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이야기

성주산에서 운연천으로..(2011.11.20)

털보나그네 2011. 11. 20. 14:09

 


 


                                                                                                        Bandari 연주곡모음

 


01. My Song for You
02. The Green Glens of Antrim
03. Magic Winds
04. More Than Words
05. Silence Chariots of Fire
06. Sparkling Raindrops
07. Autumn Wind
08. Summer Waltz
09. Your Smile
10. Marcopolo


11. Melody of Love
12. Conquest of Paradise
13. Wide Open
14. I Want to Know What Love Is
15. one Day in Spring
16. The Sounds of Silence
17. Visions
18. Love Letter to You
19. Heaven's Gate
20. Lauthien

 

 

 

 

 

 

 

 

 

 

 

 

 

 

 

 

성주산에서 운연천으로...

 

2011년11월20일.(06:30~09:30-3시간)

 

어제 과식을 했으니 오늘은 운동을 해야 한다.

6시에 일어나 꾸물거리다가 집에서 나온 시간은 06시30분.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여명에  세상이 훤 하다.

산악코스를 잡고 집에서 부터 뛰여 산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기온이 쌀쌀하다.

몇번이고 다시 집에 가서 옷을 갈아 입을까 망설였지만

멀어져가는 집이기에 그냥 진행한다.

추워서 그런지 언덕에서도 그리 많이 힘들진 않았다.

할미산에서 물 한모금 마시고  성주산 정상에 도착하니 07시 30분이다.

군부대 앞에 도착하니 07시50분.

 

여기서 부터는 뛰였다.

운연동입구에서 우측 굴다리를 건너 운연천을 따라 뛰였다.

아침햇살이 텃밭에 내려 앉아 있고 나무가지에 걸려있는 해는 정면에서 나의 시야를 방해한다.

이곳은 인천지하철 2호선 기지창 공사가  한참 진행중이다.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생각보다 기온이 많이 떨어진데다  바람까지 불어 채감온도는 더 떨어진다.

손이 시려울 정도니 겨울날씨다.

이길은 몇해전에 명호씨랑 한번 왔던 길인데 오늘 다시 와보니 새롭다.

아니 많이 변했다,그리고 우측에는 공사를 하고 있으니 더욱 많이 변해 있다.

주위를 살피며 앞을 보고 달렸다.

운연천이 신천과 만나는 지점에서 부터는 계천도 더 넓어지고 수량도 한층 더 많아 졌다.

방송국 송신기지를 지나 청룡낚시터를 지나가다 다리를 건너 돌아 가는 길를 택했다.

돌아오는 길은 호기심에 다른길로 접어 들었는데 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길이 연결되어 있다.

나가는 길이 통해 있겠지 하며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큰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한 곳을 지나는데 제법 큰 묘역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 여발 묘(李 汝發 墓)라고 적혀 있고 그의 행적이 적혀 있다.

조선 숙종때 무관을 지냈던 선조의 무덤임을 확인하고 있는데 백구 한마리가 어찌나 열심이 지져 대는지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큰길로 나가는 통로가 보여 나와 보니 양평해장국집 옆길로 나온다.

며칠전부터 와이프가 양평해장국이 먹고 싶다는 말이 생각나 해장국집으로 들어 갔다.

깜짝 놀란것은 이 아침시간에 큰 홀인데도 불구하고 앉을 자리가 없도록 사람이 꽉 차 있다.

카운터에서 2인분을 주문하고 단체손님이 왔서 사람이 많은거냐고 물으니 일요일 아침은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단다.

포장한 양평해장국을 들고 아홉정거장 정도를 걸어 가기에 먼듯하여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신천

청용낚시터

 

이 곳이 명당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대로 명장을 배출한 집안의 묘 치고는 좀 소박하고 규모가 작아 보인다.

조선의 무관인 이여발(1621∼1683)의 묘이다.

이여발의 자는 군실(君實), 시호는 정익(貞翼)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의배(義培)의 손자로서 조선 효종 2년(1651) 무과에 급제, 비변랑(備邊郞), 도총사를 거쳐 숙천(肅川)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충청병마절도사를 거쳐 특히 회령(會寧)부사에 보직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오르고 한흥군(韓興君)에 봉해졌는데, 회령은 북방의 거진(巨鎭)으로서 야인(野人)들과 서로 무역하는 시장이 있어 야인상인들이 오는 정원도 없고 체류하는 기한도 없어서 우리의 피해가 많았다. 이때 이여발이 부임하여 상인의 출입인원을 320명 이내로, 체류일수를 20일 이내로 규정하여 피해를 줄였다. 현종 때 병·공조참판에 특진했으며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가 성을 수축하고 군사들에게 사예(射藝)를 연습시키는 한편 병기를 준비하여 북방 수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어영대장, 한성부 좌·우윤을 역임하고 숙종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사망하였다.
분묘의 형태는 호석이 없는 봉분 앞에 비석과 상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문인석 한 쌍이 세워진 평범한 묘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분묘 앞 10여미터 아래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운연천

남동구 운연동 소래산과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운연동을 반으로 가르지르며 흘러 경기도와의 도계에서 뱀내천과 합류되는 소하천이다.

하천의 이름 운연천은 운연동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운연동의 지명 유래

운연동은 워래 인천부 조동면 음실과 연락골 등의 지역으로 1903년 8월 인천부가 관할 동리명을 확정할 때 상음리, 하음리, 연락리로 나뉘어졌다. 1906년 연악리로 단일화 되고 다시 1914년 3월 1일 부천군이 신설되면서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4월 1일에 남촌면과 조동면이 통합하여 남동면이 되니 그 관할이 되었고 1914년 11월 20일 운연리로 개칭되었다. 1040년 4월 1일 다시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운연정이 되었다가 1946년 1월 1일 운연동으로 개칭하였다. 1977년 5월 10일 시조례 제 1075호에 의해 법정동인 운연동은 서창동에 합하여졌다.

운연이란 음실의 뜻에서 오는 구름의 '운'과 연악의 '연'자를 따서 지음 마을 이름이다. 이 운연동은 옛날 숲이 우거지고 나무가 많아 각종 새들이 집을 짓고 살면서사시사철 지저귀고 구름도 한숨 쉬어가는 곳인데, 수원 인천간 산업도로(42번 국도)가 뚫리고, 제 2경인고속국도가 지나면서 개발의 열기가 높아지고 있는 곳이다.

연락골

수인산업도로(42번국도)를 따라 인천에서 수원쪽으로 가다가 인천광역시와 경기도의 경계를 조금 못미쳐 북쪽으로 도로변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바로 연락골이다. 소래산의 남서쪽 비탈에 위치하며 도로 건너 조금 아래에 음실이 있다. 인천에는 무인이 많고 또 그들이 사는 집단거주지로 무인촌이 여러 곳에 있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바로 구월동의 전재리, 운연동의 연락리, 도림동의 여무실리이다.

무당들은 관에서 거행하는 사직제, 성황제, 여제 등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각 마을에 있는 도당제에도 참여하여 의식을 주관하였다. 무당이 각 마을을 담당하는 것을'단골'이라고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단골무당이라 불렀다 한다. 각 마을에서 도당의식이 있을 경우에는, 단골무당이 책임지고 굿을 해주었다. 그 대가로 마을 사람들은 단골무당에게 가을에는 벼, 봄에는 보리를 주었다. 연락골이 '연회를 하던 마을'이라는 뜻으로 불리우게 된 것도 바로 자주 이 마을에서 굿판이 벌어져 생긴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단골'이라는 말은 지금도 '단골집','단골손님' 등의 말로 쓰이고 있다.

음실

수인산업도로(42번국도)를 따라 인천에서 수원쪽으로 가다가 인천광역시와 경기도의 경계를 조금 못미쳐 남쪽으로 내리막길의 작은 언덕에 둘러싸인 마을이다. 동쪽에는 이여발장군의 묘가 있고, 서쪽에는 도당재가 있다.

음실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소리가 나는집' 또하나는 '구름같이 높은 집'이란 뜻을 지닌다고 한다. 음실은 어쩌면 소리와 관련된 지명으로 보고 싶은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왜냐하면 이웃에 연락리가 있는데 연락리란 '연회를 하며 즐긴다'라는 뜻으로 보아 연회에서는 항상 음악이 따르고 결국, 음실 역시 음(소리)과 관련이 있는 곳임이 엿볼 수 있게 한다.

음실의 '실'은 우리말의 골(고을)이나 마을과 같은 뜻으로 불리워지는 말이다. 인천의 땅이름 노래에는 등장하는 음실은 운연동의 '운'의 근원이 되었지만 지금은 한자로 음실또는 음곡으로 쓰여져 그 본래의 뜻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게 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