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Over - Vicki Delor |
신선봉
(967m)
2017년02월19일.
산행코스:주차장-휴양림매표소-신선봉-마패봉-삼거리-치마바위-주차장.
일찌감치 좌석은 만석이 되었다.
일기예보는 산행에 문제없는 날씨,오후 늦게나 비가 온단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신선봉을 알리는 표지석이 멋지게 서 있다.
커다란 조령산자연휴양림 표지석앞에서 우측길로 빠져 올라간다.
돌도 많고 돌를 얻어놓은 돌탑도 많다.
너덜길를 지나니 언덕마루가 나오고 연어봉과 신선봉으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서 있다.
반대편에는 나무가지에 상고대가 달려있다.
바람도 차고 계속 불어댄다.
얼마안가서 신선봉에 도착,펼처진 조망은 참으로 멋지다.
주흘산과 조령산이 보이고 그 가운데로 문경새재가 있다.
구비치는 산과 산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반대편에는 월악산 영봉이 웅장하게 서 있다.
우리일행은 이곳에서 한참을 머물며 요기도 하고 사진도 찍는다.
그리고 마패봉을 향한다.
마패봉으로 가는 길은 아이젠을 착용하고 간다.
중간중간 눈과 빙판이 있어서 위험하다.
암능이 오르락내리락 재미있다.
마패봉에서 하산.
이후부턴 아이젠이 필요없다고 올라오는 산객님들이 알려준다.
조령3관문을 통과하여 다시 주차장으로 도착.
09시에 산행을 시작하여 4시간20분만에 도착하니1시20분 이다.
쉬며,놀며 6Km를 여유롭게 산행을 했다.
식당으로 이동하여 버섯전골과 소주로 주린배를 채운다.
문경읍에서 국도 3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약 2㎞를 가면 진안이다.
여기서 국도 3호선은 서쪽으로 가고 조령은 북쪽에 위치한다.
진안에서 4㎞를 가면 횡성이 길을 막고 문루가 나타나는데, 이 성은 『문경현읍지』에 의하면 초곡성(草谷城)이고 문루가 주흘관(主屹關)이다.
이 주흘관을 조령 제1관문이라 부른다.
주흘관에서 1.5㎞ 북쪽에 전조령원지(傳鳥嶺院址)가 있다.
여기서 약 1.5㎞ 북쪽에 또 하나의 관문이 나타나는데, 이 성이 『문경현읍지』에 기록된 중성(中城)이며 문은 조곡관(鳥谷關)이다. 흔히 조령 제2관문이라 한다.
조동문에서 약 2㎞ 북쪽에 동화원지(桐華院址)가 있으며, 여기서 북쪽으로 약 1㎞를 가면 영상(嶺上)에 도달하여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가 된다.
여기에 성을 쌓고 문루를 세워 조령관(鳥嶺關)이라 하며 흔히 조령 제3관문이라 한다.
조령관에서 서북 2㎞ 지점 옛 고사리면 소재지에 신혜원(新惠院)이 있고, 신혜원의 이름을 따서 신혜원마을이라 부르는데,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신풍리의 한 마을이다.
신혜원에서 서북으로 약 1㎞ 가면 이화령을 넘어 충주로 가는 국도 3호선과 만나는 소조령(小鳥嶺)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의 조령은 일반적으로 문경 제1관문에서 소조령까지 약 10㎞의 고갯길을 말한다.
관련기록[네이버 지식백과] 조령 [鳥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조령의 옛 명칭인 초재[草岾]는 『고려사(高麗史)』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등에 기록되어 있다.
초재란 ‘풀고개’란 뜻으로, 풀이 무성한 계곡을 지나는 고갯길이기 때문으로 이렇게 불렸다.
‘새재’라는 명칭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는데, 구로(계립령)에 대한 새로 난 길이란 의미이다. 일반 서민 대중은 ‘초재’를 새로 난 고갯길이란 뜻에서 ‘새재’라고 불렀고, 이 ‘새[新]’는 ‘새[鳥]’와 음이 같아 ‘새재’를 잘못 의역하여 ‘조령(鳥嶺)’이라고 한자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조령 [鳥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충주는 조령의 북쪽에 위치하여 조령을 넘는 사람과 물자가 이곳에 모여 서울과 호서 지방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 반대로 서울과 호서 지방 등의 여러 곳에서 충주에 모여 조령을 넘어 영남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경상도의 세곡은 조령을 넘어 충주 가흥창에 모여 서울로 운송되었다. 이렇게 충주는 조령을 넘어 서울과 영남으로 왕래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거점도시였다.
특히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주를 지키지 못하면 한강을 연한 수백 리가 모두 적의 공격을 받게 되므로, 충주를 보존하려면 조령을 굳게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조령의 험준함을 막지 못하면 충주 또한 지킬 수 없다면서, 조령을 지키고 충주를 보존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시했다. 따라서 충주에는 조령로가 여러 면에서 역할이 증대되던 조선 전기에 충청도 감영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조령과 추풍령 사이에 있고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관방중지로서 무신 김명윤을 충주목사로 삼아 군병을 조련하게 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이시발(李時發)이 영(營)을 설치하여 죽령과 조령의 방어를 담당했고, 인조 때에도 이러한 시각에는 변함이 없어 검토관(檢討官) 유철(兪)은 “조령의 형세는 실로 남북으로 나누어지는 천험의 요새지입니다. 충주는 조령 아래에 있고 한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곳으로 병영을 옮겨 설치한다면 좋을 듯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현종 때 이완(李浣)은 조령에 영진(營鎭)을 설치하고 산성을 쌓아 충주의 군졸을 남한산성에서 떼어내어 조령을 지키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현종 대의 이러한 이완의 주장은 1708년(숙종 34)에 조령산성의 축조로 나타났다. 그러나 영조 이후 조령로가 중요성을 점차 잃어가면서 충주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소도시로 전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령[鳥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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