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mantu - Kyrie
삼성산
2018년06월10일 일요일.
일요일에 전국적으로 비가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어서 산행계획을 잡지않았다.
해든산악회에 포항 내연산산행이 올라와서 가보고싶었는데...비소식이 있어서 신청을 하지않았다.
토요일저녘에 비가 쏫아진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오전에 비가 그치고 구름만 잔득 낀단 예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역시 비는 오지않고 구름만 무겁게 끼여 있다.
에라모르겠다 몸도 찌부득하여 다시 누웠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어디든 가야겠다.
씻고,밥을 먹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서니 10시다.
이런 날엔 보통 삼막사로 발길를 옴긴다.
오늘도 석수역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바람도 간간히 불어주고, 그늘진 산길은 산듯한 산내음이 코를 자극한다.
유유자적,
두리번 거리며 초목들의 표정을 살펴가며 산행을 오르다보니,
벌써 나무밑에 자리펴고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아니 벌써...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비가 온뒤라 시계가 좋다.
먼곳까지 맑게 잘 보인다.
한우물,불영암를 지나 찬우물에서 찬 샘물를 마시고 먼저 도착한 곳은 깃대봉이다.
관악산의 유명세에 눌려 삼성산의 존재감이 많이 위축되어 있다.
하지만 삼성산의 삼막사를 비롯한 여러사찰이나 유적지와 깃대봉등등..
못지않게 규모와 내용을 가지고 있다.
깃대봉에서 계속 진행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길이 막혀 되돌아 오는 길이란다.
그런가?...다시 오던길로 내려와 삼막사로 발길를 돌렸다.
삼막사! 전망이 참 좋다.
비온 뒤,오늘은 먼 인천앞바다가 다 보이고, 송도며, 문학산넘어 바다가 다 보인다.
편안한 전망을 바라보며 잠시 멍~을 때린다.
산신각,삼성각으로 오르다가 삼성산 깃대봉으로 오른다.
깃대봉을 찍고 삼성산을 찍고나니 하산길이 아까 오르다 되돌아 온 그 길이다.
그 사람이 잘못알고 막혔다고 한 거였다.
시설물이 있어서 시설물옆으로 가면 되었던 것인데...
다시 삼막사로 내려와 하산길를 살펴보았다.
관악역까지 3.5km,경인교대까지 2.4km.시간은 3시40분.
경인교대로 하산,5시에 6-2번 버스를 탓다.
관악역주변에는 등산객들를 위한 많은 음식점이 있다.
술집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입은 하나같이 모두 꼬여있었다.
앞서가는 등산객의 발길도 갈지자로 걷고 있다.
언젠가의 나의 모습일 수 도 있지않을까하는 생각에 욕할 수가 없다...
노린재나무
땅비싸리
비비추(?)
석수능선으로 가는 길에는 많은 이름모를 바위들이 서 있다.
수리산 전경.
신랑각시바위.
좀더 가까이 가 보았다.
성곽이였던 흔적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록싸리.
땅비싸리.
노루발풀이 벌써 꽃을 피워 앉자있었다.
볼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였다.
사적 제343호 한우물.
석구상
한우물 근처에서는 ‘석구지(石拘池)’라는 명문이 새겨진 석재가 발견되었는데 한우물이 석구지라 불린 것은 석구상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석상은 한동안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끄기 위해 조성한 해치상으로 불렸다. 그러다 이 석상과 관련한 기록과 유적이 발견돼 돌로 만든 개, 즉 석구상(石狗像)으로 결론이 났다. 석구상은 해치로 오인될 만큼 풍수적 향취를 진하게 풍기는 유물임은 분명하다. 나아가 석구상과 호압사를 품고 있는 호암산 자체가 조선 최고의 풍수 법술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사실 호암산은 조선 초기부터 통치자의 주목을 끌었다. 높이 393m에 불과한 암산(巖山)이지만 산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관련한 호암산 설화를 꼽을 수 있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있었는데, 완공 직전에 이르면 건물이 허물어져 내리는 일이 반복됐다. 이성계가 목수들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목수들은 밤마다 호랑이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나 사납게 날뛰며 궁궐을 부수는 꿈을 꾼다고 하소연했다. 어느 날 한 노인(혹은 무학대사)이 이성계에게 나타났다. 그는 한강 남쪽의 호암산을 가리키며 그곳 호랑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호암산은 조선의 대표적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됐다.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이를 호암(虎巖)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살기등등한 호랑이 기운을 어떻게 제압해야 할까. 이성계는 “호랑이는 본시 꼬리를 밟히면 꼼짝하지 못하는 짐승이다.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라는 노인의 조언대로 호압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안심이 안 됐던 모양이다. 호암산 북쪽 7리 지점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고 불러 호랑이를 겨냥하는 활로 상징화했고, 다시 북쪽의 10리 지점에는 호랑이를 견제하는 사자암(獅子庵·동작구 상도동)까지 조성했다.
이중삼중으로 호랑이를 견제하는 한편으로 호랑이를 배려하는 당근책도 잊지 않았다. 호랑이가 좋아하는 개, 즉 석구상을 배치했다. 호랑이 꼬리(호압사 지점) 아래(남쪽)에 석구상을 지음으로써, 호랑이가 한양이 있는 북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유혹한 것이다. 또 석구상 인근에는 호랑이가 좋아하는 물웅덩이(한우물·사적 제343호)까지 마련돼 있었으니 금상첨화였다. 이 모두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비보(裨補)풍수이자 물형(物形)풍수적 논리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426/89798563/1#csidx5f26722127858409c829a5fa1d3603b
![](http://linkback.donga.com/images/onebyone.gif?action_id=5f26722127858409c829a5fa1d3603b)
석상은 한동안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끄기 위해 조성한 해치상으로 불렸다. 그러다 이 석상과 관련한 기록과 유적이 발견돼 돌로 만든 개, 즉 석구상(石狗像)으로 결론이 났다. 석구상은 해치로 오인될 만큼 풍수적 향취를 진하게 풍기는 유물임은 분명하다. 나아가 석구상과 호압사를 품고 있는 호암산 자체가 조선 최고의 풍수 법술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426/89798563/1#csidx18793e7b3252e6bb38e144644afe4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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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은 한동안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끄기 위해 조성한 해치상으로 불렸다. 그러다 이 석상과 관련한 기록과 유적이 발견돼 돌로 만든 개, 즉 석구상(石狗像)으로 결론이 났다. 석구상은 해치로 오인될 만큼 풍수적 향취를 진하게 풍기는 유물임은 분명하다. 나아가 석구상과 호압사를 품고 있는 호암산 자체가 조선 최고의 풍수 법술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사실 호암산은 조선 초기부터 통치자의 주목을 끌었다. 높이 393m에 불과한 암산(巖山)이지만 산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관련한 호암산 설화를 꼽을 수 있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있었는데, 완공 직전에 이르면 건물이 허물어져 내리는 일이 반복됐다. 이성계가 목수들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목수들은 밤마다 호랑이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나 사납게 날뛰며 궁궐을 부수는 꿈을 꾼다고 하소연했다. 어느 날 한 노인(혹은 무학대사)이 이성계에게 나타났다. 그는 한강 남쪽의 호암산을 가리키며 그곳 호랑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호암산은 조선의 대표적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됐다.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이를 호암(虎巖)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살기등등한 호랑이 기운을 어떻게 제압해야 할까. 이성계는 “호랑이는 본시 꼬리를 밟히면 꼼짝하지 못하는 짐승이다.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라는 노인의 조언대로 호압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안심이 안 됐던 모양이다. 호암산 북쪽 7리 지점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고 불러 호랑이를 겨냥하는 활로 상징화했고, 다시 북쪽의 10리 지점에는 호랑이를 견제하는 사자암(獅子庵·동작구 상도동)까지 조성했다.
이중삼중으로 호랑이를 견제하는 한편으로 호랑이를 배려하는 당근책도 잊지 않았다. 호랑이가 좋아하는 개, 즉 석구상을 배치했다. 호랑이 꼬리(호압사 지점) 아래(남쪽)에 석구상을 지음으로써, 호랑이가 한양이 있는 북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유혹한 것이다. 또 석구상 인근에는 호랑이가 좋아하는 물웅덩이(한우물·사적 제343호)까지 마련돼 있었으니 금상첨화였다. 이 모두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비보(裨補)풍수이자 물형(物形)풍수적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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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3/all/20180426/89798563/1#csidxa84824bd4e88774830d94f0910903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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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은 한동안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끄기 위해 조성한 해치상으로 불렸다. 그러다 이 석상과 관련한 기록과 유적이 발견돼 돌로 만든 개, 즉 석구상(石狗像)으로 결론이 났다. 석구상은 해치로 오인될 만큼 풍수적 향취를 진하게 풍기는 유물임은 분명하다. 나아가 석구상과 호압사를 품고 있는 호암산 자체가 조선 최고의 풍수 법술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사실 호암산은 조선 초기부터 통치자의 주목을 끌었다. 높이 393m에 불과한 암산(巖山)이지만 산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관련한 호암산 설화를 꼽을 수 있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있었는데, 완공 직전에 이르면 건물이 허물어져 내리는 일이 반복됐다. 이성계가 목수들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목수들은 밤마다 호랑이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나 사납게 날뛰며 궁궐을 부수는 꿈을 꾼다고 하소연했다. 어느 날 한 노인(혹은 무학대사)이 이성계에게 나타났다. 그는 한강 남쪽의 호암산을 가리키며 그곳 호랑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호암산은 조선의 대표적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됐다.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이를 호암(虎巖)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살기등등한 호랑이 기운을 어떻게 제압해야 할까. 이성계는 “호랑이는 본시 꼬리를 밟히면 꼼짝하지 못하는 짐승이다.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라는 노인의 조언대로 호압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안심이 안 됐던 모양이다. 호암산 북쪽 7리 지점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고 불러 호랑이를 겨냥하는 활로 상징화했고, 다시 북쪽의 10리 지점에는 호랑이를 견제하는 사자암(獅子庵·동작구 상도동)까지 조성했다.
이중삼중으로 호랑이를 견제하는 한편으로 호랑이를 배려하는 당근책도 잊지 않았다. 호랑이가 좋아하는 개, 즉 석구상을 배치했다. 호랑이 꼬리(호압사 지점) 아래(남쪽)에 석구상을 지음으로써, 호랑이가 한양이 있는 북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유혹한 것이다. 또 석구상 인근에는 호랑이가 좋아하는 물웅덩이(한우물·사적 제343호)까지 마련돼 있었으니 금상첨화였다. 이 모두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비보(裨補)풍수이자 물형(物形)풍수적 논리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426/89798563/1#csidxf0f2639443780a38cc73b7290ef0b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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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은 한동안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끄기 위해 조성한 해치상으로 불렸다. 그러다 이 석상과 관련한 기록과 유적이 발견돼 돌로 만든 개, 즉 석구상(石狗像)으로 결론이 났다. 석구상은 해치로 오인될 만큼 풍수적 향취를 진하게 풍기는 유물임은 분명하다. 나아가 석구상과 호압사를 품고 있는 호암산 자체가 조선 최고의 풍수 법술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사실 호암산은 조선 초기부터 통치자의 주목을 끌었다. 높이 393m에 불과한 암산(巖山)이지만 산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관련한 호암산 설화를 꼽을 수 있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있었는데, 완공 직전에 이르면 건물이 허물어져 내리는 일이 반복됐다. 이성계가 목수들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목수들은 밤마다 호랑이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나 사납게 날뛰며 궁궐을 부수는 꿈을 꾼다고 하소연했다. 어느 날 한 노인(혹은 무학대사)이 이성계에게 나타났다. 그는 한강 남쪽의 호암산을 가리키며 그곳 호랑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호암산은 조선의 대표적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됐다.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이를 호암(虎巖)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살기등등한 호랑이 기운을 어떻게 제압해야 할까. 이성계는 “호랑이는 본시 꼬리를 밟히면 꼼짝하지 못하는 짐승이다.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라는 노인의 조언대로 호압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안심이 안 됐던 모양이다. 호암산 북쪽 7리 지점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고 불러 호랑이를 겨냥하는 활로 상징화했고, 다시 북쪽의 10리 지점에는 호랑이를 견제하는 사자암(獅子庵·동작구 상도동)까지 조성했다.
이중삼중으로 호랑이를 견제하는 한편으로 호랑이를 배려하는 당근책도 잊지 않았다. 호랑이가 좋아하는 개, 즉 석구상을 배치했다. 호랑이 꼬리(호압사 지점) 아래(남쪽)에 석구상을 지음으로써, 호랑이가 한양이 있는 북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유혹한 것이다. 또 석구상 인근에는 호랑이가 좋아하는 물웅덩이(한우물·사적 제343호)까지 마련돼 있었으니 금상첨화였다. 이 모두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비보(裨補)풍수이자 물형(物形)풍수적 논리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426/89798563/1#csidx5f26722127858409c829a5fa1d360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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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에 깃대봉이 보인다...
조록싸리
이 바위들를 넘어서야 깃대봉으로 오를 수 있다.
깃대봉에서 바라본 관악산이다.
앞에 안테나가 있는 곳이 삼성산이고 뒤에 있는 봉이 또다른 깃대봉이다.
깃대봉위에 펼처진 풍경은 가슴을 후련하게 해 준다.
한무리의 산객들이 지나가고 나서도 한참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
바당바위.
삼성산 깃대봉에서 이어지는 산길이 안양예술공원을 지나 수리산까지 이어지고 있다.
민눈양지꽃.
마애사리공
구멍 위 꽃무늬 위에는 서영당(西影堂), 추씨(秋氏)라는 각자(刻字)가 보인다. 흔히 말하는 마애부도(磨崖浮屠)인데 부도라기보다는 사리공(舍利孔: 사리를 봉안한 구멍)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승려나 도력을 많이 쌓은 재가불자가 입적(入寂)하면 다비(茶毘: 화장)하여 남은 유골이나 사리(舍利)를 탑과 같은 형태의 부도(浮屠)에 봉안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비용과 공력이 너무 많이 든다.
따라서 자연 바위에 구멍을 뚫어 사리함(유골함)을 넣고 입구를 막으면 적은 공력으로 부도를 대신할 수 있는 개량 장례법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마애사리 공(구멍)의 예는 북한산 도선사 위의 ‘김상궁 사리탑’, 불암산 ‘학도암 마애사리공’, 불암산 ‘불암사 마애사리공’ 등에서 볼 수 있다.
반월암.[半月庵]
신라시대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삼성산에 원효가 삼막사(三幕寺)를, 의상(義湘)이 이막사(二幕寺)를, 윤필(尹弼)이 일막사(一幕寺)를 창건하였는데, 그 뒤 일막과 이막사는 없어지고 삼막사만 남았다고 하며, 고려 말기에 나옹(懶翁)이 이 절을 중창하고 반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그 뒤 1918년에는 주지 원옹(圓翁)이 이응선(李應善)의 시주를 얻어서 법당 6칸과 요사채 8칸을 중수하였고, 1942년에 암자 뒷산이 붕괴되어 법당과 요사채 일부가 도괴된 것을 원주(院主) 삼현(三賢)이 보수하였다. 그 뒤 1950년 6·25 때 타버린 것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존하는 당우로는 인법당(因法堂)·산신각 등이 있다.
반월암.
층계 양쪽으로 범어(梵語)로 쓴 ‘옴마니반메훔’ 진언이 가득 적혀 있다.
삼막사 三幕寺 (전통 사찰 제9호)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478 (석수동)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이 절은 677년(문무왕 17)원효(元曉)·의상(義湘)·윤필(潤筆) 3대사(大師)가 관악산에 들어와서 막(幕)을 치고 수도하다가,
그 뒤 그 곳에 절을 짓고 삼막사라 하였다.
사지(寺誌)에 의하면, 원효가 창건하고, 신라 말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개칭하였는데,
고려의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 하였다고 한다.
1348년(충숙왕 4)나옹(懶翁)이 이 절에 머무르면서 수도하였고,
1394년(태조 3)에는 왕사 무학(無學)이 이 절에서 국운(國運)의 융성을 기원하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1398년 왕명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범종루
명왕전(명부전)
명왕전에는 중앙에는 지장보살, 좌우로는 무독귀왕, 도명존자가 협시하고 있고 그 옆으로 시왕(十王)이 도열하고 있다.
지장보살이란 분은 석가모니불이 떠나신 후 우리 중생을 위해 성불(成佛)도 미루고 중생 제도(구하기)에 몸 바치는 분이라고 한다. ‘중생 제도를 다해 바야흐로 깨달음을 얻고 지옥이 비워지지 않는다면 약속컨대 나 혼자서는 성불하지 않겠다.
(衆生度盡 方證菩提 地獄未空 誓不成佛)’라고 하셨다 한다.
이 분 옆에는 우리가 잘 아는 염라대왕과 그 친구들, 시왕(十王)이 계신다.
흔히 불가나 민속신앙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49재(齋), 100일, 소상(小祥), 대상(大祥)을 치른다. 사람이 죽으면 시왕(十王)에게 10번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해서 일곱 번(49번) 심판 받고, 100일에 심판 받고, 1년(小祥), 3년(大祥)에 심판 받아야 심판이 끝나는 것이다. 이 때 돌아가신 영혼이 잘 보이게 도우려고 산 자들이 망자를 위해 재(齋)를 올린다. 죽은 지 일주일 후에 진광대왕에게 심판 받고, 그 일 주일 뒤에는 초강대왕에게 심판 받고…. 이렇게 하여 3년 뒤 오도전륜대왕에게 심판 받는 것으로 심판이 끝난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건축양식인 망해루(望海樓)와 명왕전(冥王殿)(경기도 유형문화재 자료 제60호)
망해루에서 바라본 전경.
시집가는 딸에게 어머니가 읽어주는 구절
'사랑하는 딸아, 네가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너는 여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남편을 돈이나 벌어 오는 머슴처럼 여긴다면 너는 하녀가 될 것이다.
네가 자존심을 내세워 남편을 무시하면 남편은 폭력을 휘두르는 폭군이 될 것이다.
남편의 말에 정성을 다해 공손히 대답하면 남편은 너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남편 친구가 놀러오면 남편을 말끔하게 단장시켜라.
남편 소지품을 귀하게 여기고 가정에 마음을 두어라.
그러면 남편이 네 머리에 영광의 관을 씌워 줄 것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유태인 어머니들이 시집가는 딸에게 반드시 읽어준다는 구절입니다.
-노인의지혜-
나이가 들면 나서지 말고, 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 뜯는 말 군소릴랑 하지도 말고, 그 저 그 저 남의 일엔 칭찬만 하소
묻거들랑 가르쳐 주기는 하나, 알고도 모르는 척 어수룩하소 그렇게 사는 것이 편안 하다오.
이기려 하지 말고 져주시구려, 어차피 신세질 이 몸인 것을, 젊은이들에게는 자랑 안겨주고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 원만하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언제나 감사함을 잊지 말고, 언제나 어디서나 고마워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시구려, 아무리 많은 돈 가졌다해도 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 거라오
그 사람은 참으로 좋은 분이셨다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살아있는 동안은 많이 베풀어 산더미 같은 덕을 쌓으시구려
그렇지만 그것은 겉 이야기, 정말로는 재물을 놓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꼭 잡아야 하오.
남들에게는 구두쇠라 들을지언정, 돈이 있음으로써 나를 돌볼 수 있고, 남들도 받들어 모셔준다는 것, 우리끼리 말이지만 사실이라오.
지난 날의 일들은 모두다 잊고, 잘난체 자랑하지 마소. 우리들의 시대는 지나갔으니 아무리 버티려고 애써봐도 이제는 마음대로 되지를 않소.
그대는 훌륭해, 나는 틀렸어. 그러한 마음으로 지내시구려
내 자녀 내 손자 그리고 이웃 누구에게서든지 우러러 뵈는 좋은 노인으로 살으시구려
미련하면 안되오 그래서 무엇인가 취미도 가져 재미있게 오래 오래 살으시구려
-삼막사 어느 신도님의 글에서-
삼층석탑(三層石塔)인 일명 살례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2호)과 사적비(事蹟碑)(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25호),
삼막사 의 승려 인 김윤후 승병장 이 려몽전쟁 시용인 처인성 전투에서 몽고군 원수 인 살리타이 를살해 한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는 설
감로정(甘露井)
호접란.(팔레놉시스)
천불전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상징하는 전각이다. 삼신불과 삼세불·천불·삼천불 등 다불(多佛) 사상의 영향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본래 천불에는 과거천불·현재천불·미래천불이 있다. 이를 각각 과거 장엄겁천불, 현재 현겁천불, 미래 성수겁천불이라 하며 천불전에는 이 중 대개 현겁천불을 모신다. 현겁(賢劫)은 불교에서 시간의 개념으로, 세상이 개벽하여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을 이른다. 불경에 따르면 현겁에 구류손불·구나함모니불·가섭불·석가모니불 등 1,000명의 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살아서도 얻지 못하고(生也不得)
죽어서도 얻지 못한다.(死也不得)
살아서나 죽어서나 다 얻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生也死也 總不得時 如何)
할 일할(喝 一喝)
삼성산 꼭대기에는 달이 밝고(三聖山頭月)
한강수는 만리까지 물결치도다.(漢江萬里波)
-정대선사 오도송(悟道頌) 일부
산신각
삼귀자(三龜字)
거북 귀(龜) 자를 전서체 등 3가지 형태로 써 놓은 이른바 삼귀자(三龜字) 암각인데, 불기 2947년(1920년) 서화가 지운영(池運永: 종두를 실시한 지석영 선생의 형님) 선생이 관세음 꿈을 꾸고 새긴 것이라 한다.
삼막사 남녀근석(男女根石)(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
칠보전(七寶殿)
삼막사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
칠보란 북두칠성을 뜻하는 말이다. 도교의 숭배 대상이었던 북두칠성은 불교에 수용되면서 칠원성군(七元星君)이 되고 북두칠성의 중심점인 북극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로 자리 잡았다.칠보전에는 치성광여래를 중앙으로 좌측에는 일광보살(日光菩薩), 우측에는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脇侍)하고 있다(경기 유형문화재 94호).
이 불상 아래 건륭 28년(영조39년, 1763년)이라는 명문이 있어 조선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칠성신앙과 다산신앙이 결합한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상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돼 있다.
삼막사 칠성각 안에 있는 조선시대의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
높이 본존불 150㎝, 좌우협시보살상 93㎝. 불상의 무릎 아래쪽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은 1763년(영조 39)에 조성되었고,
전각은 1764년에 창건되어 1881년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세로 200㎝, 가로 250㎝의 자연 암벽에 새겨진 삼존불상으로 얼굴부분이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했으며,
그 앞면에는 2층 목조전실을 설치했는데 지금은 2층에 안치되어 있다.
본존의 얼굴은 네모지고 납작한 편이지만 약간 양감이 남아 있으며, 머리 위의 육계(肉계)에는 반달형의 계주가 2개 장식되어 있다.
좁고 각이 진 어깨 위로 통견의 법의를 걸쳤으며 옷주름은 선각으로 간략하면서도 곡선적으로 처리했다.
두 손에는 보륜을 들고 있고, 다리는 오른쪽 다리만 한쪽 무릎 위에 올린 반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양협시보살상은 연화대좌 위에 합장한 모습으로 달과 해를 표현한 보관을 쓰고 있어 각각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불상은 본존불이 보륜을 들고 있는 점이나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고 칠성각에 봉안된 형식 등으로 보아 칠성(七星)의 본존불인 치성광삼존불(熾盛光三尊佛)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얼굴의 세부표현, 각이 진 어깨와 평면화된 신체, 투박한 옷주름 표현 등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우리나라 불상에서는 보기 드물게 칠성신앙과 불교신앙이 결합된 치성광여래의 예로 중요한 자료이다
평상같은 너른 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보는 경치또한 근사하다.
삼막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안테나가 있는 곳이 삼성산 정상이다.
바위로 이루워진 길이 깃대봉에서 삼성산으로 이어진다.
삼성산의 유래 또한 설이 구구하다. 보통 원효, 의상, 윤필의 세 고승이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진하던 곳이 삼막사의 기원이며, 아울러 삼성산의 산명도 이 세 고승을 정화시켜「삼성산(三聖山)」 이라 칭했다는 설이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불교계 일각에서는 불가에서 말하는 극락세계의 교주(敎主)인 아미타불과 그 왼쪽에 있는 관세음 보살 및 오른쪽에 있는 대세지 보살을 삼성(三聖)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산명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나리꽃
쑥부쟁이
경인교대로 이어지는 길은 새로 아스팔트를 깔아서 발길이 한층 가볍다.
上 善 若 水
가장 아름다운 인생(上善)은 물처럼 사는 것(若水)이라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오늘 산행내내 상선약수(上 善 若 水)를 되내였다.
지금으로 부터 2,500년전에 노자는 상선약수를 깨닭고 설파했다.
노자 曰!
인생을 살아가는 최상의 방법은 물처럼 사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흐르는 물!
그 물의 진리를 배우라고 하였다.
첫째, 물은 유연하다.
물은 네모진 곳에 담으면 네모진 모양이 되고 세모진 그릇에 담으면 세모진 모양이 된다.
이처럼 물은 어느 상황에서나 본질을 변치 않으면서 순응한다.
둘째, 물은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물은 평상시에는 골이진 곳을 따라 흐르며, 벼 이삭을 키우고 목마른 사슴의 갈증을 풀어준다.
그러나 한번 용트림하면 바위를 부수고 산을 무너뜨린다.
셋째,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물이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드넓은 바다다.
넷째, 물은 남의 더러움을 씻어주면서 남을 더럽힐줄 모른다.
이런고로 물이 상선약수(上善若水)라! 세상에서 가장 선(善)함이 물이라 했다.
물은 만물을 길러주고 키워주지만 자신의 공을 남과 다투려 하지 않는다(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은 내가 길러주었다고 일일이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물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處衆人之所惡).
그러나 큰 강과 큰 바다가 수많은 개울과 하천의 왕자로 존재하는 것은(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낮은 곳에 있어 겸손하기 때문이다(以其善下之).
谷神不死 是謂玄牝(곡신불사 시위현빈 ; 곡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현빈이라 한다.)
-노자(老子) 도덕경6장(道德經六章)
가뭄이 들어 세상이 모두 타들어가도 마르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계곡이다.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 계곡의 정신을 노자는 곡신(谷神)이라고 부르며 계곡의 정신은 죽지 않는다(谷神不死)고 했다.
즉,老子 曰,(노자가 말하기를)
물에는 일곱가지의 덕목(德目)이 있으니(水 有 七 德)
1,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겸손(謙遜)
2, 막히면 돌아갈 줄 아는 지혜(智慧)
3, 더러운 물도 받아주는 포용력(包容力)
4, 어떤 그릇에나 담길 수 있는 융통성(融通性)
5, 바위도 뚫어내는 끈기와 인내(忍耐)
6, 폭포처럼 투신할줄 아는 용기(勇氣)
7, 유유히 흘러 바다를 이루는 대의(大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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