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스크랩] 고구려의 첫 도읍지_오녀산성[흘승골성]

털보나그네 2008. 2. 1. 06:48

 

 

 

고구려의 첫 도읍지_오녀산성[흘승골성]

 

 

 

 

 

환인은 역사도시이다.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환인에는 6000여년 전부터 인류가 활동해온 흔적들이 있으며 더구나 흘승골성-고구려의 도읍지가 있음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한결 더 무겁기도 하다.

환인이 최초로 지금의 이름과 비슷하게 불리워 지기는 청나라 광서 3(서기 1877)에 회인(懷仁)현을 설립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다. 그 뒤 산서성 대동현의 회인현과 이름이 중복되었던 관계로 민국 3(서기 1914)에 환인(桓仁)으로 이름을 고쳐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광복 후 환인은 본계에 편입되었다가 단동으로 넘어갔고 1968년부터는 다시 본계시에 예속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국무원의 비준으로 지금은 만족자치현으로 되었다.

환웅의 건국설화에 나오는 환인과 고구려 건국시조인 주몽이 자리 잡은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인 흘승골성으로 이어지고 다시 환인이라는 이름이 붙은데서 환인은 우리들에게 무한한 상상의 여지를 부여해주고 있다.

 

 

 

사서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환인에 대한 최초의 활동기록은 바로 주몽의 고구려건국설화와 그 수도 흘승골성, 그리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제2대 임금 유리왕의 황조가이다.

고구려의 제2대 임금 유리왕은 집정 초기에 계속 흘승골성에 있었는데 그에게는 고구려인 화희(禾姬)와 중국인 치히(雉姬)라는 두 왕비가 있었다. 서기 17, 유리왕이 사냥간 기간 두 왕비가 크게 다투어 치희가 가출을 했다. 유리왕이 쫓아갔으나 다시 흘승골성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치희는 기어코 돌아오지 않았다. 치희와 작별을 하고 나무에 기대어 있던 유리왕은 수풀속에서 날으며 춤을 추는 꾀꼬리를 보고 시 한 수를 지었다.

 

춤추는 꾀꼬리는 자웅이 함께 노닐건만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누구와 함께 할꼬.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이 시가 문학사적으로 환인지역, 나아가 고구려시대에 가장 일찍 창작된 문학작품이라는데 그 문학사적 의의가 있지만 시로부터 당시의 사회상황을 어느 정도 알 수도 있다.

즉 고구려 유리명왕이 살았던 시대는 수렵시대에서 농경시대로 전이하는 과정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화희(禾姬, 곡식 禾)는 농사일에 종사하는 여인을 말하고 치희(雉姬, 메추리 雉)는 수렵을 생계로 삼는 여인을 상징한다. 치희가 쫓겨남은 결국 농경생활이 수렵생활을 대체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수렵생활을 했던 종족들이 농경생활로 더욱 강대하고 부유해진 종족에게 밀려났던 것이다.

머나먼 고구려시대뿐이 아닌 근대에도 환인에는 일찍부터 벼재배를 해왔던 설화들이 있는데 그 최초의 재배자들이 조선사람들로 추정되고 있다.

환인에서 역사고적을 내놓고 가장 이름있는 것이 경조입쌀(京租稻貢米)이다.

경조입쌀이라함은 서울에 조공으로 바치는 입쌀이라는 말이다. 이 쌀의 유래에 대한 전설에 고려인-조선족이 등장한다.

청나라 순치황제가 서울을 북경으로 옮긴 후, 청나라 정부에서는 황족의 풍수를 다칠까 걱정이 되어 유조변(柳條邊)”을 쌓고 봉금정책을 실시해 누구든지 동북지방으로 들어가 개발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생계가 어려운 조선이나 중국의 남방사람들은 가만가만 동북지역에 들어와 삼을 캐기도 하고 재배도 하면서 생계도 유지하고 돈도 벌었는가하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던 중 환인지방으로 순찰을 왔던 흠차대신이 바로 환인에서 쌀밥을 먹어보고 십리향(十里香, 향기가 10리에까지 퍼져간다는 뜻)”이라는 입쌀의 쌀밥맛에 매료되어 청나라 왕궁에 봉금정책을 풀고 환인에 현을 설치할 것을 상주했다.

 

 

 

 

그 흠차대신이 만났던 볏농사를 짓는 사람이 바로 고구려인-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볏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고 흠차대신이 북경으로 가지고 간 입쌀도 역시 김씨성인 고구려사람이 농사지은 쌀이었다.

이 민간설화에는 김씨성을 가진 고구려인이 볏농사를 짓는 주인으로 등장한다. 그에게는 차몰이꾼과 짐을 싣고 부리는 일꾼, 그리고 함께 일을 보아주는 부하들이 있었다고 설화에는 나오고 있다. 이로부터 환인지구의 볏농사는 최초 조선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환인에는 흘승골성 유적지 밖에 이상기온대(異常氣溫帶)와 장군무덤, 길이 7000미터의 망천동 등이 있다.

장군무덤은 집안의 장군무덤이 아니다. 이름은 같지만 여기서 말하는 장군무덤은 환인에 있는 장군무덤을 말한다.

환인의 아하향 미창구촌 북쪽 500미터 되는 언덕에 큰 무덤이 있다. 무덤이 크다고해서 사람들은 그를 장군무덤이라고 부른다. 장군무덤에서 20여 미터 되는 곳에는 봉토석실묘가 10여기 있는데 장군무덤과 서로 바라보고 있는 형국을 이루고 있다.

장군무덤은 대형봉토석실묘로 료녕성경내에서는 가장 큰 옛무덤인데 길림성 집안시 5괴분의 4호무덤과 유사하다. 겉 모양이 되를 엎어 놓은 듯한 이 무덤은 주변 길이가 150미터, 높이가 9.2미터, 지면 면적이 1295평방미터인데 묘실은 6개 부분으로 나뉘였고 묘실 내벽에는 4면에 색채가 선명한 300여 송이의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주실에는 들보가 있는데 쌍용이 마주보는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곁실에는 임금 왕()자 모양의 도안이 조각되어 었으며 모두 3줄에 75송이의 꽃망울이 새겨져 있다.

고고학자들이 묘실에서 출토된 문물과 벽화내용, 그리고 기법 등 여러면으로 고증한 결과 이 묘실은 대체로 서기 500년 좌우의 무덤으로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의 무덤이다.

아직까지 어느 조대, 어떤 사람의 무덤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장군무덤, 너무나도 많은 수수께끼로 상상의 광활한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오녀산성, 그 역사의 견증 앞에

 

오녀산성이 바로 부여국에서 탈출한 주몽이 기원 전 37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했던 곳이다. 이로부터 왕성_흘승골성(紇升骨城)은 고구려 건국초기 40년간 고구려 수도로 차후 고구려의 발전을 위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환인현성에서 8km가량 떨어져 있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왕이 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를 세우면서 나라의 도읍지로 정한 곳- 흘승골성은  사면이 벼랑이요, 장방형체로 평균 해발 804미터, 주봉은 해발 824미터에 달한다.  남북길이가 1500미터, 동서너비가 300미터, 높이가 200미터나 된다. 흘승골성-오녀산성은 또 하뤄(合羅), 우룽(五龍), 우라오(五老), 위링(郁靈), 위랑(於郞, 어랑), 우위(五餘, 오여)산 등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고구려 왕국의 첫번째 도읍지 오녀산성, 여기서 역사는 숨쉬고 있다.

환인에 들어서면서 눈에 첫번째로 띄는 것이 바로 오녀산성-흘승골성이다.

환인현성을 앞에 안고 웅장히 솟아 있는 오녀산성, 그 앞에 서면 크낙한 무게가 머리 위의 천공에서부터 눌러온다.

바로 역사의 무게, 산세의 무게, 지리의 무게 그것이다.

산성, 고구려사람들은 왜서 사람들이 오르기조차 어려운 험요한 곳에 산성을 쌓았던가?

고구려 문화의 특징이 돌과 어울리는 가운데 웅장한 기세를 자랑하는 산성이다. 오녀산성, 박작성, 용담산성, 모두가 산성이다. 이는 성벽을 위주로한 중원의 군사문화와는 확연히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다.

고구려가 자랑하는 것은 무덤벽화가 아니라 산성이다. 죽은 이에게 사후의 영생과 향락을 가져다 주려는 무덤벽화와는 달리 산성은 산 사람을 위한 공사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인들의 인간본위주의사상을 엿볼 수 있다.

남에는 당나라라는 강대국, 북에는 기세찬 흥안령과 삼강평원을 등에 업은 부여국, 그리고 동남으로는 언제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신라의 포위권속에서 강성대국을 이룩한 고구려통치자들이 노린 것은 성곽에 대한 점유가 아니라 자국 인민들에 대한 보호였다.

중원의 성벽문화는 땅에 대한 점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춘추동주열국지에 보면 춘추전국의 전 과정을 거치면서 역대의 패왕들이 노린 것은 모두 성곽에 대한 점유였다. 나라와 나라사이 전쟁에서 이길 경우, 전승국에서는 전패국을 점유하고 전패국에서는 댓가로 성곽을 얼마 전승국에 떼어 준다. 그러면 전쟁은 여기서 일단락 결속을 짓게 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산성은 그런것 과는 전혀 다르다. 강대한 외적이 쳐 들어와 멸망의 위기에 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군인들 뿐이 아닌 남녀로소가 모두 산성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자기들이 살던 부락과 농전에 견벽청야(堅壁淸野)를 하고 먹을 것, 입을 것들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는다. 이렇게 수개월 버티다나면 침략자들은 지치게 되고 그러면 고구려는 반격을 가한다. 때문에 고구려의 산성들에는 모두 우물과 저수지와 양식창고자리가 있다. 그것도 수천, 수만이 몇 달간 먹고 살 수 있는 양이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산성이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바이다.

경제력이요, 기술력이요, 생산력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최종적으로는 모두 인간들이 하는 일이요, 인력(人力)이다.

고구려의 성벽과 고구려의 산성,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역사뿐이 아닌 인간본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신비의 도시_음양팔괘와 이상지온대

 

이상지온대(異常地溫帶): 이기온이상대의 동굴은 무더운 여름에는 동굴 안 온도가 섭씨 령하 10도 이하로까지 내려가고 대소한 추위에는 온도가 섭씨 령상 17도까지 올라가 사람들은 비닐하우스를 씌우고 남새까지 재배하기도 한다.

이 신기한 땅은 환인현 사첨자진에서 남쪽으로 1.5km떨어진 선영구의 산언덕에 있는데 지온이상대의 길이는 300미터, 넓이는 100미터에 달한다.

90년 전에 임만순이라는 노인이 자기 집을 수리하던 중 땅의 온도가 이상함을 발견했다. 그는 돌로 넓이 2, 깊이 2.5자 되는 작은 굴을 지었다. 이상한 것은 오뉴월염천에도 사람이 동굴 문과 6~7미터 떨어진 곳에 1~2분만 서 있어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노인은 달걀을 굴 안에 넣었다 이튿날 아침에 꺼내보니 얼어터져 있었으며 컵에 물을 담아 넣어도 역시 땅땅 얼어버렸다. 노인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동굴에 과일즙을 넣어 얼구어 먹으면서 더위를 가셨다. 이 소식을 들은 병원, 음식점, 수의참 등에서도 굴안에 균종과 백신을 저장했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여름에 이처럼 지온이 낮은 데 비해 동지섯달 추운날에는 외려 지온이 올라갔다. 하우스를 치고 남새를 재배하면 푸르싱싱 잘도 자랐다. 지어 참나무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기까지 했다. 1996년 실험으로 지온이상대의 언덕에 진달래를 심었더니 정월보름에 꽃이 피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왜 이 지역의 지온이 이상한지를 모르고 있어 신비로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룡권풍(龍卷風, 돌개바람)이 그린 그림: 자연의 신비로움으로 이상지온대와 비견할 만한 다른한 자연 현상 역시 사람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관계연구일꾼들의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1991 8 27일은 맑게 개인 날이었다.

오후 2시 쯤에 환인현 현성의 서관림목종자참의 울안에 갑자기 룡권풍(돌개바람)이 불어쳤다. “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창문들이 바람에 열렸고 돌개바람은 울안 마당에 펴놓고 말리우던 50여 킬로그램의 잣송이들을 20미터 높이로 들어올려서는 25미터 밖의 옥수수밭에 옮겨 놓았다. 이상하게도 잣송이무지는 원래 그 모양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약 한시간이 지나서 사무실로 들어온 직원은 경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3미터 높이에 6미터 넓이의 새하얀 회칠을 한 사무실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마치도 화가가 회화도구로 그린 것 처럼 섬세했고 구조가 잘 짜이고 기법이 규범화되어 있었으며 선들이 균일하고 윤곽이 선명한 지도와 같았다. 산맥과 하류, 도로와 부두, 농전과 초목들, 그리고 소택지 역시 화가가 그린 그림마냥 질서정연하게 그려져 있었으며 갑골문과 비슷한, 알아볼 수 없는 문자표식과 변계표지들까지 그려져 있었다.

료녕성과 본계시의 전문가들이 수차에 걸쳐 조사를 하고 원인을 밝히려 했지만 밝힐 수가 없었다. 다만 탄산칼슘의 화학물리반응이 아니라는 것만 결론이 났을 뿐이었다. 지금까지도 료녕성과 본계시의 관계부문들에는 그번 그림의 녹화테이프가 보존되어 있다. 

 

중국 유일의 팔괘성(八卦城): 환인은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활동해온 곳이기는 하지만 환인에 현을 설치하기는 이제 겨우 백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환인에 세계적으로도 보기드문 인문기적들이 있기도 하다.

북경대학의 왕은용, 오필호 두 저명한 교수의 탐사와 고증에 따르면 환인은 안휘성에 있는 팔괘촌다음으로 중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유일한 팔괘성(도시)라고 한다.

팔괘성 환인의 더욱 신기한 것은 팔괘의 모양이 바로 자연지리환경의 팔괘모양에 따라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환인현성은 훈강과 합달하가 합수하는 합수목에 위치해 있는데 환인현성 북쪽의 오녀산성에서 내려다보면 두 강은 합수를 하면서 천연적으로 태극무늬를 그리고 있다. 환인현성이 바로 이 천혜의 덕으로 이루어진 태극무늬 음양물고기(陰陽魚)의 양극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관서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환인은 1877(광서 3)에 청정부의 비준을 거쳐 현으로 승격했다.

당시 현감을 맡았던 장월은 오녀산성에 올라 환인현성을 내려다보고 팔괘에 따라 현성을 축조하기로 했다. 1878(광서 4)  6월에 착공하여 4년에 걸쳐 1882(광서 8)에 준공된 환인현성은 높이 1 3, 두께 1, 너비 1장 둘레길이 1.5km8 8면 모양으로 되었는데 동, , 3면에 문을 내고 북쪽은 산에 의거했기에 문을 내지 않았다. 팔괘의 방위와 위치에 따라 현성의 공관서, 감옥, 학당, 도관과 사찰을 포국했는데 청나라 북경의 외육부와 흡사했다.

그러나 이미 120여년의 세월을 거쳐 옛도시의 건축물들과 모양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항공기에서 찍은 사진에서 사람들은 분명한 팔괘모양의 도시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항공기에서 찍은 사진에서 동, , 3면으로 뻗은 거리는 있지만 북쪽으로 뻗은 거리는 찾아 볼 수 없으며 지금까지도 환인현성에 있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8갈래의 사선형 거리로부터 팔괘모양의 환인 옛도시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서 팔괘촌과 팔괘밭()은 발견되었지만 팔괘성이 발견되기는 환인이 처음이다. 학자들은 팔괘성은 중국에 하나밖에 없을 뿐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둘도 없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 사이버 중국 여행기
글쓴이 : 부여의 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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