘에 떠도는 잡귀를 물리쳐 건물을 지키는 일. 궁궐이나 관아의 건물, 도성의 성문이야말로 왕조의 기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잡귀를 막고자 했음은 당연한 일. 민간신앙의 하나인 셈이다.
숙정문
태종 13년에 풍수가인 최양선(崔揚善)이 임금에게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면 안 된다고 청하였다. 그의 말을 받아들여 마침내 창의문(彰義門, 일명 자하문)과 함께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은 뒤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으므로 길이 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하지 않았던 곳이라 이 문을 폐쇄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나라에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陰)이며 남은 양(陽)인 까닭에 가뭄이 심할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부양하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기록 속에 숙정문으로 실려 있는데, 원래의 이름이 숙청문인 이 문이 어느 때부터 숙정문으로 바뀌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1976년 문을 복원하고 숙정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다락이 없는 암문인 것이 특징인 이 문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여겼는데, 1968년 1월에 일어났던 1ㆍ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했었고 다시 일반인에게 개방한 것은 2006년 4월이다.
삼청공원
삼청공원은 북악산 동남쪽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예로부터 삼청이라는 이름 그대로 물이 맑고 숲이 맑고 사람의 마음 역시 맑은 곳이었다.공원주변에는 수백년 묵은 소나무가 울창했던 곳이다.솔숲 위로는 산벚나무가, 아래로는 진달래와 철쭉이 많이 자라 봄이면 천상의 화원을 이루던 곳이다.
삼청터널의 등장으로 인해 삼청공원은 두 동강이가 나 휴식공간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삼청공원은 서울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공원으로 교통이 편리한데다 주변에 화랑가, 별미집들이 많아 시민들의 산책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호젓한 산책로에 주위 경치가 좋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는 삼청공원에는 고려 충신 정몽주와 그 어머니의 시조비가 있으며, 공원 한복판에는 약수터가 있다.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동십자긱과 트윈트리 타워
*경복궁의 망루 동십자각(東十字閣)
궁궐(宮闕)이란 임금님께서 일상생활을 하시며 나랏일을 보시던 곳인 궁(宮)과 궁의 문 양쪽에 있는 망루인 궐(闕)을 합해 부르는 것이다.경복궁에는 광화문에서 이어져 나간 담장의 동남쪽과 서남쪽에 망루(望樓)가 있었으나, 서십자각(西十字閣)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를 세우면서 철거되었고 동십자각(東十字閣)은 도로 확장으로 인해 담장을 안쪽으로 옮겨 쌓으면서 길 한가운데 나앉게 되었다.
*경복궁 앞에 솟아오른 쌍둥이 고목
서울 중심지에 등장한 21세기 새 간판 건물이다.2010년 11월에 완공햔 이 건물은,유리로 덮인 투명한 건물, 곡선이 물결치는 비정형 건물, 그리고 모양이 약간 다른 두 건물이 이란성 쌍둥이로 짝을 이루는 건물이다.둥그런 표면에 굵은 홈이 파인 모습이 거대한 나무 밑동을 닮아 이름도 쌍둥이 나무라는 뜻의 ‘트윈트리 타워’로 지어졌다.20세기를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가 사라지고, 21세기 서울을 대표할 새로운 간판 건물이 터와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트윈트리 타워를 설계한 이는 조병수 건축가다. 화천 이외수의 집, 파주 헤이리 황인용 아나운서의 음악카페 겸 살림집인 카메라타 등을 설계한 조 건축가는 건축 재료 고유의 특성을 잘 표현하는 건축으로 200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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