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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피는 꽃
- 도종환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릴 줄 알아 꽃은 다시 핀다
제 몸 가장 빛나는 꽃을
저를 키워준 들판에 거름으로 돌려 보낼 줄 알아
꽃은 봄이면 다시 살아난다
가장 소중한 걸 미련없이 버릴 줄 알아
나무는 다시 푸른 잎을 낸다
하늘 아래 가장 자랑스럽던 열매도
저를 있게 한 숲이 원하면 되돌려줄 줄 알아
나무는 봄이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
변치 않고 아름답게 있는 것은 없다
영원히 가진 것을 누릴 수는 없다
나무도 풀 한 포기도 사람도 그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바다까지 갔다가 제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제 목숨 다 던져 수천의 알을 낳고
조용히 물 밑으로 돌아가는 연어를 보라
물고기 한 마리도 영원히 살고자 할 때는
저를 버리고 가는 걸 보라
- 도종환의《다시 피는 꽃》중에서 -
남한산성
2012년12월23일.
어젠 낯부터 회사 망년회를 하고 집에 돌아와 낼은 뭘할까 궁리하다가 남한산성엘 가보겠다고 인터넷에서 검색,
전철를 타고 마천역으로 가서 오르는 코스로 정했다.
언제 갔었나 기억도 희미하다.
7시25분 집에서 나와 전철를 타고 5호선 종착역인 마천역에 도착하니 9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물어물어 근처까지 와서는 국밥으로 아침을 먹고 나니 추웠던 몸이 따듯해 졌다.
근처 사람들은 아침운동으로 벌써 올랐다가 하산하는 사람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9시30분부터 길따라 오르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대충 이정표를 보고 올랐다.
바람이 차다.
도착한 곳은 연주봉옹성이다.
북문을 향해 갔다.
눈덮힌 산야가 펼처지고 길게 늘어진 성곽길이 어서오라 손짓을 한다.
북문을 지나 벌봉,동장대터,동문,많은 암문들를 지나고,
남문을 지날땐 다리에 힘이 빠져 저질체력이 되어버린 육신을 안타까워 한다.
잠시 벤취에 앉아 차를 한잔 마시며 지나는 사람들를 보니 각양각색의 무리들이 저마다의 삶에 이야기를 나눈다.
서문으로 가서 다시 하산한 시간이 1시20분.
남한산성,볼거리도 많고 코스도 다양한것 같다.
날 풀리고 숲이 우거지면 더 멋진 모습일것 같다.
아직 보고싶은 모습이 많은데 접근거리가 멀어서 잘 안오게 된다.
청운사.
전망이 참 좋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잘 안되지만, 확 트인 벌판에 아파트가 즐비하게 서 있고 어떤 곳은 공장이 난립해 있다.
멀리 좌측에는 관악산과 청계산도 보이고 구룡산,대모산,용마,아차산,그뒤로 이어지는도봉산,삼각산이 희미하게 정면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측으로 무슨 산인지 분간이 안가는 산들이 병풍처럼 펼처져 있다.
남한산성이 아니면 볼수없는 가장 큰 장점인 이렇게 확 트인 조망을 지니고 있다.
북문.
송암정은 우리말의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 하산아여 이곳을 지나느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에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회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때 그 무리중에서 감명을 받은 기생 한사람이 갑자기 절벽으로 뛰어내려 자결하였는데 그 후 달 밝은 밤에는 이곳에서 노래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 황진이가 한양의 소세양에게 전한 7언율시.-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달밝은 밤에 그대는 누굴 생각 하세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붓을 들면 내 이름도 적어보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나를 만나 기쁘셨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이 바위에 서있는 고사목은 정조대왕이 여주 능행길에 대부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고 부르는 소나무이다.
동문.
남한산성은 장엄하고 굳건했다.
성의 둘레가 11.76Km, 성곽의 높이는 3m-7.5m로 우리 나라 1,700여 개 성 가운데 가장 큰 규모임을 첫눈에 알 수 있다.
남한산성 하면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7일 동안 청나라의 대군과 항거하다가 성문을 열고 청의 칸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했던 저항과 치욕의 역사현장으로만 떠올리지만...
백제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숨겨진 백제의 역사가 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 대왕이 남한산성을 도읍으로 정했다는 얘기도 있고,백제 사람들이 진산으로 섬기던 곳으로 그때의 유물도 남아 있다.
병자호란때보다 더 치욕적으로 일제의 역사왜곡이 감행되었다.
치욕의 사건으로 덮어버린 백제의 위대한 역사는 일제의 의도대로 우리민족의 기(氣)를 꺽고 있다.
남한산성은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으며 그 후로도 우리 역사의 축소판이었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 대왕을 모신 숭열전이 있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토성을 쌓았다.
이후 조선조 광해군 때에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했다.
인조 2년 수어사 이서와 더불어 도총섭이었던 벽암각성 대사가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축성공역에 임하였다.
남한산성 내에는 망월사, 옥정사가 있었는데 성을 새로 쌓는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하여 천주사, 국청사, 개원사, 남단사, 한흥사, 장경사, 동림사를 지어 모두 9개의 사찰이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다 폭파되었다.
현재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국청사만 복원되었단다.
남문
서문.
남한산성.
둘레 약 8,000m. 사적 제57호. 지정면적 52만 8460㎡.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시설과 관해(官廨 : 관청),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은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고,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 일명 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안에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1,897개,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 3개, 성랑(城廊 : 성 위에 세운 누각) 115개, 문 4개,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만든 작은 성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 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반, 하궐(下闕)이 154칸이었다. 궁실에 따른 건물로는 1688년(숙종 14)에 좌덕당(左德堂)을 세우고, 1711년에 종묘를 봉안하기 위하여 좌전(左殿)을 세웠다.
남문 안에는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이 있다. 1798년(정조 22) 한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 29)에 수리하였다.
관해로는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廄)·뇌옥(牢獄)·온조왕묘(溫祚王廟)·성황당(城隍堂)·여단(厲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관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수어청에는 전·좌·중·우·후의 5관(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은 북장대, 후영장은 동장대, 우영장은 서장대에 각각 진을 치게 되었고, 좌영장은 동장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은 4장대 가운데 서장대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성내에는 현절사(顯節祠)·연무관(演武館)·지수당(池水堂)·영월정(迎月亭)·침과정(枕戈亭) 등이 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란하였는데, 이 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禛)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과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壇)으로 나가 치욕적인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보수현황을 보면 1964·1965년에 동문, 1966년에 연무관과 현절사, 1967년에 지수당과 영월정, 1969년에 남문, 1972년에 연무대와 이서사당·영월정, 1973년에 번와단청(飜瓦丹靑), 1974년에 연못과 성곽 부분이 각각 보수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문은 여장을 두르고 초루(譙樓 : 성 위에 세운 누각)를 올려세워 규모가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인조는 친명배금정책을 썼다. 즉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을 멸시했다.
그러나 이때 명나라는 망하기 직전이었고, 후금은 중국 대부분의 영토를 차치하고 세력을 키워나가는 막강한 나라였다. 이때 집권세력이 서인들이었는데 서인들은 끝까지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쳤다.
청나라가 조선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고 군신의 맹약을 하자고 독촉했지만, 조선조정은 몇차례에 걸친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무시하였다. 그러자 청태종은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왔다.
청이 침입하자 조정은 극도로 혼란에 휩싸인다. 침입 14일 만에 청군이 개성에 다다르자 도성내의 주민들은 피난을 가기 시작.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인조 자신도 그날밤 도성을 빠져 나가려고했으나 벌써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길을 봉쇄하였다는 보고를 듣자 이를 포기하였다.
인조는 대책을 논의한 끝에 세자와 백관들을 대리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한다.
이날 새벽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떠나려했지만 폭설이 내려 포기했다.
남한산성에는 약 50일 정도 버틸수있는 식량이 있었다.
한편 청태종과 청군은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에 포진하였다. 별다른 싸움없이 40여일이 경과하자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완전 전의를 상실하게 된다. 이때 대신들은 끝까지 버티자는 주전파와 청군과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어 심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주화파쪽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한다.
항복을 결심한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온 뒤 한강동편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뒤 세번 절을 한다(삼전도의 치욕)
청 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봉림대군,인평대군등을 인질로 잡아갔으며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도 끌고 갔다. 끌고간 이유는 돈을 받고 여자들을 되돌려 주기 위함이었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살하거나 쫓겨나는등 문제가 심각 하였다.
또 임진왜란때 입은 피해를 복구도 다 하기전에 난이 발생한 터라 국가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더더욱 피폐헤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이 호란후 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때 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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