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청량산(2016.10.16)
*음악/Danny Canh/Speak Of The Hearts(베트남)
봉화 청량산.
청량산은 기암괴석이 봉을 이루며 최고봉인 의상봉을 비롯해 보살봉 금탑봉 연화봉 축융봉 등 12개의 암봉이 총립해 있고 봉마다 대(臺)가 있으며 자락에는 8개 굴과 4개 약수, 내청량사(유리보전)와 외청량사 (웅진전), 이퇴계 서당인 오산당(청량정사)등이 있다.
청량산은 우선 산 곳곳에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이 괴상한 모양의 암봉들과 어우러진 모습이 절경이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암봉들이 여덟개나 되고 그 암봉들이 품고 있는 동굴만도 열두개에 이른다.
또 동굴 속에는 총명수 감로수 원효샘 같은 샘들이 솟아나고 있다
산행의 백미는 의상봉 정상에 올라 낙동강 줄기를 감싸안은 청량산 줄기가 치맛자락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을 조망하는 것.
정상 남쪽의 축융봉(845m)에서 바라보는 청량산의 전경 또한 일품이다
청량산 속에는 한때 30개의 사암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내청량사, 외청량사 두 곳이 남아있을 뿐이다.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청량사의 암자로 663년에 세워진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나다
외청량(응진전) 못지 않게 내청량(청량사)도 수려하다.
응진전에서 20분거리.
풍수지리학상 청량사는 길지중의 길지로 꼽힌다.
육육봉(12 봉우리)이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다.
청량사는 연꽃의 「수술」자리.
응진전과 함께 지어진 고찰 청량사에는 진귀한 보물 2개가 남아있다.
공민왕의 친필로 쓴 현판 "유리보전"과 지불.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라는 뜻이다.
지불은 종이로 만든 부처.
국내에서는 유일하다.
지금은 금칠을 했다.
청량사 바로 뒤에는 청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보살봉이 있다.
원래 이름은 탁필봉이지만 주세붕선생이 지형을 보고 봉우리 이름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청량산의 아름다움은 퇴계가 자신의 시조에서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뿐"이라고 읊은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퇴계는 어릴 때부터 청량산에서 글을 읽고 사색을 즐겼으며 말년에도 도산서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이 산을 찾았다.
청량산 주변에는 신라시대 최치원의 유적지로 알려진 고운대와 명필 김생이 서도를 닦던 김생굴,
김생굴 외에도 암릉을 따라 금강굴, 원효굴, 의상굴, 반야굴, 방장굴, 고운굴, 감생굴 등이 들어서 있다.
이밖에 공민왕이 피란와서 쌓았다는 청량산성, 최치원과 김생이 바둑두던 난가대 등도 더듬어볼 만한 발자취다
입석에서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
뒤로는 거대한 금탑봉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아래는 아득한 낭떠러지.
바위가 마치 9층으로 이뤄진 금탑모양을 하고 있다.
층마다 소나무들이 테를 두른 듯 암벽에 뿌리를 내렸다.
절벽 아래로 붉게 타는 단풍이 장관이다
산행코스 : 선학정하차-입석-웅진전-김생굴-자소봉-뒷실고개-청량사 -선학정- 주차장 (산행시간4시간) .
2016년10월16일.
시흥거산산악회를 통해서 봉화 청량산을 다녀왔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있었지만 오후3시에나 온다니 다행이다.
거리가 먼 관계로 30분 일찍출발이다.
자리가 여유로운 상태로 6시20분경에 출발.
흐린날씨,안개가 많다.
김 환.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 말의 충신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김사렴(金士廉)의 증손이며 지주사(知州事) 김우주(金遇周)의 아들이다. 조상의 고향인 오근(현 충북 청원군 오창면)를 떠나 여주로 들어와 터를 잡은 입향조(入鄕祖)이다.
사정(司正)에 재직하던 1442년(세종 24) 당시에 친시(親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한림(翰林)과 주서(注書)를 역임했고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가 되었다. 1450년(문종 원년) 5월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명(明) 황제가 내린 세자(世子)의 면복(冕服)과 칙서(勅書)를 가지고 중국에서 귀국하였다. 1451년(문종 1) 8월 보령현감(保寧縣監)을 끝으로 관직을 떠났다. 당시 이문(吏文:조선시대에 중국과 주고받던 특수한 관용의 공문서에 쓰이던 서체)과 한어(漢語)를 잘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으로 꼽혔다.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귀백리(歸白里) 백양산 능골의 안동김씨세장지에 묘가 있다.
선학정.
축융봉.
입석.
권 성구.
1642(인조 20)∼1708(숙종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서여(恕余), 호는 구소(鳩巢). 찬성 벌(橃)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승경(承慶)이며, 아버지는 뇌(賚)이다. 유직(柳稷)의 문인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전적·병조정랑을 지냈다.
1688년 진산현감으로 나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한때 모함을 당하여 벼슬을 떠나 귀향하였다가, 1692년 직강(直講)으로 복직하였다.
이듬해 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1699년 강진현감에 임명되었으나 그 때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갔다. 저서로는 『구소선생문집』 4권 2책이 전한다.
취나물꽃.
투구꽃이 아직 남아있다.
구절초.
유홍초.
응진전.
663년(문무왕 3)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연대사(蓮臺寺)를 중심으로 26개의 암자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663년은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 중이었으므로 원효대사 창건한 것이 타당성이 있다.
사찰경내 입구에 원효대사가 우물을 파서 즐겨 마셨다는 원효정(元曉井)이 있는데, 지금은 청량수(淸凉水)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청량사를 내청량사라고 하고 응진전은 외청량사라고 불리는데, 신라불교의 요람으로 33암자가 있다.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청량사의 암자로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응진전의 안내표지판에는 683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6나한과 노국대장공주가 있다.
그래서 공민왕이 청량산으로 몽진했다는 역사적 증거가 된다.
입구에서 2km(약 30분) 등산해야하고, 다시 청량사에서 응진전까지 약 30분 정도 등산해야 한다.
암봉에는 소나무와 각종 활엽수가 울창하며, 청량사 바로 뒤에는 청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보살봉이 있다.
연습
베푸는 것은
부유한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고
화내는 것은
추한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며
시기 질투하는 것은
천박한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자신이 되고자 하는데로
마음을 연습하면
그렇게 이루어 지는 것이다.
총명샘.
산에서는.
산에 오르면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무의미한 말장난에서
벗어나
말없이 조용히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야 한다.
눈과 귀와 생각을
안으로안으로 거두어 들려야한다.
산처럼 나무처럼
맑고 고요하게
돌덧널무덤.
깬돌(割石) 또는 냇돌(川石)과 판돌(板石)을 섞어 쌓은 무덤으로 ‘할석묘(割石墓)’ 또는 ‘석곽묘(石槨墓)’라고도 한다.
돌널무덤(石棺墓)의 하나로 분류하기도 하며 청동기시대 한반도 일부지역에서 조영된 무덤형태이고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나타나는 무덤이나 주로 청동기시대의 것을 지칭하고 있다.
돌덧널무덤(石槨墓)은 해발 50m 이하의 낮은 구릉지대에 주로 분포하며 돌덧널 안에 나무로 짠 널(木棺)을 넣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 방이 깊고 부장유물도 다양한 편이다.
한국에서 돌덧널이 발견된 주요 유적으로는 대전(大田) 괴정동(槐亭洞), 부여(扶餘) 연화리(蓮花里), 아산(牙山) 남성리(南城里), 예산(禮山) 동서리(東西里), 서흥(瑞興) 천곡리(泉谷里), 함평(咸平) 초포리(草浦里), 화순(和順) 대곡리(大谷里) 유적 등이 있으며 중국 동북지방에서도 遼寧 南山根, 湖頭溝 유적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요녕지역의 것은 샤자덴(夏家店)상층문화 유적으로서 한국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일제의 송진채취흔적.
태평양 전쟁 말기, 연합국과 전쟁을 치루기에는 일본의 물자가 부족하였습니다.그래서 일제는 그 당시 식민지로부터 모든 물자를 수탈해 가기에 이르렀죠.
우리나라에서도 사찰의 종은 물론 집안의 놋쇠 숟가락 심지어 요강까지 수탈해 전쟁 물자로 조달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부족한 자원이 석유였고.이 부족한 석유 때문에 비행기 연료 등을 대신할 목적으로 송진을 강제로 채취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송진은 종이, 도료, 비누 제조에 두루 쓰인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쓰임새가 많은 송진을 당시 일본은 연간 4만톤을 소비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자체 생산량은 고작 1000톤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수입으로 충당했고 수입품의 대부분은 미국산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곧이어 미국과의 전쟁이 예상됨에 따라 송진 수입이 원활치 못하게 됐다. 그래서 일제는 한국 전역에서 이를 충당할 송진채취를 강요했던 것이다.
그나마 초기의 송진채취는 농가의 부업 정도로 권장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40년대에 들어서면서 송진채취는 이제 협박 수준으로 돌변했다. 물론 일제가 군사적인 목적으로 송진채취를 강요하기 시작한 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우선, 43년 가을부터라는 얘기가 있다. 이 때 일제는 태평양에서 연거푸 패전을 경험하면서 석유를 비롯한 물자부족을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송진이 본격적으로 항공유로 사용하기 위해 채취됐던 건은 44년 여름부터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 설에 따르면, 송진을 항공유로 쓰게 된 과정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 무렵 일본은 나치독일이 송진에서 항공유를 뽑아내 전투기 연료로 쓴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사실 이 소식은 소문으로 들은 정도여서 송진으로 휘발유를 만드는 법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석유확보에 점차 어려움을 겪던 터라 일제는 쉰 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못 됐다. 그 해 10월 일제는 모든 기관을 동원해 송진을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종전 때까지 일제가 수탈한 송진의 양은 가늠할 만한 자료가 없어 그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도시건 농촌이건 학생과 주민이 이를 위해 동원됐던 건 사실이고, 일부 학교는 이를 위해 휴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광철 <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자소봉(보살봉)과 탁필봉.
연적봉에서 보는 전망.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하는 구름다리와 그너머에 보이는 최고봉인 장인봉.
유리보전(琉璃寶殿)은 약사여래불(약사유리광여래 藥師琉璃光如來)을 모신 곳이라는 뜻으로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우환을 없애주는 부처이다.
청량사 유리보전의 불상은 종이로 만들어 그 위에 금박을 입힌 지불(紙佛)이다.
약사불의 좌측에 지장보살과 우측에 문수보살이 협시불로 자리한다.
663년(문무왕 3)에 원효가 청량사를 창건할 때 지었는데 그후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수차례 증·개축하였다.
1989년에 봉화군청에서 다시 보수하였다.
고려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며, 현판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온다.
안에는 약사여래좌상 1구와 길이 15m의 거대한 괘불이 남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다포집이다.
쇠서의 끝에 연화형(蓮華形) 조각이 새겨져 있고, 전면 중간 기둥 위에 용의 머리와 꼬리가 안팎으로 뻗도록 그려놓았는데 이는 조선후기 건축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유리보전 앞에는 삼각우송으로 불리는 소나무가 있고 5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청량산은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한때는 신라의 고찰인 연대사(蓮臺寺)와 망선암(望仙庵)등 27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공민왕이 죄수들을 사형시키던 밀성대, 원효가 머물렀던 암자인 응진전, 이황의 서당인 청량정사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1974년 12월 10일 경북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청량폭포.
학소대
-추가 (필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