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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이야기.

털보나그네 2012. 7. 1. 23:01

 

산같이 물같이 살자

 
텅 빈 마음엔 한계가 없다.
참 성품은 텅 빈곳에서 스스로 발현된다.
산은 날보고 산같이 살라하고
물은 날보고 물같이 살라한다.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마음으로 살라고 한다.
집착, 욕심, 아집, 증오 따위를 버리고
빈 그릇이 되어 살라고 한다.
그러면 비었기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수행은 쉼이다.
이것은 내가 했고 저것은 네가 안 했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식으로
항상 마음이 바빠서는 도무지 자유를 맛볼 수 없다.
 내가 내 마음을
"이것"에 붙들어 매어놓고
"저것"에 고리를 걸어놓고 있는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항상 노예로 살수밖에 없다. 
수행은 비움이다.
내가 한다 내가 준다 내가 갖는다.
하는 생각 또는 잘해야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따위의 생각을 버리고
한마음이 되는 것이 수행이다.

= 법정스님 =

 

 

 

 

 

진도의 '홍주' 이야기.

 

 

 

2012년07월01일.

소주와 지초의 만남 ‘진도 홍주’

진도 홍주는 소주와 지초가 만나 조화를 부린 전통 명주다.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우리나라 전통주 500여가지가 대부분 일제 강점기의 ‘밀주단속’과 우리 문화 말살정책으로 사라졌으나 홍주만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진도에서 명맥을 유지해 오늘까지 뛰어난 맛과 향을 전하고 있다. 홍주가 진도에서 대를 이어 전수된 것은 주원료인 만병통치약 지초를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주와 양천 허씨

홍주는 조선시대 ‘지초주’라 하여 최고 진상품으로 꼽혔으며 양반가에서도 술을 빚었다. 이 술에 얽힌 두가지 야사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세조때 경상도 절도사를 지낸 허종의 부인 청주 한씨가 성종이 윤비를 폐출하기 위해 어전회의를 소집하자 남편에게 홍주를 권해 입궐을 막아 갑자사화의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

또 하나는 광해군의 형 임해군이 진도로 유배될 때 부인 허씨(허명의 딸)가 친정조카인 허대에게 고숙을 보살피도록 부탁해 허대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고조리(소주를 내리는 기구)를 가지고 진도에 와 정착한 뒤 홍주비법을 전수했다는 이야기다.

진도의 양천 허씨는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유와 미산·남농 등 운림산방 3대와 의제 허백련 등 위대한 예술가를 배출한 집안으로 추사 김정희 등 당대의 명사들도 운림산방을 찾았으니 그 때마다 홍주가 상에 올랐을 것이다. 1995년 전남도지정 무형문화재 제26호로 등록된 진도 홍주의 기·예능 보유자 허화자 할머니(76)도 소치 집안 출신이니 홍주와 허씨 문중과는 인연이 깊은 게 틀림없다.

#몽골 백주와 지초의 만남

“1960~70년대까지도 진도에는 집집마다 서너뿌리의 지초를 상비품으로 재배하거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이가 경기를 일으키면 지초 뿌리에 참기름을 부어 약한 불로 다려 치료하고 가루로 만들어 체했을 때 먹이거나 피부질환이 생기면 환부에 바르는 등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했습니다.”

허씨 문중 전래설에 동의하지 않는 인사들은 몽골 침략때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와 백주(소주)제조법을 전수한 뒤 지초와 소주가 만나 자연스럽게 홍주가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외지산 지초는 아무리 뿌리가 굵고 길어도 한번 홍주를 만들고 나면 색소가 우러나지 않는데 진도의 지초는 뿌리가 작아도 3번까지 사용할 정도로 우수해 홍주가 진도에서 뿌리내리고 명품이 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하고 있다.

#홍주의 현주소

진도 홍주는 향이 좋고 맛이 뛰어나며 뒤끝이 깨끗해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밀조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 때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박해와 단속의 대상으로 일부 주민이 생계수단으로 빚어오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다.

현재는 7개 영농조합법인과 최소한 100가구 이상의 가정에서 제조돼 연간 1백억원어치가 판매되고 있다. 이름은 똑같은 홍주지만 술을 담는 용기와 상표가 각각 다르고 유통구조도 확립되지 않았는데 이처럼 엄청난 양이 유통되는 것을 보면 그 진가를 짐작하게 한다.

진도 홍주 제조자가 난립하고 있는 것은 홍주의 제조과정이 비교적 단순하기 때문이다. 쌀과 보리를 찐 뒤 누룩을 버무려 밑술을 만들고 이를 증류시켜 소주를 만드는데, 증류된 소주가 지초뿌리를 통과하면 붉은 색이 우러나고 진한 향을 지닌 홍주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홍주는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쌀과 보리, 누룩의 혼합비율, 숙성기간, 숙성·증류 온도, 지초함량, 여과장치 등에 따라 그 맛과 향이 천차만별로 다양하다.

 

홍주의 유래
진도홍주는 고려시대 때 증류주인 소주가 도입되어 북부지역과 상류사회에 파급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민가에서까지 양조하게 되었다.
소주에 각종 초근목피와 나무열매, 한약재 등을 침출하여 향미와 색택을 보강한 미주를 제조하여 음용하였으며 약용으로 복용키도 하였다.
홍국으로 제조된 원나라의 홍주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이후 고려시대 말부터 국내에서 제조되어 홍노라고 했으며 홍국 대신 지초를 사용하여 홍색 가향약용주(紅色 佳香藥用酒)인 지초주를 빚기 시작하였다.
미색향을 고루 갖춘 고려시대 이후 우수한 전통주품으로 지금은 유일하게 전남진도에만 남아있는데 이것이 진도 홍주이다. 홍주가 진도에 정착하여 진도홍주로 전승되어온 배경에 대하여는 항몽삼별초군 입도, 양반 유배인의 전수, 함경 평안도 유민의 입도, 남방문물의 유입, 의료처방에 따른 독자발전 등을 생각할 수 있으나 아쉽게도 관련자료가 아직까지는 없다.
진도홍주가 처음 빚어진 때는 고려 초라는 말이 있기도 하나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 시대이며 이 시대에는 진도홍주를 지초주(芝草酒)라 하여 최고 진상품으로 꼽았다.

 

1. 홍주의 유래
진도홍주(珍島紅酒)는 고려시대부터 제조를 해온 최고의 진상품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지초주(芝草酒)라 하였다. 조선 세조 때에 경상도 절도사 허종(許琮)의 부인 청주한씨가 홍주의 양조비법을 알고 있어 후손들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2. 홍주가 진도의 특산물이 된 배경
조선조의 성종이 윤비를 폐출하려 어전회의를 열던 날 허종은 어전회의 참석을 말리는 누님의 말씀을 듣고 부인이 권한 독한 홍주를 많이 마셨다. 술에 취한 허종, 허침 형제는 출사 중 낙마하여 입궐을 못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성종의 사망 후 임금이 된 연산군때 갑자사화가 일어났으나 당시 어전회의에 참석못한 허종만은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그 후 5대 후손 허대(許岱)는 선대부터 물려받은 고조리를 진도로 가지고 내려와 그 부인 경주 이씨가 전수한 양조법으로 홍주를 만들었으며 이 비법은 진도의 양천 허씨 문중에서 대대로 전해져 계승 보전되었고 홍주는 진도의 명주가 된 것이다. 진도홍주는 1994년 전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3. 홍주의 특징
홍주는 알콜도수가 40~45도 정도의 진한 술이지만 음주 후 지초 향이 오래가며 숙취가 전혀 없는 술이다. 이 홍주에 첨가된 지초의 약효에 따라 감기(해열작용)에 특효이며 소화불량 및 지사에 특효가 있다.

민간요법에는 지초 뿌리를 가지고 술에 담가 성분이 충분히 우러나면 약주로 하여 조금씩 복용한다. 이렇게 하면 건위, 강장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진도홍주는 보관 중 자홍색이 검 붉은 색으로 변하는 것은 홍주의 주 원료인 지초의 뿌리에서 나오는 자연색상이 술의 숙성에 따라 검 붉은 색상으로 변하는 현상이며 밑에 깔리는 찌꺼기는 지초의 뿌리 성분이 가라앉은 것으로 이러한 현상이 발생된 상태일수록 숙성이 잘된 상태라고 한다.

naver지식in

 

진도홍주는 고려 때 중국 원나라에서 들어왔다는 소주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삼별초를 토벌하러 온 몽고인들이 홍주(紅酒) 내리는 비법을 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주장을 하지만, 재료로 쓰이는 지초(芝草)는 황폐한 몽고땅에서 재배가 힘들기 때문에 생약(生藥)을 활용한 홍주를 전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 후기 이후 우리 선인들은 어느 지방에서나 한주, 백주라 하여 소주를 제조하여 마셔왔다. 원래 소주는 조정에서만 사용하였으나 차츰 서민층에 대중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소주에 약제를 가미하는 지혜가 생겼고, 약소주 또는 한소주로 발전되어 지방마다 특색있는 유명한 술을 낳게 된 것이다. 진도홍주 역시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져 토속 명주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만드는 과정은 누룩의 제조, 담금 및 발효, 증류의 3단계이다. 홍주는 소화를 도와 식욕을 왕성하게 하고, 알콜 40% 이상의 도수가 높은 술인데 목 안에 큰 자극을 주지 않고 적은 양으로도 취기를 느끼게 하며 숙취가 없고 칵테일을 할 수 있는 효능과 특징이 있다.

진도홍주는 해방 전까지는 살림이 넉넉한 집에서 일반적으로 제조되어 왔으나 이후 주류단속이 심하자 부자집보다는 생활이 어려운 부녀자들이 생계수단으로 은밀히 제조하여 그 비법이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1993년 창립한 진도전통홍주보존회에서 보존, 개발, 산업화하고 있으며, 기능보유자 허화자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곱구나 투명한 선홍빛
진도사람이면 빚을 줄 아는 술
진도북놀이, 진도씻김굿 등 민속의 보고며 누구나 소리 한자리, 춤 한자리 정도 너끈히 소화해낼 줄 아는 섬, 진도. 그래서 진도에 가서는 소리자랑은 말라고 했다.
진돗개가 고향인 진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명견이 된 것은 진도가 ‘섬’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84년 진도대교가 놓여지기까지 진도와 진도사람은 누구와도 섞이지 않은 ‘순종(純種)’의 문화를 만들어 왔을 터였다. 순종의 진도문화는 민요, 서화, 그리고 술의 ‘진도 3가락’을 만들어 냈다.
진도 3가락의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진도 홍주. 선홍색의 붉은 빛깔을 뽐내는 홍주는 40도의 독주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추운 지방에서 마시는 것과는 반대로 습하고 따뜻한 남쪽 섬에서 독주를 마시는 것 자체가 특이하다.
진도 홍주는 삼별초를 토벌하러 온 몽고인들이 그 비법을 전했다고도 하고 연산군때 이주(李胄)가 유배 오면서 전래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또 임해군의 처조카인 허대가 빚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광해군 즉위 이후 임해군이 진도로 유배를 가자 허대가 뒤를 따랐지만 임해군은 강화도로 발길을 돌렸고, 허대는 그대로 진도에 남아 양천 허씨 가문을 열었다.
이유야 어찌됐건 진도 홍주는 진도사람이면 열에 하나 정도는 빚을 줄 안다. 진도읍내로 가는 길 곳곳마다 ‘홍주판매’를 내걸었을 정도로 생산과 판매를 하는 곳이 많다. 진도 홍주의 제 맛을 내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일 수 있는 일이다. 진도홍주의 맥을 잇는 곳으로 인정받는 양천 허씨 11대손인 허화자씨는 일흔셋의 나이에도 여전히 홍주를 빚는다.

술과 함께 한 인생살이
허화자씨는 담뱃가게가 딸린 ‘파란대문집’에 산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 날도 허화자씨는 고조리(진도에서는 소줏고리, 고소리를 이렇게 부른다)에서 홍주를 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전통방식 그래도 아궁이에 장작을 때 술을 내리는 탓에 고조리가 얹혀 있는 부엌벽은 검댕이로 가득하다. 세월 따라 검댕이는 켜켜이 쌓였다.
그의 집을 찾아가기 전 읍내식당 주인은 “벼락같은 성격이니 조심하라”했다. 그와 첫 만남에서 대뜸 한다는 소리가 “오지 말라니 왜 왔느냐”였다. 진도 홍주의 명인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지만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공명도 좋아하지 않고 일하기도 뻗치다(힘들다)”며 말하기를 거부했다.
이유는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홍주를 빚어왔던 세월은 그 자신의 인생역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홍주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의 아픈 과거를 되새겨야 하는 것임을 그가 불쑥불쑥 내어놓은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도 비를 맞으믄서도 슬프게 술을 맹글었지. 술을 팔지 못하믄 자식들 맥이고 입히질 못허는디 단속 나오믄 도망 대니고...”
그는 툼벙 떨어지는 눈물을 훔쳐내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그에게 가문의 맥이니 홍주의 역사니 하는 것들은 생계 앞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 열여덟의 젊은 나이에 시집와 바람난 남편 탓에 두 딸을 홀로 지켜내야 했던 그는 ‘홍주명인’과 함께 ‘욕쟁이 할머니’란 소리를 들어야 했다. 고단한 삶의 훈장처럼.
삶의 방편으로 빚어냈던 그의 홍주는 그래서 더욱 빛나는지 모른다. 그가 빚어낸 홍주는 맑은 하늘에 비치면 투명하고 선명한 선홍빛을 띤다. 그는 “술색이 너무 진해도 너무 연해도 좋은 술이 아니다”라며 술병을 비춰 보인다. 그 빛이 그가 짜낸 핏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핏물처럼 선명한 독주
홍주를 빚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쌀과 누룩으로 청주를 만들고 청주를 소줏고리에 넣어 소주를 내리면 된다. 누룩은 보리누룩을 쌀을 멥쌀을 주로 쓰는데 그는 보리누룩을 손수 딛어 방에서 고이 말린다. 발효실은 따로 두지 않아서 온도가 맞는 봄과 가을에만 홍주를 빚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소주가 내려지는 항아리의 입구에 지초를 넣어두면 지초에서 핏물처럼 선명한 선홍색이 우려져 나와 홍주를 만든다. 지초는 예전에 진도산을 썼다. 진도산 지초는 두세 번 우려내도 선명한 홍주를 만들 수 있어 상품으로 쳐왔으나 현재는 재배를 하거나 다른 곳에서 구해온다. 그도 일년에 한번은 뭍으로 나가 자연산 지초를 구해 오고 있다. 이렇게 지초가 들어간 홍주는 장판에조차 붉은 지초빛을 물들인다.
무슨 술이 이렇게 붉냐고 물으니 그는 “며칠 두면 더 진해진다”고 했다. 그래서 진짜 홍주인지를 색을 보고 판가름하기도 한다. 처음 내릴 때 붉은 빛의 홍주는 보름 정도 지나면 흑갈색을 띠고 5년 정도가 지나면 진한 흑갈색을 띤다고 한다.
하루를 꼬박 소줏고리 앞에서 불과 씨름하고 얻는 술은 홍주 서너 되 정도가 고작이다. 청주 두 말에서 만들어지는 홍주는 일곱 되나 일곱 되 반 정도가 나온다고 하니 귀한 술임에 틀림없다.
“어떤 때는 일곱 되가 못되게 나오기도 허고 어떤 대는 일곱 되가 넘기도 허고, 헐 때마다 달러. 간간이 맛을 봐감서 타진 듯한 ‘냇내’가 나는가 봐야 허고 맛을 보고 술을 더 내려야 헐지 말아야 헐지도 결정허제. 허지만 어떤 때건 말간 홍색을 띄지 않으믄 안되제.”
H=딸에게도 돈주고 파는 술
이렇게 만들어진 홍주는 40도 내외의 독주. 그러나 “너무 독하다고 좋은 술이 아닌 것”이다.
그날도 “말을 많이 시켜서 술이 독해졌다”며 지청구를 했다. 단지 그 술이 어떤지 먹어보지 않아도 빛깔로 아는 그 앞에서 그래도 맑은 홍색에 이끌려 맛본 한잔 술은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부족했다. 지초에서 흘러나오는 쌉싸름한 맛이 센 듯하면서도 부드럽다. 그러면서 보리의 고소한 뒷맛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맛뿐만 아니라 지초는 복통에 좋아 얹히거나 배앓이를 할 때 이 술 한잔이 ‘직방’이라 할머니들은 이야기했다.
그는 나름의 감정단을 뒀다. 술을 내리고 이웃에 전화를 하면 득달같이 할머니가 달려온다. “술이 좀 쎄쟈?” “아니, 묵을만 혀.” 손끝과 혀 끝에만 의존해 빚어온 그의 홍주가 다른 곳에서 만든 술에 비해 ‘부드럽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한 사람만의 맛은 아닌 듯 했다.
그렇지만 그의 술은 이곳, 진도 그의 집에서만 맛볼 수 있다. 딸에게조차 돈을 주고 판다는 그의 홍주는 돈을 주고도 못산다. 많이 빚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된 제조허가가 없기 때문에 시중에서는 살 수 없다.
그는 말을 상당히 아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만드는 홍주에 대해서도 “넘 이야기해서 뭣하겠느냐”며 말을 피한다. 하지만 욕쟁이 할머니의 걸쭉한 욕에는 신산한 세월을 이겨낸 강인함과 설움 저 밑바닥에 남아 있는 정이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겉이 아니라 실속이 채워진 사람이 진국이라는 그의 신념처럼 소줏고리 앞을 지키고 앉아 정성으로 장작을 때 만들어지는 홍주가 그리 붉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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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홍주|작성자 산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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