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한 마음/산사의 명상음악
원효(元曉).
◎원효의 탄생과 성장이야기. 원효(元曉, 617년 ~ 686년 4월 28일<력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시)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 담날이며, 태종무열왕(김 춘추)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 사(薛思)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린다.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불교 최초의 깨달은 스님,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도 유명하였다. 원효는 신라의 귀족으로 신라의 개국공신이자 박혁거세를 추대한 사로6촌의 촌장중의 한사람인 설 거백(또는 설 호진)의 후손으로,설 곡(薛嚳)의 4대 손이다. 잉피공의 손자이자 내마(乃末) 설 담날(薛 談捺)과 조씨(趙氏)의 둘째 아들로 상주(湘州)경산현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의 사라수 밑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金堂) 자리가 남아 있다. 그 밑 골짜기에는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바로 원효가 태어난 곳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불지촌은 발지촌(發智村) 또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 잉피공의 집이 금성에 있었으므로 금성사람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 잉피공(仍皮公)은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중기 김부식과 일연이 살던 시대까지도 경주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낳을 때에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아명인 서당(誓幢)의 당(幢)은 속어로 '털'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서당은 '새털'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고 달이 찼을 때 집 근처의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다급한 중에 남편의 털옷을 그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하여 아기를 낳은 데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효에게는 형제가 몇명 있었는데,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족보에는 그의 형중 1명인 설 을신(薛 乙臣)의 이름이 현재 전한다.
어려서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으로 불렸으며, 또다른 이름은 모(毛)였다. 뒤에 이름을 사(思)로 정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유교를 가르치는 태학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부친 담날과 조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화랑으로 활동하였으나, 15세 때(또는 28세) 때 어머니 조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가 황룡사(黃龍寺)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가 출가를 결심했을 때 아버지 설담날과 할아버지 잉피공의 실망이 대단하였다 하며, 그에게는 형 설을신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출가를 반대하였으나, 그의 뜻이 확고하자 허락하였다.
원효는 후일 유명한 승려가 된 뒤, 자신이 태어난 곳의 집을 희사(喜捨)해서 법당을 세우고 그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 밤나무 근처에도 법당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했다.
◎출가 이후
출가한 뒤 스스로 첫새벽[始旦]을 뜻하는 원효라고 이름지었다
〈송고승전 宋高僧傳〉에 의하면 14~15세 때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으며 남달리 영특하여 나중에 불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시에 의하면 원효는 의상(義湘)과 함께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 전주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간 보덕(普德)에게 〈열반경〉·〈유마경〉 등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 낭지내운(朗智來雲)에 의하면 원효가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 영취산 혁목암(赫木庵)의 낭지가 그로 하여금 〈초장관문 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 安身事心論〉을 쓰게 했는데, 원효는 그 글을 지어 낭지에게 전달하면서 글 끝에 "서쪽 골 사미는 엎드려 동쪽산의 상덕 고암 앞에 절합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는 원효가 낭지에게 사사했거나 단순히 학덕 높은 노화상으로 존경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석혜공전(釋惠空傳)에는 당대의 신승(神僧) 혜공(惠空)이 만년에 항사사(恒沙寺)에 있을 때 원효가 여러 경전의 소를 찬술하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영취산(靈鷲山)의 낭지(郎智), 흥륜사(興輪寺)의 연기(緣起)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으니 뛰어난 자질과 총명이 드러났다.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玄奘 : 602~664)에게 불법 유식학(唯識學)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돌아왔다.
661년(문무왕 1)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바닷길로 당나라에 가기 위해 당항성(黨項城)으로 가는 도중 비 오는 밤길인지라 어느 땅막[土龕]에서 자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보니 땅막이 아닌 오래된 무덤임을 알았다.
비가 계속 내려 하룻밤을 더 지내다가 귀신의 동티를 만나 심법(心法)을 크게 깨치고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라고 생각했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부처님 말씀에 삼계(三戒)가 오직 마음뿐이라 한 것을 어찌 잊었더냐?여기서 원효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의 진리를 체득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또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하여 더이상 입당 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곧바로 되돌아 왔다.
그 뒤 분황사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를 제창하며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다.
분황사(芬皇寺)에 주석하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저술하다가 화엄경소의 제4 십회향품(十廻向品)에서 절필(絶筆)한다.(삼국유사)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는 여전히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 혜공·혜숙(惠宿)· 대안(大安) 등이 일반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켰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지방의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호(無碍瓠)를 두드리고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원효는 많은 글을 저술하였으나, 문자나 형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원효는 인간이 값어치 있기 위해서는 본연의 맑은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위풍당당한 법사(法師)였지만 어떤 때는 소박하고 겸허한 서민이기도 하였는데, 법복을 입었다 하여 깨쳤다고 교만해진다면 오히려 구제받을 수 없는 진짜 천민이라고 갈파했다.
그가 이처럼 서민의 교화에 나선 것은 학문적인 구법(求法)을 위한 입당을 포기한 후 심법을 깨달은 뒤이며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실계(失戒)로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자칭하던 때 이후로 보여진다.
또 그가 스스로 소성거사라 부른 것은 실계로 인한 속죄의 한 방법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대중교화의 선구자인 혜공이 등에 삼태기를 지고 길거리에서 대취하여 노래하고 춤추었던 것이나 대안이 특이한 옷차림으로 장판에서 동발(銅鉢)을 치면서 "대안 대안"을 외친 것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효가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 3권을 지어 황룡사에서 설법하였는데, 왕을 비롯하여 왕비와 왕자·공주, 그리고 여러 대신과 전국의 절에서 온 명망 높은 고승들에게 『금강삼매경』의 강해(講解)를 시작하였다.
원효의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하고 질서정연하여, 오만하게 앉아 있던 고승들의 입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고 전한다.
원효는 불교 뿐만 아니라 도가와 유가에도 밝았고, 한비자와 상앙의 법가 사상에도 지식이 많았다.
그러므로 그는 대중교화의 행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소성거사 아닌 원효화상으로 돌아가 혈사(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결혼 생활
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고 하니 사람들이 듣고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무열왕이 이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此師殆欲得 貴婦産賢子之謂 爾國有大賢 利莫大焉)"라며 요석궁의 홀로된 둘째 공주—흔히 요석공주—를 짝되게 하니, 과연 공주가 아이를 배어 설총을 낳았다.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무열왕(김 춘추)의 둘째 딸이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금성시내에서 춤추며 노래부르는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시내로 나가 원효를 찾자,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관리를 만났는데, 그가 자발적으로 혹은 관리가 떠밀어서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이후 무열왕은 공주에게 옷을 말리고 쉬게 하도록 명을 내려 원효와 공주를 맺어주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은 설총이 한국 유교의 시조라 하여 '지금(일연이 살던 당시)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은 3일 뿐'이라며 말한 뒤 사라졌다. 공주는 원효가 떠난 후 아들을 낳았고 백방으로 그를 찾았다. 공주는 원효가 삽량주 반고굴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들을 데리고 갔다.
원효는 '공주와의 인연이 다했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공주는 원효를 설득하기 위해 반고굴 아래 마을에 (천)막을 쳤다.
어느 날 원효가 공주를 찾았다.
공주는 원효에게 아들을 보여줬다.
원효는 아들에게 '설총'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뒤 다시 반고굴로 돌아갔다.
공주는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결국 서라벌로 돌아갔다.
공주가 산(山)에 막(幕)을 쳤다고 해서 이 마을을 '산막(山幕)'이라고 불렸다.
산막에서 천성산쪽으로 1㎞가량 올라가며 원효대사가 수도했던 '반고굴'이 있다.
천성산은 당시 호랑이가 많아 주민의 접근이 쉽지 않은 신성스러운 곳이었다.
현재도 반고굴이 위치한 곳이 호계(虎溪)마을이다.
이 때문에 원효대사가 전국을 돌며 수도를 하다 이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30㎡ 규모의 반고굴에는 온돌을 만든 흔적과 바위에 신라 때 조각한 마애불(경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도 있다.
특히 원효대사는 중국에서 찾아온 1천 명의 제자(신도)에게 화엄경을 강독해 모두 성인이 되게 했다.
1천 명의 제자가 성인이 됐다고 해 그 산을 '천성산(千聖山)'이라고 불렀고 제자에게 화엄경을 강독한 곳이 현재의 '화엄벌'이다.
산막에서 생산된 각종 농어산물은 사찰과 함께 삽량주 전체 주민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조선 말기 이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이 마을에 좋지 않는 일이 잇따라 발생하자 마을을 두개로 쪼개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당시 바깥산막은 영동마을로, 안산막은 현재의 산막마을이 됐다.
석굴암(반고굴) 무정 스님은 "신성스러운 천성산 기운을 가진 산막은 1천400년 전 삽량주 주민을 먹여 살린 것처럼 현재도 공업단지로 탈바꿈, 양산 시민을 먹여 살리고 있다"며 "불교와 원효대사의 '자비정신'이 변하지 않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의 소요산(逍遙山) 관리사무소 동쪽 약 20m 지점에 한자로 ‘요석공주별궁지(瑤石公主別宮址)’라고 쓰인 작은 표지석이 세워진 터가 남아 있다.
이곳은 요석공주가 원효대사가 수도하던 소요산에서 아들 설총과 함께 기거하던 터라고 한다.
요석공주는 소요산에 초막을 짓고 수행하던 원효를 따라와서 수행처 근처에 별궁을 짓고 설총과 함께 기거하며 아침저녁으로 원효가 있는 곳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소요산 자재암에는 원효와 요석공주와 관련된 곳들이 많은데 그 산의 봉우리 중 하나인 공주봉(公主峰)은 요석공주를 위해 원효가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표지석이 있는 자리가 정확한 별궁지가 아니라고도 있다.
그 예로 『조선지지』(朝鮮地誌)에는 ‘바위골짜기 평평한 터에 두 군데의 옛 궁터가 있다.
예로부터 요석공주의 궁터라고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소요산기」에는 요석공주 궁지는 ‘원효폭포에서 서북쪽 80장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자재암이라는 이름에 대한 유래도 흥미롭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인연이 있은 뒤 오로지 수행 일념으로 인적이 끊긴 깊은 산속을 찾았다.
발길 닿은 곳이 현재 자재암 자리, 이곳에 초막을 짓고 서원했다.
“정각을 이루지 못하면 이 자리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원으로 용맹정진했다.
어느 날, 밤은 깊었고 비가 내렸다.
약초를 깨다 길 잃은 여인이 원효에게 하룻밤 신세질 것을 청했다.
원효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이런 법문을 남겼다.
“마음이 생겨 옳고 그르고, 크고 작고, 깨끗하고 더럽고 있고 없고 가지가지 모든 법이 생기는 것이요.
마음이 사라진, 즉 상대적 시비 가지가지 법이 없어지는 것이니 나 원효에게 자재무애의 참된 수행 힘이 있노라.”
여인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중생구제를 구실 삼아 원효의 심지를 시험한 관세음보살이었다.다음 날 관음의 진용을 뵌 원효는 환희에 젖어 절을 짓고 자재암(自在庵)이라 이름 붙였다.
자재암의 ‘자재’란 속박이나 장애가 없이 스스로 자유로운 마음이라는 뜻이다.
원효샘은 자재암의 감로수다.
원효 스님은 차의 달인이라고도 차인들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스님이 창건한 절터엔 필연적으로 약수가 나온단다.
찻물로 으뜸인 석간수가 솟는다고 전해 내려온다.
자재암의 원효샘 석간수는 찻물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물이다.
자재암은 신라와 고려때, 조선중기까지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고려시대 시인 백운 이규보는 이 물맛을 “젖처럼 맛있는 차가운 물”이라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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