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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바람 부니 / 백무산

뒤에서 바람 부니 여자의 젖가슴에 안겨 철든 아이처럼 태연스레 뻐끔뻐끔 주위를 둘러보는 저 개는 지가 개가 아닌 줄 아는 모양이다 말귀 다 알아듣고 침실에 발랑 누워 주인 집 아이에게 질투도 하고 거실에서 콩당콩당 뛰고 뒹구는 저 개는 지가 개가 아닌 줄 아는 모양이다 손님 찾아가면 슬금슬금 꼬리를 감추더니 주인 나오면 극성으로 짖어대고 주인이 말리면 더 큰 용맹 발휘하여 물려고 덤벼드는 저 개는 지가 개가 아닌 줄 아는 모양이다 개에게는 저 짓이 생존의 방식이라지만 개는 자신이 개임을 부정해야 개밥 먹을 수 있다지만 이런 인간들이 도처에서 콩당콩당 뛰고 있다 주인 나왔겠다 충직하게 아무렇게나 용맹스럽게 짖어댄들 어떠리 뒤에서 바람 부니 아무렇게나 어떠리 백무산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문학의뜰 2023.12.02

그런 날 있다 / 백무산

그런 날 있다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 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 볼 저녁에 누워 살아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 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쫓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백무산

문학의뜰 2023.12.02

인간의 시간/백무산

인간의 시간 ​ ​ 마른 풀잎 위로 부드러운 빗방울이 깃털처럼 내린다 구름은 산자락까지 내려와 게릴라처럼 주의 깊다 비에 씻긴 바람도 저희들끼리 아주 주의 깊게 착지를 찾는다 개울은 작은 풀씨 하나라도 깨울까봐 뒤꿈치를 들고 걷는다 시간은 자신의 거처를 몰라 머뭇거린다 ​ 나무들도 옷을 벗는다 지난 가을에 외투만 벗은 나무는 마지막 단추까지 푼다 소리없이 안으로 옷을 벗는다 ​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대지에 무슨 음모가 시작되는가 새들도 숨을 죽인다 언제 명령이 떨어지는가 누가 발진을 지시하는가 시간도 순응하는 시간 ​ 일사불란한 지휘계통도 없이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순응하는 지휘계통 흙 알갱이 하나하나 수소처럼 가볍다 새들도 숨을 죽인다 ​ 대지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거역한다 소모와 죽음의 행로를 걸어..

문학의뜰 2023.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