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스크랩] 서 희 대장군

털보나그네 2007. 8. 5. 17:00
 

 

 

서 희

 

 

 

 

 

한민족의 다른 정권인 거란이 80만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다. 고려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서희는 강동 6주와 선물까지 받아내었다. 이조시대때 작성된 내용으로는 이에대해 그 내막에는 고려, 송, 거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외교적 문제가 있다고 중국위주 해석을 하지만 실제로는 고려는 거란이 전쟁을 하고싶지않은 상대로써

같은민족의 나라였기에 그들 스스로 친선을 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 한민족 정권의 또다른 북방제국, 거란

내몽고 자치구에 속한 중국의 작은 도시 임동. 이곳에 세워진 상경궁터는 그 거대한 규모로 발굴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유적 가운데 큰 도로가 9개, 양쪽에는 하수도도 깔려 있었다. 기마 민족이었던 거란은 무기, 군체제, 마술 등에도 능한 호전적인 부족이었다. 정복왕조를 꿈꾸며 요녕에 세운 '백탑'은 지금도 이곳의 상징물이다. 소손녕은 이곳에서 제의를 치르고 고려를 향해 출병을 단행한다. 그의 명분은 구려(구련=거란)의 계승을  자처한 거란이 발해를 병합하였는바 그들이 병합한 거란의 영토인 ‘압록강유역’을 고려가 침범했다는 이유었던것이다.


2. 거란의 친선제안을 거절한 고려

왕건 25년에, 거란의 친선을 제의를 거절한 사건은 거란거병의 이유를 제공한다. 당시 거란은 낙타 50필과 사신을 고려에 보내 같은민족인 형제국으로써 후일, 송나라를 멸망시킬것을 제의한다. 그러나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데 대한 보복으로 거란이 보낸 선물인 낙타 200여필을 다리에 매달아 굶겨 죽인다. 이것은 전쟁을 각오한 조치였다.

 

고구려의 정통으로써 거란의 형제평등관계를 용납할수 없었던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이에대한 보복을 준비해왔는바 이러한 조치를 취하게된것이다.(이조시대 병자호란하고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이에 거란은 고려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출병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3. 서희 (뛰어난 외교관이며 정치가)

서희는 거란의 이러한 출병원인을 꿰뚫고 있었다.황제에게 자신에게 고려군의 인증을 달라고 청하였고 승리의 방법을 설명했다. 고려황제는 자신이 발탁한 그의 뜻대로 병권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고려의 개혁(발전)을 위해 등용된 인재로써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른 실력있는 인재다.  22세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고려병법을 설파하여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검교 병부상서’라는 벼슬까지 얻는다. 이런 경력은 그가 충분한 능력이 있슴을 입증하는 내용이다.서희란 인물은 당시중국인 송나라뿐아니라 거란에도 알려진 인물이다.




4. 안융진 전투와 거란과의 대 타협 

서희가 고려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전쟁이 시작되자 대군이었던 거란군과의 전투는 한달이 지났지만 안융진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진다. 고려군의 검차(고조선때부터의 철기군전차)는 종횡무진으로써 이앞에서 거란의 기마군이 무력했기 때문이다. 또 정확한 고려의 활은 고려의 산악지역에서 거란군의 장점인 전면전,스피드를 충분히 제압하였다. 소손녕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서희는 고려황제의 명령이라며 직접 대화를 요청했다.


5. 고려와 거란의 친교 합의

애초부터 고려를 잘 알고있던 거란은 고려의  땅을 뺏으러 온게 아니라 무력으로 시위,제압하기 위한것이었던만큼  양국평화와 화친이 궁극적 목적이었슴으로 서희의 화친제의(려진복속:송과단교)를 기쁘게 받아들여 덤으로 구 발해의 일부 땅을 떼주고 상당한 선물까지 주고 물러난다. 거란으로써는 떼놈나라인 송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고려와의 평화관계가 우선이었기 때문이고. 서희는 거란침입의 본래 목적이 고려와 송의 친교를 견제하는데 있다는 것등을 서로 통찰한 것이다.


6. 거란과 친교 후 고려와 송의 관계

송과 단교 선언을 공식화 한뒤에도 고려는 송과 문화교류는 계속했다. 당시는 거란, 송 그리고 고려와의 힘의 삼각균형을 유지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송나라로도 고려의 존재가 중요했기때문이었다. 이러한 외교사는 이조때 광해군이 계승한바 있다. 국제관계 속에서 힘의 균형을 이용하여 실리외교를 편 고려의 위대한 정치가,군사전문가이며 외교관이었던 서희, 그의 생존과함께 고려의 평화는 계속되었다. 고도의 외교술을 요구하는 요즘의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적용되는 역사적 귀감이라 하겠다.

 

 

====================  후기  =====================

 

 

 

    거란은 금나라의 공격으로 둘로나뉘어졌는데

한갈래는 남하하여 고려로 흡수되었는바 위에서 기술한바와 같고

다른 한갈래는 서역으로 진출하였는데 그 활약이 대단하여 간단히 기술하고저 합니다.

 

<이하>

 

 

서역에서 되살아난 거란

 

요의 왕족인 야율대석(구르 칸)이 이끈 일대는.....
 

요 멸망직후 피신하여 서요를 건국한 요의 왕족이자 서요의 초대황제

덕종.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8대손이다.
서방 사료에는 구르 칸(대왕의 뜻)으로 기록되었다.
 
1124년 요나라가 금나라의 공격으로 쇠퇴하자 몽골고원으로 피하였다가 뒤에 서진하여, 1132년 위구르족의 지원을 받아 터키계의 카라칸 왕조를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츄 강변인 베라사군(발라사쿤)에서 즉위하여 연경으로 건원하고 천우황제라 칭하였다.구르칸 혹은 덕종이라고도 한다.

 

대석(大石)은 그의 거란이름의 음역이다.

 

이후 약 10년간에 걸쳐 투르키스탄 경략에 힘을 기울였는데 1141년 셀주크투르크왕조의 술탄 산자르가 이끄는 이슬람 연합군을 사마르칸트 근처에서 격파함으로써, 트란스옥시아나(암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 사이의 지역)에 대한 카라 키타이의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뒤에 호라즘(프와리즘) 샤왕조를 복속시켰다.

 

즉, 동서 투르키스탄의 전역이 서요의 영토에 편입되었다.(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북부,위구르자치구,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 에이르는 지역)


그러나 서요는 3대 80여 년간 존속하여 오다가 1211년 칭기즈칸에 쫓겨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터키계 유목민인 나이만부의 왕자 쿠츨루크에게 멸망되었다.

 

서요는 불교를 신봉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중국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다.

이러한 독창적 문화형태는 수도 부근의 거란인이나 중국 이주민 사회에서 통용되어 원주민이나 이슬람교도인 터키인에게 파급되어 후일 이들의 국가체계의 근간이 된다. 

 


 (끝)

출처 : 한민족참역사
글쓴이 : 한니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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