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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참고자료4(광천동씨 연원)

털보나그네 2006. 9. 11. 00:09
광천동씨(廣川董氏) 연원(淵源)
우리 광천 동씨(廣川董氏)의 시조(始祖)는 BC 179年 한(漢)나라 문제원년(文帝元年)에 지금의 중국 하북성 조강현 광천진(河北省棗强縣廣川鎭)에서 출생하여 BC 104年 무제(武帝) 36년에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신 중자서자(董仲舒) 이시다.
우리 동문(董門)의 본향(本鄕)인 광천(廣川)은 중자서자(董仲舒) 시조께서 이곳에서 출생하셨기 때문이다.
중자서자공(仲舒公)께서는 전한(前漢)시대 6대왕 무제(武帝)때에 강도상(江都相:임금다음가는제상)의 벼슬에 계셨고 무제(武帝)의 사부(師傅:임금을 가르치는분)에 있으면서 천인책(天人策:약4500자),춘추번로(春秋繁露:17권),청명죽림(淸明竹林),동자문집(董子文集) 등의 저술을 남기시고 평소에 “어진 사람은 그 옳음으로 바르게 살고, 이로움을 찿지 아니한다(仁人正其誼不謀其利)“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신 대유학자(大儒學者)이셨다.
중자서자공(仲舒公)의 묘소는 섬서성 서안에 있으며 그 앞을 지날 때에는 누구나 타고가던 말에서 내려 경배(敬拜)하였기 때문에 그 묘소를 하마릉(下馬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국에 우리 광천동씨(廣川董氏)가 처음 정착하게 된 것은 중자서자공(仲舒公)의 44세이신 승자선자공(承宣公)과 그 아우 인자선자공(印宣公)의 8세이신 일자원자공(一元公) 두 분이시다.
승자선자공(承宣公)은 고려 말엽(末葉)인 14세기 중엽에 명(明)나라의 접위사(接慰使:지금의 대사급)로 고려에 오셔서 영천군(榮川君: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에 피봉(被封)을받고 이땅에 머물러 사시니, 이분이 곧 우리 한국의 광천동씨(廣川董氏) 시조(始祖)요 직계조상 제1세로서 뿌리를 내리고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우리 동문(董門)이 북한쪽에 많이 살게 된 것은 조선왕조 세종(世宗)21년(서력기원1439년) 육진개척(六鎭開拓)에 따른 북변 정책(北邊政策:북방 개척지로 가서사는 이주정책)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선조님들의 내천자(川)가 붙은 고을에 가서 살면 길(吉)한다는 유촉(遺囑)을 지켜 내천(川)자가 붙어서 된 고을 이름을 찿아 정착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자미자공(安美公:상호군공)과 안자의자공(安義公:추밀공)께서는 함경남도 단천군 복귀면(咸鏡南道端川郡福貴面)에 자리를 정하시고, 안자국자공(安國公:영천공)께서는 영천(榮川:지금의영주) 본가(本家)에서 종가(宗家)를 지키셨고, 안자우자공(安宇公:전서공)께서는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咸鏡北道明川郡阿間面)과 하가면(下加面)에 머물러 사셨다.
안자리자공(安理公:시중공)께서는 함경남도 북청군 양천(咸鏡南道北靑郡楊川)에 정착하셨다가 함흥(咸興) 귀주사(歸主寺)의 관동(館洞)으로 옮겨 사셨으나, 그후 10대손(代孫)인 인자손자공(仁孫公)께서 다시 북청군 이곡면(北靑郡泥谷面)으로 이주 정착하여 현재 이곳에는 대성(大姓)을 이루고 있다.
한편 승자선자공(承宣公)의 아우이신 인자선자공(印宣公)의 8세인 일자원자공(一元公:문의공)께서는 명나라 신종(神宗) 만력(萬曆) 25년 정유재란(丁酉再亂:1597)때에 조선 구원 제독(救援提督:지금의 대장급)으로 대군(大軍)을 거느리시고 조선에 오셔서 평란(平亂)후 귀국하셨으나, 그 두 아드님이신 대자순자공(大順公)과 그 아우 창자순자공(昌順公)께서는 전라북도 임실군(全羅北道任實郡)과 진안군(鎭安郡)에 각각 머물러 사셨고, 그 후손(後孫)들은 지금 전라도와 경상도 일원(一圓)에 흩어져 살고 있다.

중국에서는 양씨(楊氏)가 우리 광천동씨(廣川董氏)에서 분성(分姓)되어 같은 조상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며 동(童)씨 또한 같은 조상이라고 하여 세계종친회(世界宗親會)의 명칭도 “전구동양동종친회(全球董楊童宗親會)”라 칭하고, 세계총회를 동남아(東南亞) 각국(各國)으로 돌아가며 개최(開催)하여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있는 종친(宗親)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세계 일족(世界一族)의 친목(親睦)을 유지 확대(維持擴大)하여 나가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8.15 해방후와 6.25 동란때 북한에서 월남(越南)한 수 많은 세대(世帶)와 서기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부터 정착한 일자원자공(一元公)의 후손들이 광천동씨 중앙 종친회(廣川董氏中央宗親會)를 결성하여, 서기1967년과 서기 1986년 두 번에 걸쳐 대동보(大同譜)를 편찬한 것은 긴 세월 동안 흩어져 살아온 우리 동문(董門)들이 동성동본(同姓同本)임을 입증하는 동시에 조상의 위대한 업적과 명예를 지키게 된것이 다행이라고 하겠다.이에 우리 후손들은 조상에 얼을 받들어 대대손손 같은 씨족의 긍지를 이어 받아 조상을 숭배하고 상호간에 친목을 돈독히하며 문중(門中)을 위하는 아름다운 풍속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부록>
1 :우리의 대시조(大始祖)는 중국 황제(黃帝)의 자(子) 12개 성씨(姓氏)중 희씨(姬氏)의 후예(後裔)인 요(飂)나라 숙안왕(叔安王)의 아드님이신 보(父)라는 분이 순제(舜帝)로부터 충성을 다한 공(功)으로 동(董)이라는 성씨(姓氏)를 사성(賜姓)받아 우리 동씨(董氏)의 대시조(大始祖)가 된 것이다.그러나 동자보자공(董父公)으로부터 2000년동안 계보(系譜)없이 내려와 그 유래를 찿을수 없고 중자서자공(仲舒公)께서 씨족사회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후 계보(系譜)를 유지(維持)하여 왔기 때문에 우리 광천동씨(廣川董氏)의 시조(始祖)로 알려지게 되었다.
중자서자공(仲舒公)의 찬란한 업적 외에 정의명도(正義明道) 유훈(遺訓)은 지금도 후손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2 :1439년에 입북(入北)한 안자미자공(安美公),안자의자공(安義公),안자우자공(安宇公),안자리자공(安理公) 네분의 후손들은 단천(端川),명천(明川),북청(北靑)외에도 한국의 각 지방을 비롯하여 멀리 중국(延吉省)과 러시아에도 많은 종족(宗族)이 살고 있으며 안자국자공(安國公)의 후손은 경기도(양평,여주,이천등지)와 개성등지에 일부 살고 있다.
일자원자제독공(一元提督公)의 후손은 김해,남해,함양,진안,등지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기타는 진주,창원,창녕,충주,청주,영천,안동,남원,전주와 경기도 및 서울등지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3 :오늘날 선조에 대한 시향제(時享祭)는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 산 53번지 시중공파(侍中公派)의 종산(宗山)에서 매년 음력10월2일 12시에 중앙종친회(中央宗親會) 주관으로 지내고있으며 문의공파(文毅公派)는 문의공사당(文毅公祠堂)에서 매년 시향제(時享祭)를 지내고 있다.
2003년 4월26일 중앙종친회 총무부회장 26세 광욱
출처 : 광천동씨 종친회
글쓴이 : 동광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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