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어도 ‘빤스’ 아닌 꽃무늬 팬티로 들키고 싶다
Ernesto Cortazar - Sicilian Romance
나 죽어도 ‘빤스’ 아닌 꽃무늬 팬티로 들키고 싶다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뎅뎅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 손현숙, 『팬티와 빤쓰』
아주 재미난 시다. 영어의 팬티(panty)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빤스(ぱんつ)가 된다. 같은 속옷이지만 팬티의 이미지가 다르고 빤스의 이미지가 다른 것은 왜일까? 같은 사물에 대해 다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말은 팬티와 빤스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펌과 빠마, 요오드딩크와 아까징끼, 페인트와 뼁끼 같은 것들도 우리의 뇌리에 와 닿는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일본 작가 다코 와카코[田幸和歌子]는 《잡학사전》에서 일본인 최초로 서양식 여성 속옷인 ‘즈로즈’를 손에 넣은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했다. 포르투갈 사람이 선물용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이 이상한 여성 속옷을 구경만 했을 뿐 입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때까지 여자들은 고시마키[腰卷]라 해서 엉덩이에 긴 천을 둘렀는데 오늘날의 팬티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 옷이라기보다는 아이들 기저귀 모양의 긴 천 끝에다 천을 여밀 수 있는 끈을 달아둔 것이었다.
반면 남자들은 국부에 ‘훈도시[褌]’를 찼다. 훈도시란 ‘衣(옷 의)’와 ‘軍(군사 군)’으로 이루어진 한자가 말해주듯이 군사들이 입던 속옷을 말한다. 센코쿠[戰國]시대에는 옷감이 귀해 전사자의 신분을 훈도시를 찼는지로 구분했다고 한다. 당시는 마(麻)가 주류였으나 에도시대에 들어와서는 면으로 바뀌었고 무사 외에 일반 서민들에게도 보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남자들의 속옷 역할을 했으나 패전 후 서양 옷과 함께 팬티의 유입으로 급속히 착용자가 줄어들어 지금은 일본의 축제인 마츠리 등에서만 쓰인다.
훈도시를 입고 마츠리에 참여하고 있는 일본 남성들
일본에서 오늘날 입는 팬티가 선을 보인 것은 1956년으로 당시 일주일을 의미하는 ‘7색 팬티’를 만들어 팔았는데 색색으로 골라 입을 수 있어 여성들 사이에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는 여성들이 입는 것을 ‘판티’라고 했고 1980년대 후반에는 남자가 입는 것이든 여자가 입는 것이든 모두 ‘빤츠’라 부르다가 이후 여성용과 유아용만 ‘쇼츠’라고 부르는 등 우리와 달리 팬티의 명칭이 복잡하다.
정리하면 우리가 속곳-사리마다-빤스-팬티라 부른 데 반해 일본은 여성의 경우 고시마키-판티-빤츠-쇼츠, 남성의 경우 훈도시-사루마다-빤츠라고 불렀다. 사루마다(さるまた)는 한자로 猿股 또는 申又라고 쓰는데, 한국인들이 빤스 이전에 사리마다라 부른 것은 남자 속옷을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 사루마다가 일본인들이 원숭이(사루)처럼 머리카락이 노랗고 몸에 털이 많이 난 서양인을 처음 보고 그들이 입는 자루 같은 옷이라 해서 만든 말이라고 하기도 한다. 근거가 없다고 일축할 수는 없으나 ‘사루’는 원숭이를 뜻하지만 ‘마타[股/胯/叉]’는 가랑이를 뜻하는 것으로 자루와는 거리가 있다.
사리마다, 빤스, 팬티의 유래를 살펴보고 있자니 우리말의 속옷은 없나 싶은데 조금만 살피면 우리 것도 잔뜩 있다. 전통사회에서 한국 여성들은 치마 속에 입는 옷으로 속속곳-속곳-고쟁이-단속곳을 입어야 비로소 치마를 입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처럼 달랑 팬티 하나 입는 것에 비해 속옷 하나에도 켜켜이 격식을 차릴 줄 알았다. “고쟁이를 열두 벌 입어도 보일 것은 다 보인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속옷에 관심이 많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빤스’를 찾아보면 “빤쓰([일]pansu): 팬티”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빤스나 팬티 모두 속잠방이나 속곳이라는 우리말로 순화해 사용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네이버 지식백과] 나 죽어도 ‘빤스’ 아닌 꽃무늬 팬티로 들키고 싶다 (사쿠라 훈민정음, 2010. 11. 15., 인물과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