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스크랩] 역사로 본 티베트와 중국 그리고 몽골

털보나그네 2008. 3. 23. 07:33

“중화인민공화국의 각 민족은 예외 없이 평등하다. 국가는 각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고, 각 민족의 평등·단결·협조 관계를 지키고 발전시킨다. 어떠한 민족의 차별과 압박도 금지하고, 민족단결과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행위는 금지한다.
국가는 각 소수민족의 특성과 필요에 근거하여 각 소수민족 지구가 경제·문화 발전을 가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각 소수민족 거주 지방은 구역 자치를 실행하며, 자치기관을 세워 자치권을 행사한다. 각 민족자치 지역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의 분리 불가한 일부분이다.
각 민족은 모두 자신의 언어 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를 갖는다. 또한 자기의 풍속습관을 보호 유지하고 개혁할 자유를 갖는다.”

이상은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4조 전문이다. 법조문 자체에서는 문제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 티베트 사태는 왜 벌어졌을까? 역사적 맥락에서 되짚어 봤다.

위성에서 본 티베트

전통시대 티베트·몽골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상당한 정도로 예속된 경험을 가진 우리로서는 이번 티베트의 소요사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됨은 인지상정이다. 티베트·몽골·신장(新疆)·둥베이(東北)의 장(藏)·몽(蒙)·회(回)·만(滿)족이 중원의 한(漢)족과 함께 공존한다는 ‘오족공화론(五族共和論)’은 중국 혁명가들의 민족주의 구호의 핵심을 이뤘다. 과거 티베트, 몽골과 함께 조공국이었던 조선과 베트남이 독립국가를 이룬 것과는 대조된다. “중국이 부강해져서 열강의 지위를 회복한다면 조선을 비롯한 주변 약소국들이 다시 조공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孫文)은 공공연하게 밝힌바 있다. 쑨원의 민족·민권·민생 삼민주의 가운데 민족주의는 숭고한 이념이라기 보다 혁명가의 정치적 레토릭 측면이 강했던 것이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이중적인 성격을 띈다. 근현대 역사 전개과정에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반(半)식민지의 경험과 제국주의 국가가 중국을 과분(瓜分)하려 한다는 위기의식 속에 살았던 중국은 민족자결과 민족독립을 주장하는 ‘저항적 민족주의’를 지지해 왔다. 한편 책봉과 조공을 양대 축으로 하는 중국 중심의 중화세계질서를 유지해왔던 과거 중화주의의 기억은 그들로 하여금 언제라도 ‘팽창적 민족주의’로 경도될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중국과 티베트

티베트의 옛 명칭인 토번(土蕃)은 당(唐)왕조 시대 당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국가였다. 당은 황제의 공주를 티베트 왕가에 시집 보내 토번에 부마국의 지위를 인정하여 함께 병존했다. 티베트는 13세기 몽골의 원(元)왕조에 들어서 중국의 영역에 들어왔다. 이는 라마교의 조종(祖宗)으로서 티베트와 후원자로서 원왕조의 관계였다. 단순한 종속-피종속의 관계는 아니었다. 명대 역시 형식적인 조공관계에 머물렀을 뿐 실질적인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청대 강희제가 라싸에 군대를 파견(1720년)하고, 옹정제가 주장대신(駐藏大臣)과 소수 군대를 라싸에 파견(1727년)하면서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 행사가 시작됐다. 관리와 군대를 직접 파견했다는 점에서 조선에 비해서는 적극적 지배형태였다.

18세기 말 인도지배체제를 구축한 영국은 19세기 중엽 네팔·부탄에 대한 진출을 시도하면서 티베트 장악을 본격화 했다. 이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으로 인도 지배가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책의 일환이었다. 1888년과 1903~4년 영국은 티베트 출병에 나섰다. 출병의 결과로 중국과 조약을 맺은 영국은 티베트에서의 배타적 특권을 인정받고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주권은 그대로 인정했다. 이후 청조는 ‘신정(新政)’이라는 개혁운동을 추진하면서 1906년 장음당(張蔭棠)을 새 주장대신으로 파견했다. 이는 라마교의 최고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에게 있었던 통치권을 없애는 대신 티베트 왕(제후)의 지위를 되살리고, 한인(漢人) 감독을 직접 파견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도는 티베트 지배계층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 일으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한편 당시 티베트 내부 지배층은 청조, 영국, 러시아 한쪽에 가담한 친청, 친영, 친러파로 갈라져 극심한 내부 분열로 빠져든다. 일례로 1904년 영국군이 라싸를 공격할 당시 달라이 라마 13세는 러시아의 사주를 받은 몽골 군대의 도움으로 현재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몸을 피신한다. 이후 달라이 라마는 1908년 베이징으로 갔다가 영국측과의 협상을 통해 1909년 라싸로 돌아왔으나 청조가 사천지역의 군대를 1910년 2월 라싸에 파병하자 다시 영국의 보호를 받으며 인도 북부지역으로 물러난다. 마치 1959년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탈출하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중국 각 성은 독립 열풍에 휩싸이고, 당시 티베트에 출병해 있던 사천군대 내부에서도 분열이 발생한다. 인도에 있던 달라이 라마 13세는 인도총독의 지원 아래 1912년 4월 측근을 라싸에 파견 한인 관료와 주둔 중국군을 축출한 후 6월 라싸로 귀환하여 독립을 선포했다.

이후 티베트는 영국의 실제적인 분할점령과 중화민국정부의 고토(?)회복 노력 가운데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1913년 10월 인도에서는 중국, 영국, 티베트 대표가 참석하는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영국은 티베트를 몽고와 같이 내·외 두 부분으로 나누어 외 티베트를 실질적인 지배영역으로 삼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영국의 주장이 중국에 의해 거부되면서 회담은 결렬됐다. 이에 영국은 일방적으로 맥마흔 라인을 선포 외 티베트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했다. 이 맥마흔 라인은 중국과 인동 사이의 국경선 확정에 걸림돌이 된다. 아직도 중국과 인도 사이에는 미확정된 국경선이 남아 있는 상태다. 이후 1940년 다섯 살이었던 현재의 달라이 라마 14세가 즉위한다.

1950년 10월 전세계가 한반도 전쟁을 주목하고 있을 당시 마오쩌둥은 제국주의 열강(영국)의 중국침략을 타파하고 전 중국을 해방한다는 명분아래 티베트에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점령에 성공한다. 이어 11월 시짱(西藏)장족자치구 형태로 중국의 행정구역에 편입된다. 1959년 티베트 독립 봉기가 일어나자 중국은 다시금 군대를 앞세워 봉기를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달라이 라마 14세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탈출, 망명정부를 세워 지금까지 중국과 전 세계를 상대로 티베트 독립을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달라이라마14세


▶중국과 몽골

한때 세계 최대의 제국을 만들었던 몽골이 중국의 지배 아래에 놓인 것은 청조 강희제 친정의 결과다. 1696년부터 97년 사이 세 차례에 걸친 원정으로 몽골 서부 준가르 지역의 지배자 갈단체링을 패퇴시켜 몽골고원 일대를 장악했다. 이후 건륭제는 1755년 다시 준가르 원정에 나서 몽골에 대한 직접지배체제를 수립했다.

몽골의 독립 시도는 열강 러시아의 진출과 지원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2차 중영전쟁 중재의 대가로 1860년 ‘중러북경조약’을 맺은 러시아는 러시아인의 몽골에서의 상업활동 권리를 보장받는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몽골의 상층계급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여 친러세력으로 만드는 성과를 거둔다.

러시아의 몽골 진출에 위협을 느낀 청조는 한인들의 이민 장려와 목초지 개간 장려, 한인과 몽골인 간의 통혼 허용, 교육 진흥과 같은 각종 개혁정책을 실시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유목을 기반으로 하는 몽골인의 생활방식을 말살시키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몽골 왕공과 라마승 같은 지배층의 격렬한 반발을 산다.

1911년 신해혁명 전야인 7월 이흐후레에서 개최된 몽골 왕공들의 회의에서 한드도르찌를 중심으로 한 일부 왕공들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선언하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들은 독립을 선포하고 러시아 황제를 직접 방문해 보호와 지원을 공식 요청한다. 이 과정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11월 중순 한드도르찌 일파는 몽골 라마교의 최고지도자인 제브준담바 호타크트를 내세워 청조의 관료 군인들에 철수 명령을 내린다. 12월 중순 정식으로 대몽골국의 성립을 내외에 선포했다.

러시아는 신생 몽골을 정식 정부로 승인하고 12년 11월 초 러몽협약을 체결하여 몽골정부 보호를 위해 중국군대와 관리의 몽골진입 불허, 군대양성 지원, 러시아의 배타적 이권 등을 명시한다.
1915년 중국 내의 이권과 관련하여 북경정부와 타협이 필요해진 러시아는 6월 ‘중·러·몽 삼국 호부뜨협약’을 체결한다. 이 협약에서 러시아는 몽골에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몽골자치권 인정을 조건으로 중국의 몽골에 대한 전통적 종주권을 인정해 몽골은 다시 중국 영토로 규정되었다.

신해혁명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시기 티베트와 몽골의 독립 시도와 좌절 과정에서 중국은 오족공화론을 내세워 소수 민족 독립론을 이념적으로 무력화 시켰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신중국 성립 이전까지 자신들의 정강으로 주장해왔던 각 소수민족의 완전한 자결권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연방제 구성을 포기하고 이글 첫머리에서 소개한 헌법과 같이 민족자치권 보장으로 후퇴한다.


▶전통시대 중국이 주변의 강대한 이민족을 하나의 울타리로 묶어 내는데 실질적인 기능을 한 것은 중화사상이라기 보다는 ‘기미정책(羈 麻+실사변 政策)’이었다. 말의 굴레를 뜻하는 기(羈)와 쇠고삐를 의미하는 미(麻+실사변)로 이루어진 이 정책은 소를 고삐에 묶어 두듯이 변방을 속박하고 얽어매는 견제·통제책이다. 당제국 시기에 적극적으로 시행됐다. 기미정책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소를 고삐에 묶어 소가 고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고삐에 묶인 소에게는 먹이를 줘 고분고분하게 길들인다. 소를 보고 나타난 범은 소를 노리지 소주인을 노리지 않는다.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최소한 소의 위치가 경계가 되도록 한다. 향후 소의 위치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할 근거를 마련해둔다. 중국의 소수 민족 정책 뿐 아니라 인접국 외교정책의 큰 종지는 이러한 기미정책에서 출발한다.

당 이후 한족 왕조였던 송·명대에 이민족과 한족 왕조와의 관계는 당대만큼 원활하지 못했다. 지배 영토 또한 중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이민족 왕조였던 원·청대에는 타협과 무력을 적절히 구사하여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다. 청대의 국경선을 유지하고 있는 신중국은 55개 소수민족 융합정책을 내세워 과거의 ‘영화’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중화민족주의’에 그 동안 너무 경도되어 왔던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지금이라도 당대의 ‘기미정책’을 세련되게 발전시켜 한족과 소수 민족 사이에 명(名)과 실(實)을 모두 얻는 집권층의 획기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할 때다.

http://blog.joins.com/xiaokang/9312839

※ 참조 : 배경한, 「19세기 말 20세기 초 중화체제의 위기와 중국 민족주의 - 티베트·몽골의 독립요구와 중국의 대응- 」, 『역사비평』51호, 2000년 여름호

출처 : 중국살이
글쓴이 : 피칠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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