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이야기

벚꽃이야기(2012.04.22)

털보나그네 2012. 4. 22. 18:25

 


편안한 밤을 위한 피아노곡

 

01. 봄날 - 엄마의 피아노
02. Yiruma - Kiss The Rain (String Ver)
03. 데이드림 - Little Comfort    
04. Ariya - 아름다운 나날들 속에서       
05. 박종훈 - That Rainy Day   
06. Ray Jung - Waltz For Her 
07. Joe Hisaishi - 인생의 회전목마   
08. Yuhki Kuramoto - 마음의 줄 (Heartstrings)  
09. Yuriko Nakamura&Yoshihiko Maeda - Long Long Ago
10. Yukie Nishimura - When My Heart Is Full 
11. Yuichi Watanabe - 일곱 빛깔의 날개   
12. Steve Barakatt - Tendres Souvenirs   
13. Jmi brickman - Night Prayer
14. Jeanette Alexander - Walk In The Sun  
15. Andre Gagnon - Bobichon  
16. David Lanz - A Song For Helen      
17. Paul Cardall - Without You      
18. John Boswell - Toujours   
19. Kentaro Haneda - La Califa    
20. Pat Clemence - Aurora (A Mother's Touch)  
    


      
21. Brian Crain - Song For Sienna   
22. Michael Hoppe - Jude's Theme      
23. Giovanni Marradi - Secrets   
24. 메이세컨 - Giving Tree      
25. 눈사람 OST - 기도       
26. Monla - Angelina      
27. Hajima Mizogushi - Somewhere In The Time  
28. George Skaroulis - Is Agios(I Believe)  
29. Paul Pennell - Summer Christmas      
30. Phil Coulter - Highland Cathedral      
31. Carl Doy - Piano By Candlelight     
32. Didier Squiban - Tal Ar Mar    
33. Ludovico Einaudi - una mattina  
34. Danny Wright - Do You Live, Do You Love     
35. Michael Jones - Return to Love   
36. Ernesto Cortazar - Tears      
37. Pisidia - Release   
38. Mino Kabasawa - ラピシア    
39. Masaji Watanabe & Tatsuo Kato - The Cloud Sea      
40. Atsushi Tohno - Love Spring   
41. Michael Dulin - once Upon A Time 
42. Michael Manring - Sung To Sleep      
43. Sad Moon - Sad Moon    
44. Osamu Kubota - Consolation      
45. Isao Sasaki - Melancholy    


46. Bernward Koch - Flying To Abraxas      
47. David nevue - Home    
48. Christopher Peacock - Waterline      
49. Wong Wing Tsan - Asian Sea    
50. Lin Hai & Friends - What The Pipa Says  
51. 지금 만나러 갑니다 OST - 지금 만나러 갑니다 , 시간을 넘어서    
52.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OST- 넓은 하늘로 이어지는 길     
53. Pierre Porte - Dix ans deja    
54. Laurens Van Rooyen - Song For Piano
55. Raul Di Blasio - Piano
56. 내이름은 김삼순OST - 봉봉 오 쇼콜라 III 
57. Scott Wilkie - Home Again    
58. David London - The Way to My Heart   
59. Jim Wilson - Django's Hope    
60. Omar - Passage into Midnight  
61. Stamatis spanoudakis - Birthday 98'    
62. Carol Cole - First Love    
63. Robin Spielberg - Soldiers Journey   
64. Seiko sumi - Love Is 
65. Tomohisa Okudo - Always With Me 
66. 신이경 - Forest In The Rain (비오는 숲)   
67. Jim Chappell - Mockingbird Days   
68. Jan Vayne - More Than Anything In This World


 

 


 

 

 

 

벚꽃이야기.

 

 

 

 

 

2012.04.22.

서양에서 벚꽃은 일반적으로 봄, 순결 처녀의 상징으로, 그리스도교 전설에서는 그 중의 버찌가 마리아의 성목이 된다.

마리아가 이 열매를 남편이 요셉에게 구해서 거절당했을 때, 가지가 마리아의 입안에까지 처졌다고 하며, 거기에서 꽃은 처녀의 아름다움에 열매는 천국의 과일로 비유되었다.

또한 영국에서는 한 알씩 먹으면서 결혼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연애점이 있다.

꽃말은 <교양>, <정신미>, 일본의 벚꽃은 <부와 번영>, 열매가 두 개 붙은 것은 <행운>이나 <연인의 매혹>의 상징이다.

인터넷 검색중 재미나고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있어 모셔왔다.


슬픈 역사의 흔적’ 정도로 치부하기엔, 그건 너무 깊숙이 우리 삶에 들어와 있었다. 의례적 ‘봄맞이 행사’ 쯤으로 치레하기에도 우린 거기에 너무 많이 빠져있었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또 청춘은 청춘대로 그것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고 설렘이 있었다.‘창경궁’이 궁의 위엄을 잃고 ‘창경원’으로 지낸 70여년이 그랬다.

 

 

일제의 ‘조선 말살 정책’으로 심어진 벚나무

 

세월은 거기서 아픔과 함께 낭만도 키워냈다. 그 바탕엔 일제가 제 나라 혼이라며 옮겨 심은 벚나무가 있었다. 흐드러진 연분홍 꽃잎으로 4월을 물들이는 이 봄의 전령은 해방 후에도 자그마치 40년간 창경궁 안뜰을 차지한 채 우리에게 아픔과 추억, 낭만을 동시에 제공했다.

갓 쓰고 도포를 펄럭이며 서울 나들이에 나선 노인 모습을 거기선 쉽게 볼 수 있었다. 일제 때는 모던보이, 모던 걸의 아베크 장소이기도 했다. 전차 타고 종로에서 내려 화신백화점을 거쳐 ‘창경원 벚꽃 터널’을 걷는 게 당시 신세대의 데이트 코스였다. 그것이 한국전쟁 후 60∼70년대엔 온 국민의 유일한 상춘관광지로, 소풍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30대 중반을 넘긴 이면 누구나 하나쯤 ‘창경원 추억’을 가지고 있을 만큼 국민적인 명소였다.


                  

회갑맞이 창경원
1969.04.21 [경향신문] 7면

창경궁은 일찍이 중종이 대장금의 진료를 받았던 곳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뒤주 비극’이 일어난 장소도 그곳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기념으로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나눠주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을 참배하려고 쪽문을 낸 곳 역시 창경궁이다. 수많은 왕과 왕비, 왕자, 공주의 생로병사가 이루어졌고 왕이 직접 농사 시범을 보인 곳 또한 창경궁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왕조의 혼이 깃든 터였다.

 

바로 거기서 일제는 조선왕조 말살의 삽을 떴다. 1907년부터 창경‘궁’(宮) 안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 식물원과 박물관을 지었다. 언덕과 뜰에 가득 벚나무를 심었다. 1911년엔 이름도 창경‘원’(苑)으로 격하했다. 백성들이 부담 없이 와서 보라고 순종이 궁을 원으로 낮췄다지만 일제 정책에 굴복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1924년 봄, 창경원에 처음으로 색등을 밝히고 밤 벚꽃놀이가 벌어졌다. 일본의 그것을 본뜬 것이었다.

 

 

소풍의 명소, 국민 대표 관광지로 자리잡다

상춘 절정.. 전국서 행락인파 백만
1970.04.27 [동아일보] 7면


망국의 한이 서려있건만 봄의 서막을 여는 창경원 벚꽃 축제는 언제나 화려했다. 1920∼30년대 옛날신문과 소설에도 창경원은 벚꽃 유락과 현란한 소풍의 명소로 등장한다. 1936년 4월25일 동아일보는 창경원 봄소식을 전하며 “금년도 시설로는 춘당지에 직경 약 12메틀(미터)의 장려한 네온사인 분수탑을 건립하야 오채(五彩)의 광파를 못 속에 비치게 할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이상 김유정의 작품들엔 맥고모자 쓰고 꽃잎이 꽃비가 돼 날리는 창경원을 거닌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 곳곳에선 군국주의 상징처럼 된 벚나무를 베며 항의하는 소동이 일었다. 며칠 활짝 폈다 한꺼번에 지는 벚꽃 속성을 전우애마냥 주입시켜 젊은이들을 전쟁 낙화로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특히 미국함대에 자폭 돌진한 가미카제 특공대의 죽음에 대한 항거 표시가 많았다. 그러나 수많은 젊은이를 강제징병, 징용으로 잃고도 한국의 벚나무는 살아남았다. 오히려 그 화용(花容)으로 더 사람을 끌고 흥을 돋우는 축제의 주역이 됐다.

1961년 4월15일. 창경원 밤 벚꽃놀이 개막에 맞춰 신문들은 일제히 난장판을 우려하는 기사를 실었다. “미아 도난 주정뱅이 쌈패 등으로 난장판이 되곤 한다. 꽃구경이 아니라 사람구경이오, 꽃에 취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취하기 때문에 살풍경의 천지로 일변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바로 낯 뜨거운 얘기가 이어진다. “무지한 취한인 경우 경내에서 똥오줌을 함부로 내깔기는 것은 예사요…젊은 남녀 아베크족은 이르는 곳마다 으슥한 숲속을 찾아 온갖 추태를 벌이는 데 보는 사람이 머리를 외로 꼴 지경이다…”

그러나 어쩌랴. 먹고 즐길 것도, 탈 것도, 쉴 시간과 공간도 부족했던 때다. 추위가 물러간 봄 밤, 흐드러지게 핀 벚꽃 동산을 오색 전등이 밝혀주는 데가 어디 그리 흔한가. 입장료 싸고 꽃은 물론 사람구경, 동물구경도 함께 할 수 있는 창경원은 그야말로 최적의 유락공간이었다(사람이 워낙 많아 휴식공간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어린이 손을 잡은 가족 관람객이 줄을 이었고 밤에는 연인과 부부, 짝을 찾는 젊음들로 북적인 게 당연했다.

 

창경원 관리소도 사람을 끄는데 적극적이었다.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벚꽃놀이 동안 낮에는 육해공군 군악대 쇼를 열고 밤에는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영화도 상영했다. 많을 때는 하루 25만 명이 창경원을 찾았다. 시설물을 제외하고 사람이 설 수 있는 땅엔 평당 5명 넘게 들어찼다. 물론 입장객 기준이니 같은 시간 평당 인원으로 산출하긴 무리지만 아무튼 사람들은 밀고 밀려 거의 둥둥 떠다니는 형국이었다.


상춘 공해도 초만원
1972.04.24 [경향신문] 7면

창경원 옆 종로4가∼원남동∼혜화동 길은 휴일이면 사람들로 메워졌다. 가짜 입장권이 등장하고 암표도 기승을 부렸다. 아침 7시 찬합에 김밥을 싸고 과일과 달걀 사이다, 돗자리까지 꾸려 집을 나서면 버스 전차를 갈아타고 8시 반경 원남동에 도착했다. 거기서 홍화문 매표소까지 걸어가는데 또 한 시간. 표를 사느라 거의 3,40분을 허비하면 어른들은 다리에 힘이 다 빠졌다. 하지만 꼬마들은 신이 났다. 바로 옆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울부짖고 힘센 어른들이 발로 밟고 정강이를 걷어차도 마냥 신이 났었다.

일부 대학생들에게는 ‘나체팅’ 장소로 인기

 

100만 인파속에 난장판 행락
1970.04.27 [경향신문] 7면


경내는 꽃 길이라기보다 차라리 흙먼지 길이라고 부르는 게 옳았다. 바가지요금이 판을 쳤고 미아는 하루 종일 발생했다. 잠시 앉아 쉴 공간을 찾기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앉았다 하면 껌팔이 풍선장수 사진사 등 잡상인이 끊임없이 괴롭혔다. 20원짜리 껌 한 통에 100원, 50원짜리 초콜릿을 500원에 파는 건 예사였다. 아이에겐 풍선을, 애인에겐 초콜릿을 권하며 안 사면 폭행이라도 할 듯 눈을 흘겼다. 공인매점도 다를 바 없었다. 45원짜리 소주를 60원, 100원 맥주를 130원, 30원 사이다를 40원에 파는 창경원 구내매점의 바가지 상혼이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집 나서면 고생’이란 말은 창경원 나들이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인파에 밀리고, 그 속에 숨은 소매치기가 불안하고, 바가지 상혼에 시달리고, 자칫하면 손잡은 아이를 잃고, 화장실이 부족해 적당히 해결할 수밖에 없고… 게다가 ‘밤의 여인들’까지 등장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71년 경향신문은 “40여년 축제가 고고 니나노 폭력 윤락으로 뒤범벅 돼 모처럼의 나들이를 잡친다.”고 한탄했다. 옛날에는 “길가에 줄지어선 벚꽃들이 가지가 휠만큼 만개해 마치 꽃 터널을 지나듯 장관이었지만 요즘은 오색등 아래 술 마시고 흥청댈 놀이터나 찾아올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론의 질책도 아랑곳없었다. 서민들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또 창경원을 찾았다. 아이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창경원 놀이를 가자고 부모를 졸랐고 부모들은 그걸 미끼로 아이들 공부를 시켰다. 시골사람들은 서울에 오면 다른 어디보다 우선 창경원을 찾았다. 평일에는 초등학생의 소풍행렬이 이어졌고 일부 대학생들은 ‘나체팅’을 한다며 또 창경원을 찾았다. ‘밤(나이트)벚꽃(체리블라섬)미팅’의 앞뒤 글자를 하나씩 뽑아 만든 나체팅은 70년대 대학가에서 한때 인기품목이었다.

 

춘당지에서 보트놀이를 하고 노을 비낀 수정궁에 앉아 저녁식사를 한 다음 밤 벚꽃 길을 오색등 따라 걷는 미팅. 30년대 모던보이의 운치를 닮은 그것은 그러나 유신과 긴급조치의 시국상황에 분개해 있던 대학생들로부턴 속없는 짓거리란 비판을 받았다. 그즈음 일부에서나마 일제 식민 잔재인 고궁의 벚꽃 아래 요란하게 봄을 즐기는 행태가 과연 옳으냐는 의문도 제기됐다. 게다가 당시는 자동차 보급률이 높아지고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여가시설이 속속 들어서는 등 창경원의 독보적 위치도 흔들리기 시작할 때였다.


봄이 속삭이는 밤 벚꽃놀이 창경원
1972.04.11 [동아일보] 7면

‘원’으로 지낸 아픔에서 회복된 창경궁

창경원 벚꽃 남겨두나…없애나
1986.04.21 [동아일보] 11면


1980년대 초반. 창경원 벚꽃놀이는 여전히 인기 있었다. 인파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왕궁을 동물원으로 격하하는 등 식민잔재를 해방 40여년이 되어서도 청산하지 못한데 대한 여론의 불만도 비등점에 이르러 있었다. 1983년. 창경원은 4월9일부터 5월8일까지 한 달 간 밤 벚꽃놀이 축제를 열었다. 첫 휴일인 4월11일에는 15만 3천여 명이 몰려와 연분홍 봄밤의 운치를 마음껏 즐겼다.

 

  해 8월 문화재관리국은 “일제에 의해 원으로 격하된 창경궁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 해부터 동물들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사를 갔다.

 

1986년. 새롭게 단장 복원된 창경궁을 공개하기에 앞서 궁내에 남아있던 벚나무의 처리문제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창경원 시절에 있던 1천3백여 그루 가운데 학교 등에 분양하고 남은 6백 그루를 그대로 궁내에 두느냐, 아니면 없애느냐는 논란이었다.

나무엔 죄가 없으므로, 또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에 얽혀 있으므로 존치시키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잔재를 말끔히 청산하자는 의견을 엎지는 못했다. 벚나무는 어린이 대공원과 여의도 등으로 옮겨 심어졌다. 창경궁은 완전치는 않으나마 아픔에서 회복됐다. 일제가 파괴한 건물이 완벽히 재현된다면 왕궁으로서의 위엄도 다시 갖출 것이다. 원(苑)으로 지낸 70여년의 추억도 빠르게 잊어지는 것 같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잠시 비가 소강상태인 오후에 비둘기공원엘 다녀왔다.

 

 

 

 

 

 

 

 

 

 

 

산수유.

자두꽃.

 

 

 

 

 

라일락.

돌단풍

동자꽃.

 

목련.