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강허달림
미안해요 / 노래 강허달림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겠죠" 무슨 의미인지??.......차갑게 식어버린 말 끝에 단단히 굳어버린 몸짓에.....
환하게 웃음짓던 얼굴, 쉬임없이 울리던 심장소리,행복이라는 작은 읊조림도, 내게는 너무 큰 세상 이었던 듯...
애써 감추며 모르는척 뒤돌아서서, 멍한 눈망울 가슴 저리고, 미칠듯이 밀려오는 그리움에 표현할 수 없어 "나 정말 안되는거니?"
이미 시작된 엇갈림속에 다시 사랑은 멀어져가고, 알면서 붙잡을 수 밖에 없었던 이마음... "미안해요" " 미안해요".
(인천)백범 김구(金九)·곽낙원(郭樂園)여사 동상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190(인천대공원 백범광장)
백범 김구선생은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다. 선생은 식민지 시대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해방운동에 분단시대에는 인류 평화에기여하는 통일운동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선생은 1876년 8월29일 황해도 해주에서 안동김씨 순영(淳永)과 현풍곽씨 낙원(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열아홉에 동학군 선봉장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고, 치하포에서는 국모의 원수를 갚아 나라에 의인이 있음을 널리 알렸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같은 위기에 몰린 구한말에는 애국 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식민지 시기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 분투하였다. 해방 후 신탁통치에 반대 궐기하였고 민족 분단을 막으려고 남북을 오가며 애쓰시다가 1949년 6월26일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일생을 민족의 지도자로서 올곧은 길을 걸었던 선생의 뒤에는 항상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여사가 있었다. 선생의 옥바라지를 위해 인천에 와서 품팔이를 하며 아들을 격려했던 여사는 선생이 두 번째 옥에 갔을 때 “경기감사가 된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아들의 용기를 북돋았다.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선생은 인천과 특별한 인연을 가졌다. 첫 번째는 치하포사건으로 인천감옥에 2년간 수감된 것이요. 두 번째는 1911년 안악사건으로 5년간 투옥될 때 다시 인천감옥으로 옮긴 것이다. 특히 두 번째에는 인천 축항공사 노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인천에서 겪은 수감생활에서 선생은 민중과 고통을 함께하는 불굴의 민족지도자로 단련되었으니 선생의 깊은 겨레사랑은 인천을 통해 얻은 결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터이다.
두 차례의 수감생활을 통해 선생과 인천이 매우 따뜻한 교감을 나눈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더구나 인천은 분단의 상처가 깊은 곳이라 38선을 베고 쓰러진 선생의 평화통일사상에 공명하는 바가 큰 고장이다. 이에 선생과의 뜻 깊은 만남을 기념하고 선생의 완전 자주 독립사상을 후세에 전하고자 인천 시민의 뜻과 힘을 모아 선생의 동상을 세우며 선생이 1949년 손수 고증하여 만드신 어머님의 동상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이 자리에 함께 모신다. 냉전의 해체 속에서 그 어느 때 보다도 통일의 기운이 성숙하고 있는 오늘 선생이 낳고 자란 황해도와 지척지간에 있는 우리 인천의 시민들은 선생의 겨레 사랑과 평화통일 사상의 뜻을 가슴에 늘 아로새기면서 우리의 다짐을 이 건립문에 새기는 바이다.
1997년 10월 15일
헌립 : 백범 김구선생 동상 건립 인천시민추진위원회 위원장 이회림
헌찬 : 인천광역시 시장 최기선
사단법인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 장충식
곽낙원·백범 모자 동상
인천을 대표하는 시민 공원인 인천대공원(남동구 장수동 소재)에는 특별한 기념물이 있다. 백범 김구와 그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그것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를 통틀어도 드문 경우가 아닌가 한다. 평생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김구는 그렇다 쳐도 인천시에서는 왜 그 어머니의 동상까지 세웠을까.
김구가 김창수로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 동학의 소년 접주시절부터 사회 의식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김창수였지만, 그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에 대한 복수로 일본인을 척살한 일 때문이었다. 이른바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창수는 재판을 받기위해 당시유일하게 외국인 관련 재판을 담당하던 인천항 재판소로 이송되었다. 이때 어머니 곽낙원과 아버지 김순영은 해주의 가산을 정리하고 자식의옥바라지를 위해 함께 인천항으로 왔다. 이때부터 김창수에서 김구로 바뀌는 인생과 어머니 곽낙원의 인생이 처절하게 겹치면서 모자가 함께 민족과 국가 의식을 표출했는 것이다.
백범과 임시정부 위해 헌신
김창수의 재판과 감옥생활은 그의 명분(국모보수)에 공감하는 많은 인천 시민들로 인해 국사범(國事犯) 대우를 받게 되었다. 재판소 주변의 많은 주민들이 김창수의 의거를 찬양하였고, 식모살이를 비롯해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옥바라지를 하는 곽낙원의 행동은 더욱 부각되었다. 김창수가 어릴 때, 어림도 없는 과거를 보겠다고 우기는 아들을 위해 잠도 못자면서 교육비를 마련하던 곽낙원의 모습이 재현된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창수가 김구로 개명하고 십 수 년이 지난 후, 이번에는 아들이 몸담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방문해야 했다. 이때 곽낙원은 남편을 잃고 혼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곽낙원의 첫 중국행은 1922년이었다. 1925년 11월 김신을 데리고 귀국할 때까지 곽낙원은 임시정부의 살림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었다.
이때는<백범일지>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상해 독립운동가들의 경제 상황이 ‘거지 중에도 상거지’, ‘걸인의 소굴’ 인 상태였다. 곽낙원은 날이 어두워지면 중국인 음식점에서 나오는 채소 쓰레기 더미에서 배추 겉대를 모아 죽을 쑤어 김구와 정부 요인들을 부양하였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로 부각
1934년 3월 19일, 76세인 곽낙원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 중국행에 나섰다. 아마도 알려진 망명객 중 최고령일 것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었다. 김인(金仁· 당시 18세)과 김신(金信· 당시 13세) 두 손자를 책임지고 나선 고단한 길이었다.
10년 만에 만난 아들 김구에게 곽낙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하고 하겠네. 또 말로 책하더라도 초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師表)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 주자는 것일세’. 이에 김구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고 표현하였다.
곽낙원은 쉬운 한글 몇 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읽을 정도로 배운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 존경을 받았고, 그들이 어려운 정황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곽낙원이 가졌던 침착하고 대범하며 경위가 밝았다는 덕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목은 자식에게 더욱 철저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의 지도자가 된 자식을 더욱 단련시켰고, 자식은 그에 보답하였다. 그리하여 김구 어머니 곽낙원이 아니라, 곽낙원의 아들 백범이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이 곽낙원인 것이다.
이정도면 인천대공원에 곽낙원과 김구 두 모자의 동상이 서있는 이유를 아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비탈진 언덕길 인천 형무소 터엔 지금
찜질방 들어서 사람들 웃음꽃 피우며 여가 즐기지만
예전 이곳은 백범 어른 잡혀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곳
국모 살해범 츠치다를 처단한 사형수 아들 위해
고향 해주 떠나 남의 집 식모살이로 밥 얻어
감옥 드나들며 아들 옥바라지 하신 어머니
삼남 지방으로 쫓기는 아들
마곡사서 머리 깎고 중 된다고 소식 끊었을 때
애간장 타셨을 어머니
인과 신 어린 손자 두고
먼 이국땅서 눈 감은 며느리 대신하여
빈 젖 물리며 길러 내신 어머니
상해 뒷골목 배추 시래기 주어
애국청년 배 채우고
광복 위해 뛰는 동포 뒷바라지로
평생 등이 굽은 겨레의 어머니
오늘도 허리띠 질끈 동여매고
오른손에 밥사발 든 어머니
겨레에게 건네는 말 나지막이 들려온다
너희가 통일을 이루었느냐!
너희가 진정 나라를 되찾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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