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운악산(2016.09.18)

털보나그네 2016. 9. 18. 21:10

Autumn Rose (가을의 장미) / Ernesto Cortazar

 

 

 

 

 

운악산

 

 

 

 

2016년09월18일(일요일)

오랜만에 와보는 운악산.

악자가 괜히 붙은게 아니다.

오르는 동안 땀은 쉴틈없이 솟아졌다.

그나마 함께한 산악회 산우님들 덕으로 심심치않고 올랐다.

정상(동봉)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고 정상 바로 밑, 넓은 나무테크에서 베낭에 질머진 음식물들를 내려놓는다.

나도 어제 강화에서 사온 인삼막걸리를 내놓았다.

이것저것 줏어 먹으니 배가 부른다.

하산.

현등사에서 사찰구경을 하고 음식점을 향한다.

식당앞 밤나무밑에선 먼저도착한 사람들이 밤줍느라 정신없다.

 

식사를하고,

이야길 나누고,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술를 마시고...

 

집에는 일찍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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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등사]

신라 법흥왕(法興王) 때에 인도의 승려 마라하미(摩羅訶彌)를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이 중창하고 다시 고려 희종(熙宗)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재건하여 현등사라 이름하였고, 그후 1411년(조선 태종 11)과 1823년(순조 23)에 다시 중수하였다고 한다.

현재 경내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극락전(極樂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보광전(普光殿) 및 요사(寮舍)와 3층석탑·지진탑(地鎭塔)·부도탑(浮屠塔) 등이 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금병풍(金屛風)이 있었는데, 6·25전쟁 중에 분실되었다.

보조국사가 폐허화한 불우(佛宇)를 발견했을 때 불우는 비록 황폐했지만 석등(石燈)의 불빛만은 여전히 밝게 비치고 있었으므로, '현등(懸燈)'이라 이름붙였다고 한다.

 

 

 

 

 

 

 

 

 

 

 

 

가평 현등사 설화와 전설

천지만물은 다 그대로의 소임을 갖고 있다. 어느것 하나 이유 없이 그 자리를 지키지 아니하고 까닭 없이 그 모양새를 지니는 것도 아니다. 나라의 이름이 바뀌고 주인이 바뀌고 거기에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도 변화됐으므로 다들 천하가 바뀌었다 말한다. 그러나 바뀐 것은 현실을 지탱하는 몇몇 현상들일 뿐 그 인연과보의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었다.


기화(己和) 스님은 부처님 법이 흥성하던 고려조에 태어나 이제 유가의 가르침으로 통치 이념이 바뀐 조선의 하늘 아래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출가 수행자의 몸으로 국치의 이념을 부정하거나 존숭하는 세속적 관심은 없었다. 오직 현생의 인연을 따라 출가 수행자의 길을 오롯이 걸어 가는 한 수행승일 뿐이었다.


부모님이 월악산의 미륵부처님께 기도를 하여 태어 났다는 태생적 동기가 아니더라도 이미 출가를 한 몸은 그 전생으로부터의 기나긴 인연의 타래를 따른 것이 아니겠는가.


기화 스님도 당대의 모든 사대부들이 지향했던 삶의 여정을 따르지 않은 바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훈습하며 재기(才氣)를 인정 받았다. 그러나 그런 출세지향적 삶의 공간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스물 한 살의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겪은 것이 무엇보다 그 만만치 않은 공간의 허허로움을 온 몸으로 느끼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관악산 의상암에서 머리를 깍고 먹물옷을 입음으로 비로소 세속의 협소한 공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지향하는 대자유의 공간. 시방세계를 두루하는 활활발발한 진리의 기운으로 몸을 삼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초월하는 자유의 당체가 되고자 하는 초발심은 언제나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양주 회암사에서 자초스님(無學대사)으로부터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를 들은 것은 그의 가슴을 열어주는 큰 계기이기도 했다.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은 자유의 대지를 걷는 법. 그는 구름과 물과 같이 이 산 저 산을 다녔고 이 절 저 암자를 다니며 정법을 참구했다. 회암사를 다시 찾기도 했고 개성의 관음굴을 예참하기도 했으며 어떤 사찰에서는 ''''반야경''''을 설하고 또 어떤 산에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 용맹정진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납자의 길에서는 감격적인 불연(佛緣)의 가피를 입기도 하는 것인가.
기화 스님은 삼각산 원통사에 머물고 있었다. 서른의 나이를 훌쩍 넘어 이제 불혹(不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세간에서야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 한다지만 이미 출가하여 먹물옷을 입은 이상 그 나이에 상관없이 매일매일과 매순간 순간이 불혹의 철저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원통사를 떠나 다시 운수행에 들었다. 민초들의 가난한 굴뚝연기를 보며 끼니 때가 되었음을 알았고 산 그림자가 두터워 짐을 보고 밤이 되었음을 알아 움막 잠이라도 청했다. 운수행이란 바로 남에게 한 끼의 식사를 얻어 먹고도 만족하고 남의 집 처마 너서리에서라도 단잠을 자는 그 평온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런 일로 수행을 삼아 온 것이 역대 조사들의 간단없는 수행 의지였음이다.


운악산. 기화스님은 그 아름다운 산 자락들을 감상하며 자연이 들려주는 무언의 법문을 온 가슴으로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빼어난 산세들을 감상하며 걷고 또 걷다가 그만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세상 길아닌 곳이 어디있겠는가. 마음이 가고 사람이 가는 곳은 그 어디도 길이어야 하겠으나 인적을 따라 중생의 몸을 움직이는 길은 그 법력의 길과 사뭇 다를 수 밖에 없는 것 또한 현실 이었다.


"아차. 내가 너무 깊이 들어 왔구나. 저토록 아름다운 산세에 그만 집착심을 내었도다..."
마침 해도 저물고 있어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스님의 눈에 참으로 이상한 짐승이 들어 왔다.


"아니, 저건 사슴이 분명한데 저토록 흰 사슴은 처음 보겠구나."
사슴이란 짐승은 본래 무리를 지어 살고 사람을 보면 멀찌기서도 화들짝 놀라 도망을 가는 습성인데 빼꼼히 스님을 쳐다보는 것이 예사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맹수도 아닌 초식 동물인 바에야 가까이 가 볼 일이다 싶어 다가가니 사슴은 그때서야 달아 났다. 그런데 그 사슴은 아예 멀리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길을 안내 하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앞서 가는 것이어서 스님 또한 그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산 등성이를 넘고 깊은 계곡을 들어 갔다. 저무는 산길을 한갖 산짐승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 썩 좋은 일은 아니었으나 이미 시작한 걸음이니 끝까지 가 볼 심산이었다.


산은 이내 어둠에 젖어 들었고 밤길을 걷는 스님은 그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있었다. 달빛이 있어 칠흑은 아니었으므로 사슴의 흰 자태를 놓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따라가던 스님은 그만 사슴을 놓지고 말았다. 아니 스님이 사슴을 놓친 것이라기 보다는 어느 자리에서 사슴은 그만 그 몸을 감쪽같이 감추고 말았다.
"아니. 이 짐승이 나를 이 산중에 버려 두고 어디로 갔나."
사방을 둘러보던 스님은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탑이었다.


스님의 눈에 한 기의 탑이 들어왔고 그 주변이 묵은 절터임을 알게된 것이다. 피폐된 전각도 있어 스님은 그곳에서 밤을 지낼 수 있었다.


날이 밝았을 때 기화 스님은 그곳이 제법 우람한 가람의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부처님의 감응이리라."


날이 밝으니 절터에서 세간으로 이르는 길이 있음도 알수 있었다. 기화스님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현등사(顯燈寺)였다. 2백여년전 불일보조국사 지눌 스님에 의해 중건 되었다는 현등사에 자신이 와 있었던 것이다. 꿈결 같이 사슴을 따라 당도한 그 절이 이제 자신에 의해 다시 중건 되어야 한다는 소명감이 뇌리를 스쳤다.


사실 현등사는 신라때 인도에서 건너 온 마라가미 스님에 의해 초창되었다가 다시 도선스님에 의해 중건 됐고 그 뒤 폐허가 되었다가 지눌 스님이 다시 중건을 했던 유서 깊은 절이다. 지눌 스님은 멀리서 운악산에 사흘 동안 환한 빛이 솟아 오르는 것을 보고 달려와 절을 중건 했었다. 그 불빛은 전각에 걸린 옥등에서 발하는 빛이었고 그 빛을 인연으로 중건 했다하여 절 이름도 현등사로 고쳐 졌었던 것이다.


지눌 스님이 절을 다시 지으며 산세를 살피다가 절터의 기운이 너무 뻗쳐 나가는 것을 알고 그 기운을 막기 위해 탑을 세웠으니 기화 스님이 사슴을 따라 와 처음 발견한 탑이 바로 그 탑인 셈이었다.


"절을 짓는 인연도 중요하지만 폐허가 된 절을 다시 고쳐 짓는 인연 또한 진지한 불법의 가피가 아닐 수 없으리라."


기화 스님은 운수행을 잠시 멈추고 자신에게 맡겨진 중창의 인연을 여법하게 받아 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발원을 하고 중창불사를 위한 기도를 하는 동안 왕실과도 인연이 이어졌다. 어려운 시대, 왕실은 기화스님의 청정한 원력에 큰 감동을 받아 적잖은 시주를 했으므로 불사는 차질이 없었다.





 

 

 

 

 

 漢北第一 地藏極樂道場  " 한북 제일 지장극락도량"


가평 삼충단(加平 三忠壇)은

가평군 향토유적 제 12호로,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 488-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가평 삼충단은 한말 일제의 무단 침략에 항거한 최익현(崔益鉉),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제단이다. 정면 중앙에 '순국열사 조병세선생 추모비'가, 왼쪽에 '순국열사 최익현선생 추모비'가, 오른쪽에 '순국열사 민영환선생 추모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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